역사

輿圖部總論一

yjsunshine 2024. 6. 22. 18:42

2024.06.22

欽定古今圖書集成/方輿彙編/坤輿典/第104卷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wikisource.org)

 

 

宋王應麟地理通釋 顓帝九州 冀、兗、青、徐、揚、荊、豫、梁、雍。《帝王世紀》云:顓帝所建,帝嚳 受之,孔子稱其地北至幽陵,南暨交阯,西蹈流沙,東 極蟠木,是以建萬國而制九州。《通典》亦謂顓帝置九 州。葉氏云:「《祭法》:共工氏之霸九州也,其子曰后土,能 平九州。」則九州之名舊矣。 幽陵,幽州交阯,交州。「流沙,在沙州西。蟠木東海度索山上有屈盤桃木。」 舜十二州 「冀、兗、青、徐、揚、荊、豫、梁、雍、幽、并、營。」孔氏云:「禹治水之後, 舜分冀為幽,并分青為營。」馬氏云:「禹平水土,置九州; 舜以冀州之北廣大,分置并州;燕、齊遼遠,分燕為幽, 齊為營。」《漢地理志》云:「堯遭洪水,天下分絕,為十二州。 禹平水土,更制九州,列五服。」與孔、馬之說異。愚謂《舜 典》言「肇十有二州,咨十有二牧,而後命禹平水土。」當 以《漢志》為正。鄭氏謂分衛為并,燕以北為幽,分齊為 營。朱氏謂分冀東恆山之地為并,又東北醫無閭之 地為幽,又青之東北遼東等處為營,而冀止有河內 之地,今河東一路是也。劉氏云:冀州之域大於九州, 於是分為幽、并,以此二州北扞外裔,使不得接於王 畿。《書大傳虞夏傳》云:「兆十有二州。」注:「兆,域也。為營域 以祭十二州之分星也。」

 

### 송나라 왕응린의 《지리통석》(地理通釋)

#### 전제(顓帝)의 구주(九州)
전제(顓帝)는 구주(九州)를 설정하였다. 구주란 기(冀), 연(兗), 청(青), 서(徐), 양(揚), 형(荊), 예(豫), 양(梁), 옹(雍)이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는 전제가 구주를 세우고, 제후가 이를 이어받았다고 전한다. 공자도 이 지역이 북쪽으로 유릉(幽陵)까지, 남쪽으로 교지(交阯)에 이르며, 서쪽으로 유사(流沙)까지, 동쪽으로 반목(蟠木)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만국을 세우고 구주를 다스렸다고 한다. 《통전》(通典)에서도 전제가 구주를 두었다고 한다. 엽씨(葉氏)는 "《제법》(祭法)에서 공공씨(共工氏)가 구주를 지배하였고, 그의 아들 후토(后土)가 구주를 평정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구주의 이름은 예로부터 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 유릉(幽陵)은 유주(幽州)와 교지(交州)를 의미한다.
- 유사(流沙)는 사주(沙州) 서쪽에 있다.
- 반목(蟠木)은 동해(東海) 도삭산(度索山) 위에 있는 굽은 복숭아나무이다.

#### 순(舜)의 십이주(十二州)
순(舜)은 열두 주를 설정하였다. 기(冀), 연(兗), 청(青), 서(徐), 양(揚), 형(荊), 예(豫), 양(梁), 옹(雍), 유(幽), 병(并), 영(營)이다. 공씨(孔氏)는 "우(禹)가 물을 다스린 후, 순(舜)이 기주(冀州)를 나누어 유주(幽州)와 병주(并州)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마씨(馬氏)는 "우(禹)가 물과 땅을 평정하여 구주를 두었고, 순(舜)은 기주의 북쪽이 넓으므로 병주를 두었고, 연(燕)과 제(齊)가 멀리 떨어져 있어 연을 나누어 유주로, 제를 나누어 영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한지리지》(漢地理志)에서는 "요(堯)가 홍수로 인해 천하가 열두 주로 나뉘었고, 우(禹)가 물을 평정하여 구주를 다시 설정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공씨와 마씨의 설과 다르다. 내가 생각하기에 《순전》(舜典)에서 "열두 주를 처음으로 설정하고, 열두 목(牧)을 고문하였으며, 이후 우(禹)에게 명하여 물을 평정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한지》(漢志)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정씨(鄭氏)는 "위(衛)를 나누어 병주를 만들고, 연의 북쪽을 나누어 유주를 만들고, 제를 나누어 영주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주씨(朱氏)는 "기주 동쪽의 항산(恆山) 지역을 나누어 병주를 만들고, 또 동북쪽의 이무려(醫無閭) 지역을 나누어 유주를 만들고, 또 청주의 동북쪽 요동(遼東) 지역을 나누어 영주를 만들었다. 기주는 하내(河內)의 지역만 남았으며, 지금의 하동(河東) 일대이다"고 하였다. 유씨(劉氏)는 "기주가 구주보다 넓어서 이를 나누어 유주와 병주를 만들었다. 이 두 주는 북쪽에서 외적을 막아 왕기(王畿)에 접하지 않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서대전우하전》(書大傳虞夏傳)에서는 "열두 주를 설정하였다"고 하였으며, 주석에서는 "열두 주를 나누어 제사 지내기 위한 지역을 설정하였다"고 하였다.

