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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벽공무한(1-2)

 

벽공무한(1-2)는 벽공무한(1)을 2개로 나눈 것중 2번 째이다.

 

 

남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오도깝스럽게 흔들면서,
 "이 선생두 망발이시지 내가 그걸 모았다면 벌써 발을 뺏을 것이지 지금까지 두 이 노릇을 하면서 이렇게 천덕구니같이 돌아다니겠습니까 ── 아니 그 십 분지 일을 얻었대두 팔자 고치구 편안히 누웠겠습니다. 원 망령을 부리셔도 당치않게 ──"앓는 시늉을 하기는 해도 능걸치게 데설데설 웃는 품이 역시 만족스런 태도 였다.


 엄지손가락은 백만 원이라는 뜻이었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것으로서 피차에 충분히 통용되는 일종의 부호였다. 

호담스런 숫자의 대명사였다. 그 십 분지 일이란 십만 원이란 뜻이다. 아마 엄지손가락 하나는 못되어도 거의 가까운 치부를 했음직한 남구의 태도였다. 장안에서도 브로커로는 으뜸 가는 수완가였던 것이다.


 "원저 위태스런 업이래서 옳게 맞으면 좋으려니와 빗나가는 때가 십중팔구 거든요. 속 죄여서 못해 먹겠어요. 

사실 쉬이 발을 빼야 할텐데."


 "당신만 당신이구 ──"별안간 벽력 같은 호통에 좌중은 뜨끔하면서 말과 귀를 잃어버렸다. 그때까지 잠자코만 있던 만해가 화를 못 이겨 고래 같은 고함을 친 것이다. 시뻘겋게 상기된 그의 얼굴을 세 사람은 바라볼 염도 못했다.


 "── 내 일은 어떻게 해줄 작정이오."
 만해의 고함소리로 좌중은 침묵하면서 그 침묵 속에서 각각 그날 밤 모임의 뜻을 깨닫고 반성하는 것이었다.
 특히 박남구는 몸이 화끈 달고 신경이 곧추서면서 정신이 들었다.
 물론 그때까지 그날 밤의 만해들의 심중을 살피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 별안간의 고함으로 말미암아 한층 긴장되고 정신이 뜨인 것이 사실이다.


 일신상의 사정만에 열중되어 있었던 것을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면서 만해의 그 분기에 넘치는 목소리로 마음의 고삐를 잡아 세우고 잔뜩 경계하기 시작 하였다.
 "내 내 일은 어떻게 하겠단 말요."


 만해가 흥분을 못 이겨 재차 설레는 것을 보고 이 동렬은,
 "사장, 그렇게 흥분하실 것이 아니라 찬찬히 서로 이야기나 건너 보십시다. 자리가 요란하다구 될 일이 아니니 될 수 있는 대로 침착하셔서 ──""침착하다구 다 판이 난 일이 되돌려 설까. 어 어떻게 한단 말야, 내 일은 대체."
 "무슨 일로 그렇게 노여 하시는지 말씀을 들려주시면, 내겐 당한 일이라  면…… "남구가 시침을 떼고 까딱 냄새도 모르는 척 얼굴을 팽팽히 쳐 드니,
 "무슨 일이라니, 남의 창을 빼놓구두 당신 한 일을 모른단 말요. 세상 에두 무서운 ──"만해의 입에서 무슨 폭언이 나올지를 몰라 이동렬이 재빠르게 그의 말을가로 채서,
 "도모지 요새 일이 뜻대로 안 되는군요. 특히 광산 일이 작금 아주 성적이 좋지 못해서 걱정되는 판이예요."
 근심의 얼굴을 지으니까 남구는,
 "참, 산 일은 요새 어떠신지."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올똥한 표정을 보인다.
 "실패예요, 천만의외죠."
 "실패라뇨, 그럴 리가…… ""광맥이 끊어지구 얼마 안가 폐광이 된답니다."
 "그럴 리가…… ""시침을 떼두 유분수지."
 만해는 견디지 못해 다시 소리를 치면서,
 "── 당신의 조짜로 난 지금 파멸이요. 시침을 떼일 때가 아니요. 어서 산을 물러 받든 어쩌든지 하란 말요."
 "아니, 다따가 무슨 소릴 하슈."
 남구도 그제서야 정색하면서 만해를 맞바라보며 소리에 뼈가 섰다.
 "── 내게는 금시초문인데 폐광이니 파멸이니 하면서 나더러 어쩌란 말요. 공연히 욕을 주자는 거요, 위협을 하자는 거지. 대체 무어란 말요."
 "산을 도로 물러가지란 말요. 폐광이나 진배없는 걸 갖다가 백만 원에 매도한 게 그게 사기가 아니구 뭐요. 백만 원에 도로 물러가지란 말요. 그 알량한 광산을 도로 찾아가란 말요."
 "사기니 뭐니 하구 왜 그렇게 야속하게 말씀하시오. 몇 달 전 매매가 성립 됐을 때의 화목하던 정경은 어디 가구 지금 이 노여운 말씀이오 ── 낸 들 산속 일을 어찌 알겠으며 그게 원래 내 산이었습니까. 중간매매가 내 업이라 남에게서 사서 다시 사장께 팔았달 뿐이지. 산속의 조화와 결과를 내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었으나 물론 만해의 귀에 솔곳이 들릴 리는 없었다.
 "어찌 됐든 간에 당신에게서 그걸 샀던 까닭에 난 파멸이란 말요. 이런 억울할 데가 세상에 또…… " "파멸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금광이 잘돼서 천만금을 얻게 됐더라면 그땐 내게 뭐랬겠수. 맞히구 못 맞히는 게 다 운이겠는데 이제 형세가 이롭지 못하다구 내게 이런 욕을 줄 법이야 있수. 내가 산속 일을 어찌 안다 말요. 차라리 내게 팔았던 그 사람을 족치려면 족쳐 볼일이지."
 "그래두 내 뜻을 모르겠수. 남은 지금 파산이요 파멸이라는데, 그런 소리 백 번 따져야 무슨 소용 있어. 자, 내게 악운을 홀짝 씌워 놓구 어떻게 하 잔말요. 말을 좀 들어봅시다."
 만해는 펄펄 뛸 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자네들은 잠깐 자리를 물려주게."
 만해의 목소리가 손바닥을 번긴 듯이 변한 것을 듣고 이동렬과 최성수는 문득 섬찟한 생각이 들면서,
 "어떻게 하실 작정으로 ──""내 혼자 따져볼 테니 잠깐들만 방을 나가 줘."
 "아예 흥분은 하지 마십시오. 나가긴 하겠습니다만."
 두 사람은 알 수 없이 걱정되는 바 있어 또 한번 이렇게 눌러 말하면서 자리를 일어섰다.
 하기는 자기들이 그 자리에서 더 필요한 것 같지는 않았다. 벌써 만해와 박 남구 단 두 사람만의 대항이 되어서 옆에서의 충고도 후원도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두 사람만의 숨은 말 거래도 있을 것이요, 자리를 물러서는 것이 마땅한 일이기는 하나 일맥의 걱정이 없지 않았다. 이미 흥분된 만해요, 점점 흥분되어 가는 박남구다. 두 사람 사이가 어떻게 빗나갈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오늘밤이 성한 밤은 아니야. 필연코 무에 일어나지."
 이동렬과 최성수는 방을 나와 복도에서 서성거리며 방안의 형세를 살피면서 수군거리다가 하릴없이 보이에게 분부해 가까운 곳에 비인 방 한간을 치우게 하고 술을 먹기로 했다.
 보이에게서 방을 치웠다는 소리를 듣고 그 방 앞으로 가까이 가다가 우연히 복도를 돌아오는 청매를 만났다. 맑게 단장한 초초한 저녁의 자태이다.
 두 사람을 보고 반기며 삽붓이 치맛자락을 헤친다. 애교를 머금은 인사인 것이다.
 "선약이 있었기 때문에 모시구 함께 놀아 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방끗 벌어지는 잇줄이 구슬같이 희다. 눈망울이 등불을 받아 물방울같이 빛난다.
 "청매가 와 주었더라면 사장의 속이 좀더 누그러졌을 것을 ── 오늘밤  대단히 중요한 자린데 지금 방안의 공기가 심상치 않거든."
 최성수가 일러주니까 청 매는,
 "박 남구가 왔다죠."
 보이에게서 들었던 대로를 말 하면서,
 "그럼 홍천금광 일론가요."
 하고 반문해본다.
 "금광이라는 게 성한 사람의 할 일은 아니야. 사람을 기쁘게 했다 노엽게 했다 하면서 꼭 미치광이의 짓이거든."
 청매도 광산의 형편을 약간 짐작하고 있는 까닭에 이동렬의 이런 감상은 그 의 앞에서 당치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 오늘밤 일이 잘 돼야겠는데요. 박남구는 어디 말이나 잘 들을 눈치 같아요."
 "어떤 위인이게 그렇게 나긋나긋 휘어들겠수. 우리들을 잠깐 물러서라는 품이 좀한 일 같지는 않어 ── 어서 들어갔다 나오구려. 둘이서 무엇 들을하고 있나."
 "그럼 잠깐 보고 나올까요."
 청매는 사뿐사뿐 복도를 걸어 만해들의 방으로 가까이 갔다.
 이동렬과 최성수는 새로 낸 방에 마주앉아 맥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조그만 탁자에 요리접시도 아무것도 없이 술병과 유리잔만을 올려 놓고 간단하고 설핀 자리였다. 경 없는 속에서 말도 없이 두어 잔씩들 기울인 때였다.
 급스럽게 장지가 열리며 다시 청매가 나타났다. 만해의 방에 들어간지 불과 몇 분이 안되어서 기급을 할 듯이 뛰어나온 것이다. 눈망울이 동그란 품이 적지 아니 놀란 표정이다.
 "큰일 났어요, 얼른들 가보세요."
 "왜 이리 설레우. 살인이나 난 것처럼."
 "살인이 날는지두 몰라요."
 그제서야 이동렬은 뜨끔해지면서,
 "살인이라니."
 자리를 일어선다.
 "문을 열구 들어서니까 으르구 앉은 것이 흡사 두 마리의 짐승 같건나요.
 사장 앞에 놓인 번쩍거리는 것을 뭔가 하구 살피니 칼이예요. 한 자루의 단도예요. 섬찟해지면서 인사두 못하구 뛰어나왔군요."
 "다 단도라니."
 이동렬과 최성수는 화닥 일어서 방을 나가는 것이었다.
 
