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照寺眞澈大師碑
2025.02.14
眾-->무리 중,衆의 本字
謚--> 웃을 익, 시호 시 1. 웃다2. 시호(諡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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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有唐高丽国海州须弥山广照寺故教谥真澈禅师宝月乘空之塔碑铭
广照寺真澈大师碑
廣照寺眞澈大師碑
有唐高丽国海州须弥山广照寺故教谥真澈禅师宝月乘空之塔碑铭
有唐高麗國海州須彌山廣照寺故教謚真澈禪師寶月乘空之塔碑銘
당나라 고려국 해주 수미산 광조사 옛 교시 진철 선사 보월승공지탑 비명
昔者肉身菩萨惠可禅师,每闻老生谈天竺吾师夫子达摩大师,乃总持之林菀,不二之川泽也。於是远赍祖法□梁,而又游化魏朝,往寻嵩岳,非人不授。始遇大宏,因物表心,付衣为信,犹亦优昙一现,洎於五叶相承,其道弥尊,不令断绝,格於天鉴,元学咸宗,殊见所生,信衣斯止。是故曹溪为祖,法水长流,波□滔天浩浩,犹鲁公之政,先奉文王、康叔之风,以尊周室。则知当仁秀出者唯二,曰让曰思,实繁有徒,蕃衍无极。承其让者大寂,嗣其思者石头,石头传於药山,药山传於云岩,云岩传於洞山,洞山传於云居,云居传於大师,传法继明,焕乎本藉。且曰:大师法讳利严,俗姓金氏,其先鸡林人也。考其国史,实星汉之苗。远祖世道凌夷,斯卢多难,偶随萍梗,流落熊川。父章,深爱云泉,因寓城之野,故大师生於◆泰。相表多奇,所以竹马之年,终无(缺)年十二,往迦邪岬寺,投德良法师,恳露所怀,求为师事。自此半年之内,三藏备探。师谓曰:「儒室之颜生,释门之欢喜,是知後生可畏,於子验之者矣。」则非久植宿因,其孰能至於此。然则母氏初於有娠,梦神僧来寄青莲,永为征信,则知绝尘合契,怀曰同符。中和六年,受具足戒於寺道坚律师。既而油钵无倾,浮囊不漏,桑门记位,不唯守夏之勤:草系悬心,宁止终年之恳。 其後情深问道,志在观□,结瓶下山,飞锡沿海。乾宁三年,忽过入浙。後崔艺熙大夫方将西泛,?迹而西,所以高悬云帆,遽超雪浪。不销数日,得抵鄞江。於时企闻云居道膺大师,禅门之法胤也,不远千里,直诣元关。大师谓曰:「曾别匪遥,再逢何早?」师对云:「未曾亲侍,宁导复来?」大师默而许之,潜惬元契。所以服勤六载,寒苦弥坚。大师谓曰:「道不远人,人能宏道,东山之旨,不在他人,法之中兴,唯我与汝。吾道东矣,念兹在兹。」师不劳圯上之期,潜受法王之印,以後岭南河北,巡礼其六?堵波;湖外江西,遍参其诸善知识。遂乃北游恒岱,无处不游;南抵衡庐,无山不抵。谒诸侯而献刺,投列国以观风,四远参寻,遍宜舍筏,珍重屏翳,逦迤东征。爰有金海府知军府事苏公律熙,选胜光山,仍修堂宇,倾诚愿海,请住烟霞。桃李无言,稻麻成列,一栖真境,四换周星。大师虽心爱禅林,遁世无闷,而地连贼窟,图身莫安,所以乱邦不居,於是乎在。十二年,途出沙火,得至遵岑,永同郡南,灵觉山北,寻谋驻足,乍此踟蹰,缁素闻风归心者众矣。 今上闻大师道高天下,声盖海东,想对龙颐,频飞鹤版。大师谓众曰:「居於率土者,敢抿纶音;傥遂朝天者,须沾顾问。付嘱之故,吾将赴都。」所以便逐皇□,来仪帝壤。