五服 「甸、侯、綏、要荒。」葉氏云:「禹制五服,每服率五百里,而王 畿甸服在其內,則一方為二千五百里,東西南北相 距各五千里。此所謂弼成五服,至於五千者也。至周 而益為九畿,每畿亦五百里,而王畿又不在內,則一 方為五千里,南北東西各萬里。周之地果如是廣乎? 學者求其說而不得,故鄭氏以堯舊服五千里,至禹」 治水之後,又增其倍。謂《禹貢》所記為舊服所增之數, 以與周制合。又謂「周公攝政,斥大九州之境,故五等 諸侯之封,大者增其五之四,小者增其十之五。」此皆 矯妄不經,無所取信。以《周官·大司馬》九畿之籍考之, 方千里曰國畿,其外亦皆以方言。方者謂四方也。四 方環之為千里,徑數之每方當止為「二百五十里,則 周之畿為儉於禹矣。」林氏云:「以《王制》考之,堯都冀州, 自恆山至南河千里,自東河至西河千里,此畿內千 里,即甸服也。自東河至東海千里,自西河至流沙千 里,此千里建、五百里侯服、五百里綏服。而東海流沙 之外則為要荒,誠合《經》之所載;至於南北,則有盈縮 焉。以北考之,冀之北」,距恆山已接於邊陲,其間何以 容二千五百里之侯綏要荒哉?以南考之,自南河至 江千里,已建侯服綏服矣,自江至衡山千里,則要荒 二服又在九州之內矣。然自衡山至南海又千里,揚 州之境,且南距海,則九州且包乎要荒之外。是以南 考之則太盈,以北考之則太縮,實疑而未知其說,意 其必有乘除相補於其間也。應氏云:「自秦而上,西北 袤而東南蹙;自秦而下,東南展而西北縮。」古今之疆 理,天地之大運,中國外裔之消長,大略可見。當先王 盛時,東西南北各有不盡之地,葢聽四夷居之,不勞 中國以事外也。若《禹貢》之東漸西被,而朔南咸暨,特 其聲教之所及,非必貢賦之所限也。故外「薄四海,弼 成五服,至于五千者,此區域之大數,而疆理之略者 也。四海之內,斷長補短,方三千里者,此民田之大數, 而疆理之詳者也。」觀於「曰內」、「曰外」二字,而治之詳略 可知矣。王氏曰:「舜之五服,侯、甸、綏三服,在九州之內; 要服有夷,荒服有蠻,在九州之外;成周九服,侯、甸、男、 采、衛、要六服,在九州之內」;夷、鎮、蕃三服,在九州之外。

 