 이동렬과 최성수가 뛰어나간 후 청매는 더욱 겁을 먹고 다시 만해의 방으로 갈 염도 못하고 자기의 맡은 좌석인 현대일보사 연회의 방으로 들어갔다.
 연회는 벌써 흥성한 고비에 들어 자리는 요란하고 상 위는 어지럽다.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혹은 앉고 혹은 일어서서 설레는 것이 장마당같이 수선스럽다. 술을 권하고 받느라고 정신들이 없이 휘뚱거린다.
 "청매."
 "웬 전화가 그렇게 잦어."
 "군것질만 댕기긴가."
 말들을 걸면서 손을 내미는 것을 살금살금 피해서 청매는 김종세의 곁으로 갔다.
 탁자 모퉁이에서 혼자 돌연히 잔을 들던 종세는 곁에 와 앉는 청매를 보더니,
 "어디 갔다 오는지 내 모를 줄 알구."
 천연스럽게 외이니 청 매는,
 "만해가 왔어요."
 대답한다느니 보다도 말하려고 준비나 하고 있었던 듯이 선선히 섬긴다.
 "브로커 박남구두 왔겠다."
 "큰일이 났어요."
 "금광에서 돈이 너무 많이 쏟아져서 걱정인가, 큰일은 무슨 큰일이야."
 "끔찍한 것을 보고 왔어요."
 "금덩이를 보고 왔나."
 "농만 하지 말구 ──"청 매는 요란한 자리도 피할 겸,
 "── 조용한 데루 좀 나오세요."
 일어서면서 종세의 어깨를 건드린다. 이상한 눈치에 종세도 뒤미처 자리를 일어서서 청매를 따라 복도로 나갔다.
 뜰로 향한 창을 열고 창닫이에 올라 앉으면서,
 "끔찍한 것이라니 대체 무어란 말요."
 "만해와 남구가 싸우는 것을 봤어요."
 "돼지끼리 싸우거나 말거나 무에 그리 신기해서."
 "단도를 내어 놓구 잔뜩 을르구들 있겠나요."
 "무어, 단도를 놓구."
 