上重光大业,仰止高山,所以修葺泰兴,请停慈盖。粤以明年二月中,特遣前侍中权说太相朴守文迎入舍那内院,虔请信住持。无何,迥饬蕊宫,高敷莲座,待以师资之礼,恭披钻仰之仪。犹如西域摩腾,先陟汉皇之殿;康居僧会,始升吴主之车。遂以麈尾发挥,龙颜欣悦,其於瞻仰,偏动宸襟。此时鱼水增欢,不可同年而语哉!他时乘闲之夕,略诣祥扉问曰:「弟子恭对慈颜,直申素恳。今则国仇稍扰,邻敌交侵,犹似楚汉相持,雄雌未决,至於三纪,常备二凶,虽切好生,渐深相杀,寡人曾蒙佛诫,暗发慈心,恐遗玩寇之愆,仍致危身之祸。大师不辞万里,来化三韩,救?昆岗,昌言有待。」对曰:「夫道在心不在事,法由己不由人。且帝王与匹夫,所修各异,虽行军旅,且ê黎元。何则?王者以四海为家,万民为子,不杀无辜之辈,焉论有罪之徒。所以诸善奉行,是为宏济。」上乃抚机叹曰:「夫俗人迷於远理,预惧阎摩,至如大师所言,可与言天人之际矣。所以救其死罪,时缓虔刘,怜我生灵,出於涂炭,此则大师之化也。」 其後大师自栖京辇,频改岁时,每以注目山川,欲择终焉之地。隐雾之志恳到,闻□天上,上莫阻道情,潜忧生别,思惟良久,久乃许焉。大师临别之间,特披悲感云:「仁王宏誓,护法为心,遥垂外护之恩,永蓄苍生之福。」所以长兴三年,下教於开京西北海州之阳,遽择灵峰,为构精舍,寺名广照,请以居之。是日大师略领门徒,就栖院宇,学流盈室,禅客满堂,若融归北海之居,疑惠结东林之社。所以诲人不倦,如镜忘疲,其众如麻,其门如市。然则不资分卫,唯免在陈,此乃官庄则分锡三庄,供事则具颁四事。况复近从当郡,傍及邻州,咸发深心,并修净行。则知花惟エ卜,如投宝树之园;林是ヤ檀,似赴庵萝之会。大师先来於踏地,备自馀山,师至魂交,神来顶谒,献粲输玉泉之供,披诚指庐阜之居,其为神理归依,皆如此类。
昔者肉身菩薩惠可禪師,每聞老生談天竺吾師夫子達摩大師,乃總持之林菀,不二之川澤也。於是遠齎祖法□梁,而又游化魏朝,往尋嵩嶽,非人不授。始遇大宏,因物表心,付衣為信,猶亦優曇一現,洎於五葉相承,其道彌尊,不令斷絕,格於天鑒,元學咸宗,殊見所生,信衣斯止。是故曹溪為祖,法水長流,波□滔天浩浩,猶魯公之政,先奉文王、康叔之風,以尊周室。則知當仁秀出者唯二,曰讓曰思,實繁有徒,蕃衍無極。承其讓者大寂,嗣其思者石頭,石頭傳於藥山,藥山傳於雲巖,雲巖傳於洞山,洞山傳於雲居,雲居傳於大師,傳法繼明,煥乎本籍。且曰:大師法諱利嚴,俗姓金氏,其先雞林人也。考其國史,實星漢之苗。遠祖世道凌夷,斯盧多難,偶隨萍梗,流落熊川。父章,深愛雲泉,因寓城之野,故大師生於◆泰。相表多奇,所以竹馬之年,終無(缺)年十二,往迦邪岬寺,投德良法師,懇露所懷,求為師事。自此半年之內,三藏備探。師謂曰:「儒室之顏生,釋門之歡喜,是知後生可畏,於子驗之者矣。」則非久植宿因,其孰能至於此。然則母氏初於有娠,夢神僧來寄青蓮,永為徵信,則知絕塵合契,懷曰同符。中和六年,受具足戒於寺道堅律師。既而油鉢無傾,浮囊不漏,桑門記位,不唯守夏之勤:草系懸心,寧止終年之懇。
