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8
루롱 카운티 지리, 제1권 - 루롱 카운티 가제티어 보충 전문 - 고전

補盧龍縣志卷之一高密李士模采輯太行衛立鼎續補世紀。
夫志,一方之史也,不論世,其何以徵焉?今盧龍非古盧龍之地,仍古盧龍之名也。
《노룡현지(盧龍縣志)》 권1
고밀(高密) 사람 이사모(李士模)가 자료를 채집하고, 태행위(太行衛) 사람 입정(立鼎)이 이어서 보완하였다.
세기(世紀)
무릇 지방지(地方志)란 한 지방의 역사이다. 시대의 변천을 논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노룡(盧龍)은 옛날 노룡의 땅은 아니지만, 옛 노룡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李滄溟云:盧者,黑也,龍者,水也。北人謂黑水爲盧龍,故昔或名此地爲盧龍軍,或名爲盧龍塞,以其城廓鄰于漆河之義也。前明初洪武四年,改平灤路爲永平府,以盧龍縣爲附廓焉。國朝仍之。
이창명(李滄溟)이 말하기를,
“노(盧)는 검다는 뜻이고, 용(龍)은 물이라는 뜻이다. 북방 사람들은 검은 물을 노룡이라 부른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이 지역을 노룡군(盧龍軍) 이라고도 하고, 노룡새(盧龍塞) 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성곽이 칠하(漆河)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주석:漆 옻 칠, 삼갈 철, 일곱 칠, 일곱 칠 1. 옻 2. 삼가다 3. 전심(專心)하다 4. 옻칠하다 5. 검은 칠
/ 漆板칠판 -->분필로 글씨를 쓸 수 있도록 검은 칠 등을 하여 만든 널조각
/강 이름 漆水 칠수)
명나라 초 홍무(洪武) 4년(1371)에 평란로(平灤路)를 영평부(永平府)로 개칭하고, 노룡현을 그 부의 부곽현(附郭縣, 부 치소가 있는 현)으로 삼았다.
청나라에서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
古所謂孤竹、營州、肥如、平州,俱此盧龍之地,歷代名稱,各有異焉。今奉文修補盧志,因增世紀以冠其首,並載古今之沿革,以備參考焉。
옛날에 이 지역은 고죽(孤竹), 영주(營州), 비여(肥如), 평주(平州) 등으로 불렸는데, 모두 현재의 노룡 지역에 해당한다.
다만 역대에 따라 명칭이 각각 달랐다.
이제 조정의 명을 받아 《노룡현지》를 수정·보완하면서, 이에 세기(世紀)를 덧붙여 책의 첫머리에 두고,
아울러 고금의 연혁을 기록하여 참고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大清順治元年秋九月,世祖皇帝入關,經永平,駐蹕城外,文武官朝免如儀,賞賫有差。康熙六年丁未,永平知府李興元重修郡譙樓。七年秋九月,皇上幸遷安縣,駐蹕於縣南,文武各官朝服迎至駐蹕處所,免朝。次曰,由清節祠東龐家崖渡灤河,駐蹕於灤河之西,免朝。次早,沿灤水而南,至灤州南五里巖山橋駐蹕,文武官朝服朝見。次早西行,文武官朝服跪送。八年己酉秋七月,永平□奉文移駐通州,更爲通永道。九年庚戌冬十一月,皇上幸三屯,駐蹕東寨。文武官朝見,命武臣自副𭔬以下至七品以上,俱較射,賜宴,賜題,面試。知府蔡興周,命大學士哲那庫評閲其文,命題:知之爲知之,不知爲不知,是知也。次日,行幸永平,皇上由北門入,自西門出,文武官前導,至御營,免朝,仍駐蹕於欒河之西。
대청(大淸) 순치(順治) 원년(1644) 가을 9월, 순치제가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온 뒤 영평(永平)을 지나게 되었다. 황제는 성 밖에 행궁을 설치하고 머물렀으며, 문무백관들은 예에 따라 조회를 올렸다. 황제는 관리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강희(康熙) 6년 정미년(1667), 영평부 지부 이흥원(李興元)이 영평부의 초루(譙樓, 성루)를 중수하였다.
강희 7년(1668) 가을 9월, 강희제가 천안현(遷安縣)에 행차하여 현 남쪽에 머물렀다. 문무관원들은 조복을 입고 행재소(行在所)까지 나아가 영접하였으며, 이날 조회는 면제되었다.
다음 날 황제는 청절사(清節祠) 동쪽의 방가애(龐家崖) 나루에서 난하(灤河)를 건너 강 서쪽에 머물렀고, 역시 조회를 면제하였다.