 그제서야 종세는 귀가 뜨이며 반문하는 것이었다.
 "남구에게서 산 금광이 망조인 모양인가."
 신문기자로서의 직업의식이 동하며 바짝 구미가 돌았다. 남구의 사정은 물론 이미 잘 아는 바였으나 남구와의 결사적 대립이라는 점에 새로운 제목이 생기고 흥미가 솟았다.
 "만해는 광산을 도로 물르자거니 남구는 싫다거니 하면서 아마두 시비는 오랜 모양 같아요."
 "재미있는 얘기야. 남구가 물려줄 리도 만무하지만 만해두 어지간히 된 모양이지."
 "이 밤으로 꼭 변이 일어날 것만 같군요."
 "만해가 망조가 들었다. 혜성같이 나타나 거리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청년실업 가로선 생명이 너무나 짧은걸. 광산이 그의 전 생명인데 그게 글 렀다면 파산하는 수밖엔 없게."
 "어쩌면 좋은가요."
 청매의 조바심에 종세는 더욱 늦 조로,
 "청매의 후원자 한 사람 없어졌달 뿐이지 내게 아랑곳인가."
 "그러지 말구요."
 "너무 새가 자별하더라니 청매두 이 꼴을 당하려구 그런 셈이지. 만해만만해라 구 나 같은 건 국수의 고명밖엔 더 됐나. 차라리 잘됐지 그 꼴 더 보지 않게."
 "싫은 소린 그만두시구요."
 "그래 내 말 한 번이나 옳게 들어주구 말인가. 황금에만 눈이 팔려서 ── 박정한 인심 같으니."
 "투정은 작작 부리세요. 남의 속은 조금두 몰라주구 ""만해와 나와 어느편이 더 무거운지 맘속에 물어 보자 ── 황금이 더 무겁지 않은가구."
 "그만두시라니깐"
 문득 만해들의 방 쪽에서 요란한 고함이 터져 나왔던 까닭에 종세와 청 매는 말을 그치고 뜨끔해서 그편을 향했다.
 어쩔 줄을 모르고 우두커니 섰다가 두 사람은 드디어 만해들의 방 있는 편으로 복도를 달렸다.
 장지가 닫힌 방안에서는 한 사람의 고함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복작 거리는 소리가 한데 섞여서 요란하게 들렸다. 그 속에서 물론 만해와 남구의 목소  리가 가장 흥분된 것으로 두드러지게 컸다.
 종세와 청매는 장지를 버럭 열지 못하고 밖에서 잠시 형세를 살피는 것 이었으나 사람들의 흥분된 목소리는 뒤죽박죽 혼합되어서 옳게 두서를 가릴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누나."
 하는 것은 확실히 남구의 목소리임이 틀림없었고,
 "산을 물러가구 백만 원을 도루 내놓아라."
 하고 고집스럽게 되풀이하는 것은 물론 만해였던 것이다.
 두 사람 사이를 가르노라고 동렬과 성수가 수선거리는 것이요, 그 속에 섞인 보이들의 목소리도 들려 나왔다.
 보이지 않는 파도같이 수물거리는 그 속에서 별안간 와르르 깨트러지는 소리가 나며 또 한번 불끈하는 힘의 기색이 들렀다.
 "그만치만 하시라니깐요."
 "으앗!"
 종세는 더 머뭇거리고만 섰을 수 없어서 장지를 열어젖혔다. 청매도 뒤를 따라 들어갔다.
 싸움은 벌써 어지간히 자지러져서 방안은 조그만 수라장이었다. 탁자 위가 어지럽고 그릇들이 깨트러지고 만해와 남구는 한편에 한 사람씩 나둥그러져 동렬과 성수가 붙들고 있는 통에 꼼짝달싹 못하고는 있으나 짐승같이 으르고들 있다.
 참혹한 결과라는 것은 결국 피를 보고야마는 것이다. 두 사람은 한바탕 칼부림을 논 뒤였다. 동렬과 성수들은 대체 무엇들을 하고 있었던지, 혹은 그들이 달려들기 전에 이미 칼은 피차를 상하게 한 뒤였을까. 어디를 찌르고 어디를 다쳤는지 얼굴과 손과 옷자락이 온통 피투성이라 철모르고 피 장난들을 치고 있던 아귀들 같다. 망간 소리를 친 것도 서로 찌르고 찔리웠던 순간 이었던 것이다. 피 묻은 단도가 자리 위에 처참하게 빛난다.
 "무엇들을 하구 섰어. 냉큼 차나 부르지 못하구."
 할 바를 모르고 있는 보이에게 종세는 소리를 치고,
 "아니 이렇게들 되도록 무엇들을 하구 있었단 말요."
 동렬들을 야속히 여겼다.
 "우리보단 다 장골들인데 당하는 수 있어야죠."
 동렬의 대답이 웬일인지 마음을 찔러서 종세는 간신히 말을 이으면서,
 "무슨 꼴이란 말요, 이게."
 "밖에 알리지 않구 방안에서만 얼버무려 넘기련 것이 그만 이 꼴이 되구  말았구료."
 그러나 나갔던 보이가 자동차가 왔음을 고하러 왔을 때에는 그가 얼마나 밖에서 설렜는지 보이의 뒤에는 각 방에서 뛰어나온 사람들이 와르르 모여드는 것이었다. 미처 장지를 닫을 겨를이 없이 몰려들 들어 방안은 한결 요란한 것으로 변했다.
 사람들 틈에서 종세와 청매는 조그만 존재로 변해 어느 구석에 숨었는지 모르게 되었다. 싸움터는 장터가 되고 사람들의 주의는 싸우던 두 사람으로부터 요란한 방안의 분위기로 옮겨 갔다.
 "사람들이 원래 싸우러 세상에 태어나긴 했어두 ── 이건 큰 망신인걸."
 종세는 청매에게 수군거리면서 보이의 부축을 받아 만해의 몸을 사람들 틈으로 빼어냈다. 몰려나오기들 전에 감쪽같이 문밖으로 이끌어 차에 앉히기에 성공했다.
 "내가 동무해서 데려가죠."
 하고 함께 차 속에 앉는 청매에게,
 "오늘 저녁만 특별히 용서한다."
 했다가 다시,
 "사회면 기사 재료는 톡톡히 되는걸."
 차를 떠내 보내고 종세는 사실 속으로 벌써 기사에 붙일 제목을 생각 하고있는 것이었다.
 가까운 병원으로 돌아 응급수당을 마치고 청매는 만해를 자기 집으로 이끌었다.
 손과 머리에 허옇게 붕대를 감은 만해를 자기 방에 데려다 눕히고 옷을 풀고 이불을 덮었다.
 허옇게 감고 소독냄새를 피우면서 힘없이 자리에 누운 꼴은 흡사 중병이나 앓는 사람같이 보였다.
 "종세 녀석이 뭐라더라 ── 사회면 재료는 톡톡히 된다구."
 그렇게 어지럽게 휘돌아친 속이였언만 만해의 주의는 하필 종세에게로 쏠렸던 것이다. 누워서 첫마디가 종세의 말이었다.
 "그런 말이 다 걱정된단 말요. 몸 아픈 줄은 모르구."
 "그리구 또 뭐 ── 오늘 저녁만 특별히 용서한다구."
 "그런 건 더러 잊어버리세요 ── 종세가 무어라구 했든 간에 어쨌단 말예요."
 "그까짓 신문기사는 어찌 됐는지 종세가 청매에게 범연하지 않은 모양이  란 말야."
 이런 잔 마음씨는 도리어 청매에게 대한 만해 자신의 열정의 증명이었다.
 종세의 그런 말을 듣게 된 오늘 저녁 청매에게 대한 마음은 한층 짙은 것 이었고, 무엇보다도 지금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청매라는 느낌이 들었다.
 응당 차를 집으로 몰았어야 할 것을 모르는 척하고 청매에게 끌려온 것도 그 까닭이었다. 아내 남미려는 만해의 힘으로는 어거하기 어려운 여자였다.
 그 위엄에 눌리워 만해는 일찍이 여행을 떠난 때 외에는 밖에서 밤을 새운 때가 없었다. 오늘밤에는 그런 관습도 깨트리고 태연히 청매를 찾은 것이요, 그의 곁에서 밤을 새울 작정이었다. 청매에게 대한 사랑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걱정 마세요. 어서 종세는 종세구 사장은 사장이죠. 아닌 걱정을 다 ──""종 세는 종세라면 ── 종세에게 대해두 생각이 없지 않단 말이지…… 아이 쿠우!"
 몸 그 어느 구석이 찔리는지 허리를 들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신음하는 것이다.
 "내가 그 녀석을 찌른 줄만 알았더니 되루 주구 말로 받은 셈인가."
 "무슨 소용이 있다구 그렇게 폭력으로들 싸우세요. 소문만 나구 망신 만하게 되면서 잇속이 무어예요."
 "녀석이 종시 내 말을 안 들었겠다. 그 음득한 녀석이."
 "누군데 누구 말을 듣겠어요. 십여 년을 그 노릇으로 돌아먹은 이마에서 피 한 방울 안 날 위인인데 괜히 맞선 것만 불찰이죠."
 "그놈이 날 망쳐 놓았어 ── 난 파산야, 파멸야."
 목소리가 글썽글썽하면서 금시 터져 나올 듯도 한 눈치다.
 이불 속에서 고민하는 꼴은 어른이나 아이나 일반이었다. 찡그린 이 맛살에는 검은 그림자가 짙었다.
 "사내대장부가 무얼 그러세요. 앞길이 대해 같은데 맘을 굳게 먹으셔야죠. 인생이 그렇게 장난감 배같이 회똥회똥 엎어만 질까요."
 "벌써 엎어진 배야."
 "엎어졌으면 또 일어나죠. ── 그게 사람의 노력이라는 게 아닌가요."
 "…………"
 만해는 한참이나 묵묵하다가,
 "청매,
 " 새삼스럽게 얕은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었다.
 "……청매는 나를 사랑하렷다 ── 진정으로."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세요."
 "사랑의 감정같이 야릇한 것은 없어서 하는 소리야 ── 사랑한다구 생각 해두 기실 안 사랑할 때가 있구, 미워하는 것 같애두 실상 사랑하구 있는수가 있거든. 돈두 말구 인물두 말구 그저 알몸 하나 사랑할 수 있느냐 말야."
 "여부가 있나요. 물으실 필요두 없죠."
 "한 가지 청이 있어서 하는 소리야."
 "…………"
 "나하구 이곳을 떠나지 않으려나. 모든 것 버리구 알몸으로 단둘이 ── 가령 상해 같은 데로나."
 "상해로."
 청매는 놀라는 듯 놀라지 않은 듯 말을 받으면서 정신이 얼삥삥했다.
 "── 글쎄요."
 한 지붕 아래 이튿날.
 연회장 만해의 집에서는 다른 때와는 달리 아침부터 집안이 몹시 수선스러웠다.
 수선스럽다고 해도 휑휑하게 넓은 집안에서 단 한 사람 여자의 목소리만이 야단스럽게 들리는 것이었다.
 흡사 주인 없는 집안같이 여자의 어성이 높다.
 사실 그날은 주인 없는 집안이었다. ─ 만해는 간밤을 밖에서 새우고 아침이 늦어도 들어오는 기색이 없었다. 가정을 가진지 칠팔년에 처음 있는 괴변 이었다. 아내 남미려의 어성이 높은 것이 무리가 아니었다.
 식구라고는 외에 젊은 식모 한 사람이 있을 뿐이요, 따라서 미려의 싫은 소리의 대상이 그날 애매하게도 그였던 것이다.
 미려는 지금 노염의 대상이 바로 식모인 듯이 그에게 야단 호령이 자심 하다.
 "그래……어제 아침 나가실 때 별다른 눈치가 없었더냐 말이야."
 미려는 만해와는 침실이 다르고 일어나는 시간이 각각 다른 까닭에 두 사람의 집안에서의 행동은 반드시 일치되지 않았다. 미려가 침실에서 일어나 나왔을 때 남편은 벌써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나간 때가 많았다. 지난날 같  은 날이 그런 때였다. 늦잠을 자고 났을 때 남편은 벌써 집을 나간 뒤였다.
 그러기 때문에 남편을 못 본 지가 전전날 밤부터 벌써 사흘째였던 것이다.
 "아주 눈치두 말씀두 없으셨어요.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식모의 심상한 대답에 미려는 불만을 느끼면서,
 "어제 저녁엔 사에서 기별이 없었구."
 어제 오후 미려는 거리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왔던 까닭에 사에서의 기별 유무도 물론 식모에게 묻는 수밖에는 없었다. 가정에서의 주부는 미려가 아니고 식모였다. 미려는 만해와 마찬가지로 자기 개인과 일신이 중요한것이어서 가정 일은 대개 식모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부부간의 소식은 피차에 식모를 통해서 알고 전하는 수가 많았다. 그러나 이날의 남편의 소식은 한집안의 열쇠를 쥐인 식모에게도 아는 바 못되었다.
 "없었어요. 아무 기별두."
 "그럴 리가 있나. 아무 기별두 없이 밖에서 밤을 새우다니 그런 법이 세상 어느 곳에 있을구 ─ 식모가 우리 집에 들어온 후 그런 일이 한 번이나 있었던가. 어디 있었던가 말해 봐요."
 족치는 바람에 식모는 공연히 뜨끔해지면서,
 "그야 없었죠. 한 번두 그런 일이 있을 리 있었나요."
 "그랬겠다. 한 번두 없었겠다. 있을 리가 없었겠다. 그런데 웬일 인구, 오늘 이럴 법이 천하에……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을 보고는 식모도 대답할 바를 몰라,
 "글쎄요."
 얼버무리면서 그 야단스러운 부인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했다.
 식모의 눈으로 보면 자기가 주부격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는 하고 있는 그 보통이 아닌 집안의 부부의 풍습이 항상 이상하게 보였다. 부부는 집안에서는 각각 독립된 한 사람이요, 그 한 사람으로서의 자격이 부부로서의 자격보다도 중요한 모양이었다. 부부라는 것은 다만 한 지붕 아래에 살고 있다는 표정일 뿐이요, 두 사람의 거동은 반드시 일치되지는 않았다. 잠자는 방 잠자는 시간 식사하는 시간이 서로 어긋나는 때가 많은 것이요, 한 방에서 화목하게 지내는 때라고는 극히 적었다. 어느 나라 어느 고장의 법식인지 그 야릇한 풍속에 식모는 늘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피차에 즐겨서 그런 살림을 하는 그들로서 남편이 하룻밤 밖에서 잤다고 펄펄 뛰는 아내의 꼴 또한 식모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날의 그 법석은 그렇듯 수선스러워서 만약 그 당장에 초인종 소리만 안 났더라면 언제까지 애매한 식모를 못살게 굴었을는지 모른다.
 