其後情深問道,志在觀□,結瓶下山,飛錫沿海。乾寧三年,忽過入浙。後崔藝熙大夫方將西泛,?跡而西,所以高懸雲帆,遽超雪浪。不銷數日,得抵鄞江。於時企聞雲居道膺大師,禪門之法胤也,不遠千里,直詣元關。大師謂曰:「曾別匪遙,再逢何早?」師對雲:「未曾親侍,寧導復來?」大師默而許之,潛愜元契。所以服勤六載,寒苦彌堅。大師謂曰:「道不遠人,人能宏道,東山之旨,不在他人,法之中興,唯我與汝。吾道東矣,念茲在茲。」師不勞圯上之期,潛受法王之印,以後嶺南河北,巡禮其六?堵波;湖外江西,遍參其諸善知識。遂乃北游恆岱,無處不游;南抵衡廬,無山不抵。謁諸侯而獻刺,投列國以觀風,四遠參尋,遍宜捨筏,珍重屏翳,逦迤東征。爰有金海府知軍府事蘇公律熙,選勝光山,仍修堂宇,傾誠願海,請住煙霞。桃李無言,稻麻成列,一棲真境,四換周星。大師雖心愛禪林,遁世無悶,而地連賊窟,圖身莫安,所以亂邦不居,於是乎在。十二年,途出沙火,得至遵岑,永同郡南,靈覺山北,尋謀駐足,乍此踟躕,緇素聞風歸心者眾矣。
今上聞大師道高天下,聲蓋海東,想對龍頤,頻飛鶴版。大師謂眾曰:「居於率土者,敢抿綸音;傥遂朝天者,須沾顧問。付囑之故,吾將赴都。」所以便逐皇□,來儀帝壤。上重光大業,仰止高山,所以修葺泰興,請停慈蓋。粵以明年二月中,特遣前侍中權說太相朴守文迎入舍那內院,虔請信住持。無何,迥飭蕊宮,高敷蓮座,待以師資之禮,恭披鑽仰之儀。猶如西域摩騰,先陟漢皇之殿;康居僧會,始升吳主之車。遂以麈尾發揮,龍顏欣悅,其於瞻仰,偏動宸襟。此時魚水增歡,不可同年而語哉!他時乘閒之夕,略詣祥扉問曰:「弟子恭對慈顏,直申素懇。今則國仇稍擾,鄰敵交侵,猶似楚漢相持,雄雌未決,至於三紀,常備二凶,雖切好生,漸深相殺,寡人曾蒙佛誡,暗發慈心,恐遺玩寇之愆,仍致危身之禍。大師不辭萬里,來化三韓,救?昆岡,昌言有待。」對曰:「夫道在心不在事,法由己不由人。且帝王與匹夫,所修各異,雖行軍旅,且ê黎元。何則?王者以四海為家,萬民為子,不殺無辜之輩,焉論有罪之徒。所以諸善奉行,是為宏濟。」上乃撫機歎曰:「夫俗人迷於遠理,預懼閻摩,至如大師所言,可與言天人之際矣。所以救其死罪,時緩虔劉,憐我生靈,出於塗炭,此則大師之化也。」
其後大師自棲京輦,頻改歲時,每以注目山川,欲擇終焉之地。隱霧之志懇到,聞□天上,上莫阻道情,潛憂生別,思惟良久,久乃許焉。大師臨別之間,特披悲感雲:「仁王宏誓,護法為心,遙垂外護之恩,永蓄蒼生之福。」所以長興三年,下教於開京西北海州之陽,遽擇靈峰,為構精舍,寺名廣照,請以居之。是日大師略領門徒,就棲院宇,學流盈室,禪客滿堂,若融歸北海之居,疑惠結東林之社。所以誨人不倦,如鏡忘疲,其眾如麻,其門如市。然則不資分衛,唯免在陳,此乃官莊則分錫三莊,供事則具頒四事。況復近從當郡,傍及鄰州,咸發深心,並修淨行。則知花惟エ卜,如投寶樹之園;林是ヤ檀,似赴庵蘿之會。大師先來於踏地,備自餘山,師至魂交,神來頂謁,獻粲輸玉泉之供,披誠指廬阜之居,其為神理歸依,皆如此類。
옛적에 육신보살 혜가(惠可) 선사는, 늘 노승이 천축(天竺)에서 오신 우리 스승 달마대사(達摩大師)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총지(總持)의 숲과 같고, 불이(不二)의 강과 늪과 같았다. 이에 조법(祖法)을 멀리 양(梁)나라로 가져갔으며, 다시 위(魏)나라로 유람하여 설법하였고, 숭산(嵩山)을 찾아갔으나 아무에게나 법을 전하지 않았다.
처음 대굉(大宏)을 만나 마음을 교감하고, 의발(衣鉢)을 전하여 신표로 삼았으니, 마치 우담바라(優曇鉢花)가 한 번 피는 것과 같았다. 이후 다섯 대(代)에 걸쳐 법이 전해지면서 더욱 존귀해졌고, 결코 단절되지 않았다. 하늘이 이를 감찰하였으며, 원대한 학문을 가진 자들이 모두 그를 종주(宗主)로 삼았다.