### 송 왕응린의 《지리통석》(地理通釋) - 오복(五服)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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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甸), 후(侯), 수(綏), 요(要), 황(荒)"이 있다. 엽씨(葉氏)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禹)는 다섯 복(服)을 제정하여, 각 복이 500리씩을 차지하게 하였다. 왕기(王畿) 내에 있는 전복(甸服)은 한 방향으로 2500리가 되고, 동서남북 각각 5000리가 된다. 이는 오복을 완성하여 5000리에 이르는 것이다. 주나라에 이르러 구기(九畿)로 늘어났으며, 각 기는 500리씩이었다. 왕기는 그 안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한 방향으로 5000리씩, 남북동서로 각각 10000리가 된다. 주나라의 땅이 과연 이렇게 넓은가? 학자들이 이를 해석하려 했으나 얻지 못하여, 정씨(鄭氏)는 요(堯) 시대의 옛 복(五千里)을 우(禹)가 물을 다스린 후에 그 배로 늘렸다고 설명하였다. 이는 《우공》(禹貢)에 기록된 것이 옛 복을 증가시킨 수라 하여 주나라의 제도와 맞춘 것이다. 또 주공(周公)이 섭정을 맡아 대구주(大九州)의 경계를 확장하여, 다섯 등급의 제후의 봉지가 큰 것은 그 4/5를, 작은 것은 그 10/5를 늘렸다고 하였다. 이는 모두 잘못된 이야기로 신뢰할 수 없다."

"《주관·대사마》(周官·大司馬)에서 구기(九畿)의 기록을 살펴보면, 방향으로 천 리를 국기(國畿)라 하였고, 그 외부도 모두 방향으로 천 리였다. 여기서 방향은 사방을 의미한다. 사방을 합하여 천 리이니, 직경으로 계산하면 각 방향마다 250리밖에 되지 않으므로 주나라의 기는 우의 것보다 작다."

"림씨(林氏)는 《왕제》(王制)에 따르면, 요(堯)의 도읍이 기주(冀州)였고, 항산(恆山)에서 남하하여 남하(南河)까지 천 리, 동하(東河)에서 서하(西河)까지 천 리였다고 하였다. 이는 기내(畿內) 천 리, 즉 전복(甸服)이다. 동하에서 동해까지 천 리, 서하에서 유사까지 천 리는 천 리의 전복(甸服), 오백 리의 후복(侯服), 오백 리의 수복(綏服)이 된다. 그리고 동해와 유사의 외부는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이다. 이는 《경》(經)에 기록된 바와 일치한다. 그러나 남북 방향은 다소 다르다. 북쪽으로는 기주의 북쪽이 항산과 이미 접경하였으므로, 그 사이에 2500리의 후복과 수복, 요복, 황복을 담을 수 없다. 남쪽으로는 남하에서 강까지 천 리, 이미 후복과 수복이 설정되었고, 강에서 형산까지 천 리, 이는 요복과 황복이 다시 구주 내에 있는 것이다. 형산에서 남해까지 다시 천 리, 양주(揚州)의 경계는 남쪽으로 바다에 이르러 구주가 요복과 황복 외부를 포함하게 된다. 따라서 남쪽으로는 너무 넓고, 북쪽으로는 너무 좁아서, 실질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내 생각에는 반드시 어떤 조정과 보완이 있었을 것이다."

"응씨(應氏)는 '진(秦) 이전에는 서북이 넓고 동남이 좁았으며, 진 이후에는 동남이 넓고 서북이 좁아졌다'고 하였다. 고금의 경계와 천지의 대운, 중국과 외국의 변동을 대략 볼 수 있다. 성왕(先王)의 전성기에는 동서남북 각 방위마다 끝없는 땅이 있어 사방의 이민족들이 살도록 하여, 중국을 외국의 일로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우공》(禹貢)의 동쪽으로는 바다까지, 서쪽으로는 하서까지, 북쪽으로는 대하까지, 남쪽으로는 오나라와 월나라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 영향력이 미친 범위를 말한 것이지, 반드시 공납의 한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해의 외부에까지 다섯 복을 완성하여 5000리에 이르렀으니, 이는 구역의 대략적인 수치이다. 사해의 내부는 길고 짧음을 단절하여, 방형으로 3000리가 되니, 이는 민전의 대략적인 수치이다. '내외(內外)' 두 글자를 통해 자세한 치리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왕씨(王氏)는 '순(舜)의 오복(五服) 중 후복(侯服)과 전복(甸服), 수복(綏服)은 구주 내에 있으며, 요복(要服)에는 이(夷)가 있고, 황복(荒服)에는 만(蠻)이 있으며, 이는 구주 외부에 있다'고 하였다. '성주(成周)의 구복(九服) 중 후복(侯服), 전복(甸服), 남복(男服), 채복(采服), 위복(衛服), 요복(要服) 등 육복(六服)은 구주 내에 있고, 이복(夷服), 진복(鎮服), 번복(蕃服) 등 삼복(三服)은 구주 외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