 식모가 뛰어나갔을 때 문간에는 S전문학교 교수 안상달의 부인 혜주가 서있었다.
 "부인이세요?"
 혜주를 보고 식모는 다른 때보다는 한결 반가운 생각이 났다. 가뜬 한 게 단장을 하고 나타난 그의 모양이 그날 그 부산한 집안에서는 유별스럽게 신선하게 보였던 것이다.
 "들어오세요. 아씨 계셔요."
 식모는 반가운 판에 내섬기면서 제 마음대로 혜주를 응접실로 인도 하고는안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안 교수 부인 오셨어요."
 하고 미려에게 고하는 것이었다.
 혜주는 미려와는 학교 때부터의 친한 사이로서 미려에게는 꼭 한 사람의 알뜰한 동무였다.
 자주 놀러오는 그와는 식모도 낯이 익었다. 그가 나타났으므로 말미암아 미려의 흥분도 가라앉을 것이 사실로 식모가 특히 반가워한 것은 그 까닭 이었다.
 식모의 목소리에 미려도 겨우 얼굴빛이 누그러지면서 그 꼴 그대로 응접실에 나타났다.
 "교수 부인은 이렇게 방문두 이른 법인가. 아침부터 말쑥하게 채리구 나섰으니."
 스스럽지 않은 사이라 두 사람은 언제나 농으로부터 말을 시작했다.
 "이른 게 뭐야. 오정이 가까운데 정신이 빠진 품이 무에 있은 모양이지 ─ 녹성음악원 원장의 그 꼴은 또 무언구."
 조롱을 받고 미려는 비로소 어지러운 자기의 모양을 돌아보고 벽 위에 시계를 바라보았다. 동무의 말대로 어느덧 오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화가 나서 배길 수 있어야지."
 의자에 주저앉으며,
 "댁의 안선생두 더러 그러는 수가 있수?"
 찬찬히 바라보니까 혜주는,
 "뭐 말야. 유선생이 어쨌단 말야."
 다구지게 파묻는다.
 "어제 나간 채 안 들어왔구료 ─ 밖에서 밤을 새우면서."
 "밤을 새우다니."
 혜주도 천연스러울 수는 없었다.
 