신의 의발이 그곳에서 멈춘 것이 확실하였으니, 이로 인해 조계(曹溪)가 조사가 되어 법수(法水)가 길이 흘러, 파도가 하늘까지 넘치는 듯하였다. 이는 마치 노나라 공(魯公)이 정사를 펼치고, 먼저 문왕(文王)과 강숙(康叔)의 풍습을 받들어 주나라를 존숭했던 것과 같았다.
이를 보면, 인(仁)을 실천하여 뛰어난 이는 오직 둘이었으니, 하나는 양(讓)이고 다른 하나는 사(思)였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매우 번성하여 끝이 없었다. 양을 계승한 이는 대적(大寂)이며, 사를 이은 이는 석두(石頭)였다. 석두는 약산(藥山)으로 전하고, 약산은 운암(雲岩)으로 전했으며, 운암은 동산(洞山)으로 전하고, 동산은 운거(雲居)로 전했다. 운거는 다시 대사(大師)에게 전하여 법을 계승하고 밝게 빛나게 하였다.
대사의 법휘(法諱)는 이엄(利嚴)이었으며, 속성은 김씨(金氏)였다. 그 선조는 계림(雞林) 사람이었다. 나라의 역사서를 살펴보면, 실로 별과 같이 찬란한 가문이었다. 먼 조상이 세도가 쇠퇴하고, 시련을 겪었으며, 마치 떠다니는 부평초처럼 흘러다니다가 웅천(熊川)에 정착하였다.
그의 아버지 장(章)은 구름과 샘을 사랑하여, 성읍의 변두리에 거처를 정하였고, 대사는 태(泰)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모는 비범한 기운이 있었으며, 어릴 때부터 기이한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죽마(竹馬)를 타던 어린 시절에도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가야갑사(迦邪岬寺)로 가서 덕량법사(德良法師)에게 귀의하였다. 그는 자신의 뜻을 간절히 밝히며 스승으로 삼기를 청하였고, 반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삼장(三藏)을 두루 탐구하였다. 스승은 그를 보고 말하였다.
"유가(儒家)의 안연(顏淵)과 같고, 불문(佛門)의 환희(歡喜)와 같구나. 후생(後生)을 두려워할 만하니, 너에게서 그 증험을 보았다."
이는 그가 오래도록 선근(善根)을 닦아 온 자가 아니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그의 어머니는 대사를 잉태했을 때, 신령한 스님이 와서 푸른 연꽃을 맡겨 영원히 증표로 삼겠다는 꿈을 꾸었다. 이는 곧 속세를 초월한 인연이 있음을 의미하였다.
중화(中和) 6년(884년)에 그는 도견율사(道堅律師)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후 기름이 쏟아지지 않고, 물이 새지 않는 가죽주머니처럼 수행에 정진하여, 하안거(夏安居)와 계율을 철저히 지켰다. 그는 오로지 수행에 몰두하며, 일 년 내내 간절한 마음으로 수행하였다.
그 후 그는 도를 묻는 데 더욱 뜻을 두었으며, 관찰(觀察)의 경지를 탐구하고자 병을 매고 산을 내려왔다. 乾寧(건녕) 3년(896년), 그는 절강(浙江) 지역을 지나게 되었다. 때마침 최예희(崔藝熙) 대부가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그를 따라 서쪽으로 갔다. 그는 구름 돛을 높이 걸고, 흰 파도를 넘어 며칠 만에 인강(鄞江)에 도착하였다. 당시 그는 운거(雲居) 도응(道膺) 대사가 선문(禪門)의 정통 계승자라는 소문을 듣고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곧장 그를 찾아갔다.
운거 대사는 그를 보고 말하였다.
"예전에 헤어진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다시 만남이 어찌 이리 빠른가?"
대사는 대답하였다.
"한 번도 친히 뵌 적이 없는데, 어찌 다시 왔다고 하겠습니까?"
대사는 묵묵히 그를 인정하며, 깊은 깨달음을 함께 나누었다. 그는 6년 동안 스승을 모시고 수행하며, 어떤 추위와 고난도 견뎌냈다.
운거 대사는 그에게 말하였다.