그 다음 날 아침에는 난하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난주(灤州) 남쪽 5리 지점의 암산교(巖山橋)에 머물렀다. 문무관원들은 조복을 입고 알현하였다.
다음 날 아침 서쪽으로 길을 떠나자 문무관원들은 조복을 입고 꿇어앉아 전송하였다.
강희 8년 기유년(1669) 가을 7월, 영평의 ○○도(원문 결락)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 치소를 통주(通州)로 옮기고, 명칭도 통영도(通永道)로 바꾸었다.
강희 9년 경술년(1670) 겨울 11월, 강희제가 삼둔(三屯)에 행차하여 동채(東寨)에 머물렀다.
문무관원들이 조회를 올리자 황제는 부장(副將) 이하 7품 이상 무관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실시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연회를 베풀고 시제(試題)를 내려 직접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
영평부 지부 채흥주(蔡興周)도 시험을 보았는데, 황제는 대학사 철나고(哲那庫)에게 그 글을 채점하게 하였다.
시험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참된 앎이다.”
(知之爲知之,不知爲不知,是知也)
다음 날 황제는 영평으로 행차하였다. 북문으로 들어와 서문으로 나갔으며, 문무관원들이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다. 황제는 어영(御營)에 이르러 조회를 면제하고, 다시 난하 서쪽에 머물렀다.
지명 설명
- 영평 : 현재 중국 허베이성 동북부의 옛 행정 중심지.
- 난하 : 옛날 영평부 지역을 흐르던 큰 강.
- 노룡 : 영평부에 속했던 현.
- 천안 : 영평 서북쪽의 중요한 현.
- 난주 : 난하 연안의 주요 도시.
이 기록은 강희제가 동북 변경 지역을 순행하면서 영평·노룡·천안·난주 일대를 방문한 과정을 연대순으로 적어 놓은 기사입니다. 당시 난하 유역이 청나라 황실의 중요한 순행 경로였음을 보여줍니다.
皇上東幸謁陵,駐蹕於灤河之西。盧龍縣豫備橋梁、舟舫帳幔如儀。
皇上登舟觀魚,見橋梁堅固,各項豫備有方,嘉悦,賞銀貳拾兩。
召見盧龍縣知縣魏師叚,面詢愛民之實,又問其籍貫,奏對稱㫖。次曰,由西門入,自東門出,東幸。
冬十月,謁陵旋,文武官跪迎。
皇上由北門入,西門出。
上諭隨駕官命民人環路跪看,不許進本告狀。
仍駐蹕於欒河之西。文武官吉服朝見,灤河獻魚,賞銀拾兩。次日旋京。
황제께서 동쪽으로 행차하여 능(陵)에 참배하러 가시면서 난하(灤河) 서쪽에 머무셨다.
노룡현(盧龍縣)에서는 규정에 따라 미리 다리와 배, 장막 등을 준비하였다.
황제께서 배에 올라 물고기를 구경하시다가 다리가 견고하게 설치되어 있고 여러 준비가 적절하게 이루어진 것을 보시고 매우 흡족해하셨다. 이에 은 20냥을 하사하였다.
또 노룡현 지현(知縣) 위사단(魏師叚)을 불러 알현하게 하시고, 백성을 사랑하는 실제 정사에 대하여 직접 물으셨다. 이어 그의 본적을 물으셨는데, 위사단의 대답이 황제의 뜻에 맞아 칭찬을 받았다.
다음 날 황제는 서문으로 들어와 동문으로 나가 동쪽으로 계속 행차하였다.
겨울 10월, 능 참배를 마치고 환궁하는 길에 문무관들이 꿇어앉아 황제를 맞이하였다.
황제는 북문으로 들어와 서문으로 나갔다.
황제는 수행 관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백성들이 길가에 둘러서서 꿇어앉아 구경하는 것은 허락하되, 상소를 올리거나 송사를 제기하는 것은 허락하지 말라."
황제는 다시 난하 서쪽에 머물렀다.
문무관들은 길복(吉服, 경사스러운 예복)을 입고 조회하였다.
난하에서는 황제에게 물고기를 진상하였고, 황제는 은 10냥을 하사하였다.
그 다음 날 황제는 북경으로 돌아갔다.
이 기록은 강희제가 동릉(東陵) 참배를 위해 지나가던 길에 노룡현에 머물렀을 때의 일화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노룡현이 난하에 임시 부교(浮橋)와 선박을 잘 준비한 점을 칭찬받아 은 20냥을 포상받았고, 지현 위사단이 직접 황제의 면담을 받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때 황제가 난하에서 배를 타고 물고기를 구경했다는 비교적 드문 생활상이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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