 "괴변인걸 ─ 개벽 이래의 괴변이야. 남편이 가정 밖에서 밤을 지우다니."
 부채질하는 바람에 미려는 흥분이 새로워지면서,
 "그까짓 아무러나 화를 내지 않으려구 해두 제절로 나는구료."
 "알구 보니 당신들의 그 개인주의의 당연한 결말 같은데 화를 내서 무엇 하우. 남편이 아무렇게 하든 자유의지의 소행이거니만 생각하면 됐지 화를 낸다는 건 지는 점이 아닐까."
 "내 개인주의가 아직두 철저치 못한 탓인 모양이야 ─ 어떻게 하면 좋을 꾸."
 "세상 남편치고 개인주의가 아닌 사람이 하나나 있어야 말이지. 누가 착하구 누가 악한 게 있나. 다 일반이니."
 "안선생두 더러 그러나."
 "외박하는 일이야 없어두 맘속으로야 무얼 생각하는지 뉘 알겠수. 다 그렇겠지만 결혼한 지 칠팔년이나 되면야 가정에 꿈인들 있을 리 있수. 항상 곰 시락 곰 시락 하면서 밖에서 무슨 꿈들을 꾸구 있는지 헤아릴 수 있어야지.
 자기 꿈속엔 아내는 한 발자욱두 들여놓지 못하게 한다. 그 꿈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길이 무어요……요행 집주인은 열중하는 게 학문이라 꿈두 그 속에 있으려니 하구 안심은 되지만 그렇다구 가슴속을 활짝 헤쳐 볼 수도 없구 사람은 다 제 혼자야. 남편이나 아내나 다 각각 저 한사람밖엔 믿을 것이 없어."
 "아니 혜주가 다 그런 소리를 하나. 혼자만 살뜰한 스윗홈을 가졌다구 모두들 부러워하는 혜주가 ─ ""스윗 홈이 아니라구 부정하구 싶진 않어두 난 부부관념에 대해선 영원한 회의주의자야."
 "가정이구 뭐구 내겐 다 시들해. 당하구 보니 화가 나긴 나두 ─ 그까짓 정 화나면 분풀인들 못하나. 복수를 생각하면 맘이 통괘하거든. 사랑 없는 가정 언제인들 못 뛰어나가겠수."
 "분풀이니 복수니 그런 우울한 소리 그만두구 어서 나갑시다."
 한이 없는 설화에 혜주는 끝을 막으면서 미려를 들추슬렀다.
 "실상 오늘 함께 영화구경을 가려구 이렇게 채리구 나섰어. 「 남방 비행 」 이 왔다든가, 오래간만에 좋은 영화일 것 같아서 ─ 자, 어서 채리 구나와 요. 기다리구 앉았을께."
 울적하던 판에 차라리 잘됐다고 미려는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섰다.
 
 화장에 한 시간이 넘어 걸렸다. 축음기를 틀며 그림책을 보며 하면서 기다리기에 맥이 난 혜주는,
 "개인주의의 극치야. 남편이 들어오건 말건 화장에는 한 시간이 걸리구 아내 로서 제일 중요한 일이니."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혜주의 출현과 그와의 회화로 인해 미려의 마음이 누그러진 것은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맑은 자태로들 거리에 내려섰을 때, 미려의 얼굴에는 근심의 그림자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고 한가한 가정부인의 유유한 자태였던 것이다.
 그릴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그 길로 영화관에 들어가 새로 개봉된 「 남방 비행 」을 보게 되었다.
 미려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아름다운 한 폭 속에 정신을 흠뻑 뺏겼다.
 그렇게 마음에 맞는 영화는 평생에 처음이었다. 흥분과 감격으로 전신의 피가 유쾌하게 수물거렸다.
 ─ 변지에 파견된 공사의 젊은 부인은 주위와 생활이 뜻에 맞지 않아 고독 하기 짝없다. 늙은 남편은 청춘의 꿈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돌연히 날아온 비행사는 어릴 때의 소꿉동무였다. 부인은 그에게서 지난날의 꿈을 찾으며 청춘의 희망을 붙인다. 탄 자리에 붙은 불은 좀체 끌 수 없어 두 사람은 열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분별과 냉정은 악마의 것이다. 남편과 가정을 배반하고 드디어 사랑의 줄행랑을 놓는다. 비록 짧은 순간의 것 이기는하나 지극히 행복스런 해결이다.
 미려에게는 거기까지의 이야기가 필요하고 긴한 것이요, 그 다음부터의 지리한 부분은 쓸데없는 잔소리 같았다.
 "쓸쓸한 여자가 거기에두 있구나."
 느껴지면서'자니 올토’의 연기자 한 토막 한 토막 가슴을 울렸다. 사랑 없는 가정의 비극이 절실한 실감을 가지고 미려를 쳤다.
 그 한 시간 반 동안에 참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고 훌륭한 진리를 새로 발견 해 낸 듯 미려는 안타까운 만족 ─ 웬일인지 흐붓하면서도 안타까운 것 이었다 ─ 을 느끼며 혜주와의 함께 복도를 걸어 내려왔다.
 "그런 해결의 방법을 혜주는 어떻게 생각하우."
 "옳지 않다구야 할 수 없지 ─ 그밖에 또 무슨 길이 있느냐 묻는다면 대답 할 수 없으니깐."
 "내겐 큰 신발명이나 한 것 같구료. 신대륙 발견의 감격 이상이야 ─ 남방 비행, 평생 가면 내 잊을 수 있을까. 오늘은 집에 가 가만히 혼자 울테  야."
 "끝에 해결이 괜히 덧붙이기지. 흡사 수신교과서의 결론같이 그런 해결에 반드시 그런 불행이 오라는 법이야 있나."
 "그까짓 불행이 와두 좋아. 해결을 하는 순간 두 사람은 인생의 최고의 감격을 살았는데 그까짓 불행이 무엇 하자는 것요."
 미려는 마치 자기 자신의 형편 이야기를 하듯 흥분하는 것이었다.
 찻집에 들어가 차를 시켜 놓고 흥분이 좀체 사라지지 않아서 같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혜주가 의외의 것을 발견하게 되어 두 사람은 또 새로운 놀람 속에 휩쓸려 들어갔다.
 낮에 배달된 그날 석간신문 사회면에서 만해와 남구의 싸움의 기사를 발견한 것이었다.
 "무슨 곡절이 있었게 집에두 안 들어갔겠지."
 혜주가 중얼거리면서 내미는 신문지 위에 미려는 둥그런 눈을 내달렸다.
 ……동양무역상회의 사장 유만해는 홍천금광의 실패로 말미암아 격분 한 결과 광산의 매도자 브로커인 박남구와 난투 끝에 전신에 상해를 당하고 기생 청매 등의 만류와 간호로 간신히 당장을 피했다더라. 전 재력을 기울인 그 금광의 실패로 유만해는 아마도 파산일 듯…….
 대충 이러한 기사에 미려는 정신없이 신문지를 던지고 자리를 일어서서 그 길로 회사를 찾았다.
 "주인은 대체 어딜 갔단 말요."
 파물으나 이동렬도 최성수도 청매의 집은 차마 댈 수 없어 모른다고만 뻗 섰다.
 ─ 싸움, 청매, 파산.
 미려에게는 놀람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복잡한 심사가 물 끓듯 수물거렸다.
 그날 밤 오래도록 집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설레고 있는 판에 이 슥 해 서야 남편 만해는 머리에 붕대를 친친 감은 꼴로 나타났다.
 "지옥을 다녔왔단 말요?"
 남편의 어처구니없는 꼴에 미려는 되려 화를 내는 것이었다.
 머리와 손에 때묻은 붕대를 감은 그 부상병 같은 꼴이 가엾게 보이지 않고 추잡하게 보였다.
 악한 브로커와 싸워 상처를 입고 파산에 임한 불행한 남편이라는 생각보다도 기생집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늦도록 늦장을 부리다가 헤적헤적 집을 찾아든 추잡한 물건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 꼴로 집엔 왜 찾아든단 말요. 차라리 없어지든지 못하구."
 "사정두 모르구 괜히."
 "밖에서 밤을 지낸 게 무슨 알량한 사정이란 말요."
 "천천히 들어봐요."
 청매라는 게 누군지 대나 봐요."
 다따가 발설에 만해는 뜨끔했으나,
 "청매 따위가 문제가 아니요. 별안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일신상의 중대한 문제가 눈앞에 절박한 것요."
 남편이 야단스럽게 설레려고 해도 아내는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홍천광산이 글러지구 박남구와 싸웠단 말이죠. 싸웠으면 싸웠지, 집을 비우라는 법은 어디 있나요."
 "……그렇소. 신문에 난 대로요. ─ 실업가 유만해는 오늘부터 낙오 된것요. 박남구와 싸우다가 진 것요. 수많은 경쟁자 속에서 떨어져 장안 사람의 조소를 받으면서 자리를 밀려난 것요. 눈앞에는 시꺼먼 함정밖엔 없구, 그 속에 한 걸음 한 걸음 빠져 들어가는 것요."
 "그런 사정 앞에서 가정은 한푼 어치의 값두 없단 말요. 청매와 가정과 어느 편이 중하단 말요."
 "한자리에 앉았다가 응급수당을 하노라구 병원에 갔다 그렇게 된 것이지, 저 청매와 누가…… "변명 하는 아이와도 같다.
 "탈을 말아요. 파렴치를 부끄러워해요. 가정의 권위를 무시하고 짓 밟은것이 내게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요."
 미려는 분한 김에 견딜 수 없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만해의 밖에서의 생활이 얼마간 방종한 것은 반드시 오늘에 시작된 일은 아니었다. 아내가 아는 것은 집안에서의 남편뿐인 것이요, 밖에서의 행동까지 일일이 살필 수 없는 노릇이다. 남편의 자유로운 세계라는 것이 항상 아내의 그것보다는 넓은 것이며 남보다 유다르게 결머리가 세인 미려의 눈을 속이기도 만해로서는 여반장이었다. 그런 남편의 눈치를 미려는 대강 짐작은 하면서도 목도하지 않은 이상에야 어쩌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부부 사이에 금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도 첫째로는 그런 남편의 태도에서 온 것이었고, 남편의 태도로 말미암아 미려의 신뢰와 사랑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었다. 원래 미려보다도 만해 자신의 간청으로 결합된 부부 였다. 일단 식기 시작할 때 미려의 사랑은 살얼음같이 삽시간에 차졌다.
 