"도는 사람과 멀리 있지 않다. 사람이 도를 크게 하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동산(洞山)의 뜻은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으며, 법을 중흥시킬 자는 오직 너와 나뿐이다. 내 법이 동쪽으로 갈 것이니, 이를 잘 간직하라."
그는 따로 다리를 놓아 만나야 할 기약이 필요 없었다. 곧 법왕(法王)의 인가를 받고, 이후 남북으로 순례하며 불법을 널리 전파하였다.
大師謂眾曰:「今歲法緣當盡,□徑他方。吾與大王曩有因緣,今當際會,須為面訣,以副心期。」便挈山裝,旅臻輦下。此時上暫驅龍旆,問罪馬津,大師病甚,虛羸任特,不得詣螭頭留語,入雞足有期。豈惟昔在竺乾,迦葉別?王之憾;曾於華夏,伯陽辭關令之嗟而已矣哉!明日肩輿到五龍山,頤使招諸弟子雲:「佛有嚴誡,汝曹勉旃!」清泰三年八月十七中夜,順化於當寺法堂,俗年六十有七,僧臘四十有八。於時日慘風悲,雲愁水咽,門下僧等不勝感慕,俱切攀號。以其月二十日,奉遷神座於本山□千寺之西嶺,去寺三百□,雅奉遺教也。士庶闐川,香華溢谷,送終之盛,前古所無者矣。上乃旋在省方,忽聞遷化,爰切折梁之慟,亦增亡鏡之悲。自此特命親官,遙申弔祭。
대사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올해로 나의 법연(法緣)이 다하고, 곧 다른 세계로 떠나게 될 것이다. 나는 일찍이 대왕(국왕)과 인연이 있었으니, 이제 다시 만나게 되어 반드시 얼굴을 맞대고 작별을 고하여야 한다. 이것이 내 마음에 합당한 일이다."라고 하셨다.
이에 산사의 짐을 챙겨 수도(輦下)로 향하는 여행길에 올랐다. 마침 그때 임금께서 용기를 내어 군대를 출동시키고 마진(馬津)에서 적을 치려 하셨다. 그러나 대사께서는 병환이 위중하여 기력이 쇠약하였으므로, 직접 가서 말을 전하지 못하셨다. 다만 자신이 머지않아 ‘계족산(雞足山, 부처가 입멸한 곳)’에 들 것임을 예견하셨다.
이것은 마치 옛날 인도에서 가섭(迦葉) 존자가 부처님의 열반을 애통해한 일이나, 중국에서 노자(老子)가 관령(關令)에게 작별을 고한 것과 같은 슬픈 일이었다.
이튿날 가마에 실려 오룡산(五龍山)에 이르렀다. 그는 제자들을 불러 마지막으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엄하게 경계하신 바가 있으니, 너희는 부디 힘써 정진하라!"라고 하셨다.
청태(清泰) 3년(936년) 8월 17일 밤, 대사께서는 광조사(廣照寺)의 법당에서 열반에 드셨다. 세속의 나이로는 67세, 승려로서의 세월은 48년이었다.
그때 하늘은 음침하고 바람은 슬퍼하듯 불었으며, 구름은 침울하고 강물조차 흐느끼는 듯하였다. 문하의 제자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하며 스승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같은 달 20일, 대사의 신위를 본산(本山)의 천사(千寺) 서쪽 산봉우리로 옮겨 모셨다. 이는 스승의 유훈을 받들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백성과 귀족들이 강을 가득 메웠으며, 향과 꽃이 계곡을 가득 채울 만큼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으니, 이는 예로부터 볼 수 없었던 장관이었다.
그때 국왕께서는 지방을 순행 중이셨는데, 갑작스러운 대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크게 애통해하며, 마치 무너진 들보를 바라보는 듯한 슬픔에 빠지셨다. 마치 거울을 잃은 듯한 상실감에 깊은 탄식을 하셨다.
이에 특별히 신하를 보내어 먼 곳에서나마 조문을 올리게 하셨다.