 "미려의 그 쌀쌀한 일도가 날 밖으로 몰아낸 것요."
 만해는 아내를 책하는 것이었으나 미려의 편으로 보면 모든 원인은 남편 쪽에 있었다. 원인 결과를 서로 미는 속에서 가정은 드디어 오늘같이 찬 것이 되었다.
 오늘의 미려의 감정은 반드시 질투에서 온 것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청매 한 사람쯤을 사이에 두고 질투에 불붙을 정도로 남편이 살뜰하게는 여겨지지 않았다. 질투가 아니요, 사랑이 아니요, 모욕이었던 것이다. 가정에 대한 남편의 반역 속에 커다란 모욕을 느꼈던 것이다. 이 모욕감이 미려의 심사를 불질렀다.
 "이까짓 가정을 누가 달갑게 여긴다구."
 홧김에 되구말구 손에 잡히는 것을 던지니 맞은편 벽의 거울을 맞히게 되어 금시 깨트려진 유리조각이 뎅그렁 하고 떨어졌다. 이번에는 도리어 남편에 대한 아내의 도전이었던 것이다.
 "일생의 중대한 일에 당면하게 된 이 당장에서 사소한 일로 사람을 못 살게 군단 말요?"
 만해도 드디어 소리를 높이게 되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에 미려를 격분 시킬 뿐이지 그의 의견을 휘일 수는 없었다.
 "중대한 일은 무어구 사소한 일은 무어란 말요. 가정은 사소하구 밖 에일만 중대하단 말요. 그따윗 사소한 가정을 가져서는 무엇 한다 말요."
 "일에 바쁜 남편이 밖에서 하룻밤쯤 지내구 왔단들."
 "오라, 그게 남자들의 특권이란 말이지, 누가 맨들어논 특권인구. 당신두 교육 받은 현대인이요. 현대인의 자랑을 요만큼이나 가졌소? 멀쩡한 야만인이지. 어디 남자에게만 그런 특권이 있으라는 법인가 봅시다. 아내는 죽어만 지내라는 것인가 봅시다."
 이 말을 실지로 설명하려는 듯 미려는 그 늦은 밤에 그 자리로 분연히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아내로서의 용기가 아니라 남편과 대등한 한 사람으로서의 용기를 낸 것이다. 대담하고 올찬 용기였다.
 그날 밤 만해에게는 지난 밤 미려를 괴롭게 했던 번민 이상의 번민이 왔다. 밤이 패어도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눈이 빠져라 기다리면서 고시랑고시랑 잠 한숨 못 이루었다. 미려가 미려의 침실에서 한 것과 마찬가지 만해는 자기의 침실에서 괴로운 하룻밤을 꼬박 뜬 눈에 새웠다.
 "흠, 이게 복수라는 셈이지."
 괴로운 코웃음을 치면서도 미려의 경우와 같이 역시 화가 났다. 피곤한  정신에 노염이 솟으면서 이튿날 아침 느지막해서 미려가 어슬어슬 나타났을 때에는 저절로 고함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이 이럴 법이 세상에."
 "왜요. 맛이 독하죠 ─ 호텔에서 하룻밤 자구 왔죠. 호텔에서 잔 것이 그럴 젠 기생집에서 자구 왔을 때의 심사가 어떨지 좀 생각해 보죠. 남자의 이기주의가 얼마나 몹쓸 것인가를 실물교육으로 더러 배워 봐요. 세상의 남편들이 얼마나 뻔질뻔질하구 밉살스러운가를."
 "이래두 문화인이니까 이만했지 정말 야만인 같았으면 오늘 아침 살인이래 두 났겠다."
 "에그머니, 살인이라니."
 이번에는 미려가 화를 내게 되었다.
 "─ 그게 야만인의 발악이 아니구 뭐란 말요. 그래두 그 편견을 버리지못하우 ─ 사내만 사내라는 그 교만한 편견을 버리지 못해요?"
 "미려가 조선에 태어난 것이 불행이요. 구라파에나 태어났더라면 발달 된 개인주의 사상과 높은 도덕문화 속에 자유롭게 살 수 있었을 것을 이 뒤 떨어진 조선에 태어난 까닭으로 남자에게서 욕만 받게 된단 말이지."
 만해가 목소리를 부드럽혀서 이렇게 구슬리는 것은 타협하자는 뜻이 아니었다. 가슴속에는 불붙는 노염이 활활 피어올랐다.
 "야유하는 셈이오? ─ 왜 그럼 구라파 사람같이 교양있는 사내가 되구료. 여자들만을 책하지 말구."
 "교육이 탈이야."
 만해는 드디어 터지고야 말았다.
 "─ 구라파니 개인주의니 반지빠르게 배워 가지구는 남녀동등이니 아내의 지위가 어떠니 철없이 해뚱거리는 꼴들이 가관이야. 몸에서는 메주와 된장 냄새를 피우면서 문명이니 문화니 하구 가제 깬 촌놈같이 날뛰는 것을…… 복수는 다 무어야. 여편네가 사내에게 복수라니. 이 사랑 없는 가정을 누군 달갑게 여기는 줄 아나. 한꺼번에 다 부서 버릴까부다."
 "이런 가정을 맨든 것이 누구란 말요."
 "누가 이런 가정을 맨들었누. 이 되지 않은 문화주의자 같으니라구."
 남편의 버릇도 아내와 같은 모양이다. 무엇을 집어 벽에 던졌는지 오늘은 거울 대신에 괘종이 깨트러졌다. 뎅그렁 하고 유리가 떨어지면서 움직이던 추가 섰다. 가정은 침묵한 것이다.
 "옳지, 잘 하우. 말 잘 했소. 마지막이란 말이지. 나두 실상 이걸 원하지 않은 바 아니었소."
 