大师风神天假,智惠日新,生知而众妙会心,宿植而元机藏粹。所以事惟善诱,谭以微言,引彼蒙泉,归於性海。其奈山辉川媚,秀气难逃,故始自光山,终於□岭。可谓栖迟两地,各分韫匮之珍;戾止三河,俱示摩尼之宝者矣。传业弟子处光、道忍、贞フ、庆崇,并升上足,皆保传心,或早牵尼父之悲,或坚护卜商之业。所憾宝塔虽耸,洪铭未刊,然则扣不朽之缘,於在家弟子,左丞相皇甫悌恭、前王子太相王儒、前侍中太相李陟良、广评侍郎郑承休,俱早调夏鼎,常舣殷舟,诚仁国之金汤,亦法城之墙堑。与昭元大统教训断金相应,深感法恩,请赠大名,以光禅教。诏曰可,故追谥真澈大师,塔名宝月乘空之塔,申命下臣,式扬高躅。彦?才惭燕石,学谢萤光,以有限微才,记无为景行,杳犹行海,难甚缘山,潜测高深,莫知涯际。爰有门徒元照上人夙传口,亲奉玉音,因趣龟文,数临蜗舍。所以得於无得,闻所未闻,譬凉月之游空,如猛风之扫霭,唯以敷陈厚旨,齐赞成功。所冀翠碣披文,感国主亡师之憾;丰碑相质,嗟门人绝学之愁。言莫慎诸,直书其事。
铭曰: 禅宗之元,代代堂堂。人中师子,世上法王。元关阃阈,觉路津梁。远从天竺,来化海邦。伟矣吾师,生於辽左。何陋之有,岂论夷夏。冰姿雪肤,言说温雅。乘查兮雪浪中,问道兮云居下。命之入室,仍以传心。栖迟道树,偃仰祥林。□津近棹,忽遇知音。便升金殿,钦仰殊深。卜地海?Й,曹溪接武。唯我导师,谓之慈父。忽叹泥洹,天收法雨。赠谥兮感法恩,流慈兮光禅宇。清泰四年十月二十日立。
大師風神天假,智惠日新,生知而眾妙會心,宿植而元機藏粹。所以事惟善誘,譚以微言,引彼蒙泉,歸於性海。其奈山輝川媚,秀氣難逃,故始自光山,終於□嶺。可謂棲遲兩地,各分韞匱之珍;戾止三河,俱示摩尼之寶者矣。
傳業弟子處光、道忍、貞フ、慶崇,並升上足,皆保傳心,或早牽尼父之悲,或堅護卜商之業。所憾寶塔雖聳,洪銘未刊,然則扣不朽之緣,於在家弟子,左丞相皇甫悌恭、前王子太相王儒、前侍中太相李陟良、廣評侍郎鄭承休,俱早調夏鼎,常舣殷舟,誠仁國之金湯,亦法城之牆塹。與昭元大統教訓斷金相應,深感法恩,請贈大名,以光禪教。詔曰可,故追謚真澈大師,塔名寶月乘空之塔,申命下臣,式揚高躅。
彥?才慚燕石,學謝螢光,以有限微才,記無為景行,杳猶行海,難甚緣山,潛測高深,莫知涯際。爰有門徒元照上人夙傳口,親奉玉音,因趣龜文,數臨蝸舍。所以得於無得,聞所未聞,譬涼月之游空,如猛風之掃靄,唯以敷陳厚旨,齊贊成功。所冀翠碣披文,感國主亡師之憾;豐碑相質,嗟門人絕學之愁。言莫慎諸,直書其事。
銘曰:
禪宗之元,代代堂堂。
人中師子,世上法王。
元關閫閾,覺路津樑。
遠從天竺,來化海邦。
偉矣吾師,生於遼左。
何陋之有,豈論夷夏。
冰姿雪膚,言說溫雅。
乘查兮雪浪中,問道兮雲居下。
命之入室,仍以傳心。
棲遲道樹,偃仰祥林。
□津近棹,忽遇知音。
便升金殿,欽仰殊深。
卜地海?Й,曹溪接武。
唯我導師,謂之慈父。
忽嘆泥洹,天收法雨。
贈謚兮感法恩,流慈兮光禪宇。
清泰四年十月二十日立。
대사(大師)의 업적과 기림
대사(大師)의 풍채와 기운은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고, 그의 지혜는 날로 새로워졌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이치를 깨달아 깊이 통찰하였으며, 오랜 수행을 통해 본질적인 지혜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오로지 올바른 인도로 사람들을 깨우치며, 정밀한 가르침으로 무지한 자들을 이끌어 그들을 본래의 성품의 바다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빼어난 산과 아름다운 강의 기운이 그를 떠나지 못했기에, 처음에는 광산(光山)에서 수행을 시작하였고, 마침내 □령(嶺)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는 그가 두 곳에서 머물며 각기 귀중한 보배를 남겼음을 의미하며, 세 곳을 거쳐 머물며 마치 마니보석(摩尼寶)과 같은 법을 세상에 전한 것과 같다.