 미려는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 황겁지겁 짐을 싸기 시작했다.
 몇 시간 후에 미려는 두 짝의 트렁크 속에 옷가지를 꽁꽁 재여 넣고 예금 통장, 현금 등 신변에 있는 대로의 것을 지니고는 집을 나섰다. 자동차에 앉아 거리로 향했다.
 "기어코 집을 나왔구나."
 하는 감상도 아무것도 없이 흥분 속에서 전신이 끊으면서 정신없이 익숙 한길로 굴러 내려갔다.
 호텔에 이르러 간밤에 하룻밤을 지낸 바로 그 방을 또 빌렸다. 짐을 방 가운데 놓고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을 때 아직도 꿈속을 헤매이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올 것이 왔구나."
 개운한 생각이 나는 한편 알 수 없는 무거운 것이 등을 내려 누르기도 한다.
 큰일을 저질러 놓은 듯한 일종의 불안이요, 두려움이었다.
 용기가 필요했다. 그런 두려움과 잡념을 말살해 버릴 마음의 용기가 필요했다.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부실한 탓이거니 자기를 꾸짖으면서 오로지 행동의 열정에 주의를 모으기에 힘썼다.
 "결국 와야 할 것이 왔을 뿐이다."
 반성도 뉘우침도 불필요하다. 눈앞의 현실이란 그렇게 될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눈앞에 온 대로의 것을 받아들이고 긍정할 뿐이다. 그 외의 잡념은 공연한 것이요 해로운 것이다 ─ 이렇게 미려는 생각하면서 움직이는 마음의 주초를 바로잡기에 힘썼다.
 솔직하게 말하면 미려는 지금까지 오늘이 오기를 마음속 그 어느 한 구 퉁이로 은근히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메마른 샘물 줄기같이 가정에서 시비가 마르고 끊어진 것은 오래 전 일이었다. 그 허물의 태반 이 남편의 태도에 있었다고 미려는 생각하고 또 그 편이 편리하기는 하나 그렇게 생각하는 미려의 심중을 한 겹 더 헤쳐 본다면 더 근본적인 인간성의 발로 로 돌릴 수 있을 것이요, 미려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을 그 근본적인 것에서 오늘의 결과가 왔다고 생각함이 옳을 법하다 ─ 기적이라는 것은 항상 가정 안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요, 신비는 언제나 눈 밖에만 있다. 현재를 벗어나려는 노력은 기적과 신비를 구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신비 없는 생활이 죽음을 의미함에 그것을 구하는 마음이 미려의 경우같이 간절함은 없었고, 그 마음의 지향을 결정적으로 지어 준 것은 남편이었다. 참으로 오늘 그 를 행동 속으로 밀어낸 것은 남편의 태도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합의의  결과요, 따라서 조금도 거리낌없는 결론이었다. 허물이 있고 그릇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은 남편이 져야 할 것이다 ─ 이렇게 미려는 생각하면서 마음을 대담하구 다구지게 먹었다.
 용기를 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당분간을 지내게 될 그 한 간 방에 정을 붙이려고 애쓰면서 옷을 갈아입고 몸을 가다듬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사동을 구해 말동무로 혜주를 불러내기로 했다.
 혜주는 무슨 일인가 하고 설렜는지 예측 이상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식당에서 점심상을 마주대하고 앉아 대강 미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혜주는 그다지 놀라는 법도 없이 비교적 심상한 표정이었다.
 "보배와 달러. 꽤 맹랑하구 다구진걸. 집을 나오다니."
 실상은 놀란 까닭에 범연한 표정이었던 것이다.
 "결국 어느 시대나 노라는 삐지 않는 모양이지. 후손이 또 하나 생겼으니 땅속의 노라두 기뻐하렷다."
 "난 가정의 노라가 아니구 인간의 노라야. 인간성을 막는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련 것야."
 "남방비행의 여주인공같이 말이지. 어저께 남방비행을 보고 오늘 그것을 모방 하다니 여간내기가 아닌걸."
 "그렇게 됐구료 ─ 그러나 대상 없는 여주인공이니 하릴없지."
 미려는 쓸쓸히 웃으면서 식도를 움직였다.
 "막연한 흥분만을 가지군 일이 다 된 게 아니야. 또렷한 법적 수속을 밟구 래야."
 "물론이지. 변호사를 대서 정식으로 결말을 지을 작정이야. 일시적으로 생각 해낸 행동이 아니구 굳은 결심을 먹구 한 일인 바에야…… "혜주를 보내고 미려는 번잡한 생각에 지쳐서인지 일시에 피곤을 느꼈다.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눕는다는 것이 연일의 피곤으로 말미암아 홀연히 잠이 들었다. 몇 시간 동안의 단잠이었다.
 눈을 떴을 때 방안은 황혼에 누르끄레 물들어 있다. 뉘엿거리던 해가 막 서산을 남은 듯 서창으로 보이는 하늘이 일면 누런 바다다. 그 바다 아래에 두 툴두툴 솟은 도회의 윤곽이 칙칙하게 저물어 가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공기가 답답하게 허공과 방안에 차 있다.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그 야릇한 누른빛이 알 수 없이 가슴을 건드려 미려는 침대에서 내려서 창의 휘장을 내렸다. 방안은 더한층 침침하다.
 벽의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켜보나 낮에 켠 등이라는 것은 되려 답답만 하다.
 