법을 전수한 제자들
대사의 법을 전수받은 제자들은 처광(處光), 도인(道忍), 정フ(貞フ), 경숭(慶崇) 등으로, 모두 높은 경지에 올라 마음의 법을 계승하였다. 어떤 이는 공자의 슬픔을 일찍이 경험하였으며, 어떤 이는 법을 굳건히 지켜 상서로운 가르침을 이어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사의 사리를 모신 탑은 높이 세워졌으나, 그를 기리는 명문(銘文)이 새겨지지 않았다. 이에 불멸의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인연이 이어졌으며, 세속에서 그를 흠모하던 제자들인 좌승상(左丞相) 황보제공(皇甫悌恭), 전 왕자 태상(太相) 왕유(王儒), 전 시중 태상(太相) 이척량(李陟良), 광평 시랑(廣評侍郎) 정승휴(鄭承休) 등이 나서서 대사의 업적을 기리기로 하였다.
이들은 모두 조정의 중심에서 국정을 운영하던 인물들이었으며, 나라를 굳건히 지키는 요새이자 불법을 보호하는 성벽과 같았다. 또한 대통(大統)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법의 은혜를 깊이 새기고 있었다. 이에 그들은 대사의 법맥을 빛내고자 그의 이름을 높이 올릴 것을 요청하였다.
황제께서 이를 허락하시며, 대사를 ‘진철(眞澈) 대사’라는 시호(諡號)로 추증하고, 그의 사리를 모신 탑을 ‘보월승공지탑(寶月乘空之塔)’이라 명명하였다. 또한 신하들에게 이를 널리 알릴 것을 명하셨다.
기리는 글
비록 내 학문과 재능이 미약하여 깊은 이치를 완벽히 서술하지 못하지만, 작은 노력이나마 기울여 그 가르침을 기록하고자 한다. 마치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처럼, 혹은 높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그의 깊은 가르침을 다 헤아리기란 어렵다.
이에 문도(門徒) 원조(元照) 상인이 예전부터 대사의 법맥을 계승하고 있었으며, 황제의 친서를 받들어 탑문(塔文)을 새길 것을 권하였다. 그는 거북의 무늬 같은 깊은 경전을 연구하고, 작은 집에서 조용히 글을 연마하면서도 깊은 뜻을 탐구하였다.
그리하여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고, 들어보지 못한 것을 듣게 되었다. 이는 마치 맑은 달이 허공을 유영하는 것과 같고, 거센 바람이 구름을 걷어내는 것과 같았다. 오직 대사의 깊은 가르침을 펼쳐 찬미하며 그 공덕을 기리고자 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비문(碑文)을 새긴다.
명(銘)
선종(禪宗)의 근본, 대대로 이어졌고,
사람들 속에서 사자처럼, 세상에서 법왕(法王)이셨다.
진리를 깨닫는 문턱에서, 길을 밝혀주는 등불과 같았으며,
멀리 천축(天竺)에서 와서, 해동(海東)에 불법을 전파하셨다.
위대하신 나의 스승이시여, 요동(遼東)에서 태어나셨도다.
어찌 변방이라 하여 천하게 여기겠는가, 어찌 오랑캐와 중원을 나누겠는가?
얼음처럼 맑은 기품, 눈처럼 깨끗한 피부,
말씀은 부드럽고 온화하셨다.
눈 덮인 파도를 타고 오셨고,
운거(雲居) 아래에서 도를 구하셨다.
부름을 받아 방으로 들게 되었고,
마침내 법맥을 이어받으셨다.
도를 이루어 길게 머물렀고,
길상(吉祥)한 숲에서 편안히 계셨다.
길을 건너 배를 타고,
문득 뜻을 통하는 이(知音)를 만났다.
이에 황금 궁전에 오르시어,
왕이 경외하며 흠모하였도다.
법을 펼 곳을 가늠하셨고,
조계산(曹溪)의 법맥을 이으셨다.
오직 우리 스승께서,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으시도다.
그러나 갑자기 열반에 드시니,
하늘도 법우(法雨)를 거두어 가셨구나.
추증하여 시호를 내리니,
법의 은혜를 기리며 감격하노라.
그 자비가 흘러가,
선문의 세계를 환히 비추는구나.
청태(清泰) 4년(937년) 10월 20일에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