 그렇다고 불을 다시 끄니 켜기 전보다 또 한층 어둡다.
 "아, 안타까워."
 다시 창께로 가 휘장을 올리니 누런 황혼이 여전히 새어든다. 삼라만상이한 꺼 번에 어둠 속에 잠겨 버리려는 마지막 순간의 안타까움이 방안을 살러 버리려는 듯도 하다.
 미려는 침대에 풀썩 주저앉으며 요 속에 얼굴을 묻었다. 뼈 속이 자지러지게 아프며 몸이 떨린다.
 "왜 이리 서글픈고."
 전신이 한꺼번에 꺼져 버릴 듯이도 휑휑해지며 눈물이 푹 솟았다. 아이같이 그 자리에서 발버둥치며 울고도 싶다.
 지금까지 살던 집과는 지붕 아래가 달라진 그 한 간 방에서 별안간 폭풍우 같은 공허가 엄습해 온 것이었다. 물론 배반하고 나온 집이 그리운 것이 아니다. 속이 비고 마음이 허한 것이나 대체 무엇이 부족한지는 미려 자신도 그 자리에서 헤아릴 수는 없었다.
 향수였다. 무서운 향수가 잠자고 난 뒤의 허한 가슴속을 치밀어 올랐던것이다. 그 무엇인지 그 어디인지가 그립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면서도 현재를 벗어나 그것을 그리워하는 심사가 불같이 몸을 태웠다.
 "대체 그리운 것이 무엇일꼬."
 어지러운 꼴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면서 눈물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방에만 있기가 답답해서 층을 내려와 로비에 들어갔다. 음악이 들렸다.
 저녁식사가 시작되기까지의 한때를 사람들은 음악으로 보내고 있었다. 미려도 그곳의 한 사람이 되었다.
 모차르트의 가벼운 소나타 이중주였으나 그 경쾌하고 맑은 곡조가 미려에게는 도리어 슬펐다. 마디마디가 향수를 복돋아 주고 꿈을 말한다. 음악도 꿈꾸는 사람에게는 필경은 슬픈 것이다. 슬픈 것은 때로는 즐거운 것도 된다. 즐거운 것으로 음악을 시름없이 듣고 있을 때 문득 옆자리에 와 앉으면서 미려의 주의를 끄는 사나이가 있었다. 언제인가 집에서 만난 일이 있던 김종 세 임을 알고 미려는 모르는 체도 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댁에서 실례가 많았었습니다."
 종세는 하고 싶은 말마디가 가진 듯 긴하게 표정을 누그렸다.
 "선생이 지금 왜 여기 와 계신지 빤히 알구 있죠. 세상일 잘 알기로야 신문기자는 조물주 다음엔 가거든요."
 미려는 그럼 자기의 오늘 일을 벌써 세상 사람이 다 알게 됐누 하고 종세가 무서운 것으로 여겨져 화제를 돌려 보았다.
 
 "녹성음악원 때문에는 공연한 수고만 끼쳐 드리구 말만 퍼지게 됐는데 사정두 있구 해서 성사될 것 같지 않아요. 물론 이번 후원만은 약속한 대로 틀림없이 하겠습니다만."
 "만해씨와는 일전에 자리두 같이하구 한 까닭에 그 사정이라는 것 대강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두 분이 앞으로 어떻게 되시는지 세상의 기대가 컸던것만큼 음악원 일만은 계획대로 하셨으면 합니다만."
 "제 사정이 급작스럽게 절박해져서 그런 일을 미처 생각지 못하게 됐어요."
 "거기 관해선 천천히 말씀 들을 기회가 있겠습니다. 오늘은 저두 바빠서요. 일마군이 만주서 돌아온답니다. 호텔에 방 교섭을 왔던 길에…… ""일 마씨 가요?"
 "교향악단보다 먼저 오죠. 홀몸으로 오는 것이 아니래서 방을 고르 기가 까다로워요."
 종세의 한마디 한마디에 미려는 긴장되고 몸이 달았다.
 하늘 위의 별 아파트 청운장 이층 방에서 박능보는 이른 저녁의 한때를 하는 일 없이 우두커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병원에서 조금 일찍이 사퇴하고 나왔다. 밤차로 도착한다는 일마의 전보를 받았던 까닭이다. 역으로 나갈 시간을 앞두고 잠시 명상에 잠기고 있었다.
 "불과 달포 동안에 사람의 운명이 그렇게두 변하나."
 동무 일마의 그 동안의 운명의 변화에 놀라고 있었다. 시험관 속의 액체에 변화같이 삽시간에 놀라운 변화를 한 것이다.
 두 번이나 행운을 맞히고 그 위에 사랑조차 얻어 가지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려는 것이다.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그런 행운을 찾으러 떠났던 길 같다. 떠날 때와 돌아오는 때의 신세가 얼마나 엄청나게 다른가. 밤낮으로 보고 어울리고 하던 친한 사이므로 그 변화는 더욱 신기하게 여겨졌다. 능 보자신 이나 훈이나 종세에게는 아무 변화도 없었던 까닭에 동무의 변화는 한층 신기하게 여겨졌다.
 "자기는 그 동안에 무얼 하구 있었던가,
 "육체의 애꿎은 신진대사가 있었고 변치 않은 나날의 일고가 있었을 뿐이다.
 하나하나의 세포가 달포 전과는 다른 것으로 변했을는지 모르나 생활에는 아무 변화도 없다. 방안 책시렁에 책 한 권 늘지 않았고 책상 위 현미경은 먼지를 보얗게 쓰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은파와의 관계도 미적지근한 그  대로 조금의 발전도 없다. 속히 개업이나 하고 두 사람만의 조그만 가정을 가지자고 지금은 벌써 농이 아니라 진정으로 은파가 조르는 것이나 아직 개업 할 성산은 아득하다 ── 아무 변화도 없는 것이다. 무료한 답보가 있을 뿐이다. 변한 것은 일마뿐이다. 일마만이 운명을 갈고 행운을 가지고 오는것이다.
 "그리구 이 아파트에서 떠나려는 것이다."
 바로 이웃방이 일마의 방이다. 몇 해를 한 지붕 아래에서 가까이 왕래 하면서 형제와 같이 다정하게 지내오던 그가 더 다정한 그의 짝을 데려오는 것이다. 아파트를 떠나서 둘만의 행복스런 보금자리를 가지려는 것이다.
 변화라는 것이 서글프게만 여겨지면서 쓸쓸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을 두드리고 훈이 찾아왔다. 이 역 일마를 맞으러 능보와 함께 역으로 나가려는것이다.
 "자네 동무 한 사람 뺏기게 됐네 그려."
 능보는 일어서서 훈과 함께 이웃방 앞에 이르렀다. 자기 방 열쇠로 손쉽게 열 수가 있었다.
 동무 없는 방안이 휑휑하고 쓸쓸하다. 홀아비의 살림그릇이 신혼의 살림 그릇으로 변하려고 한다. 책상 위 먼지를 손가락으로 만지면서 방안을 살피려니 신기한 기적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금발미인에게 동무를 뺏긴다."
 "평생에 굉장한 연애를 하겠다구 벼르더니 그게 굉장한 연애라는 것인가.
 그런 구라파주의자는 없더니 필경 그 일을 치자구."
 능보보다는 역시 훈이 일마의 비위를 더 잘 이해하고 동감할 수 있었다.
 "일상 엉뚱한 꿈을 꾸며 결국 엉뚱한 짓을 하고야 마는군."
 실상 훈의 꿈도 일마의 그것과 비슷하다면 비슷했다. 부질없이 향수를 느끼는 것이었고, 그 그리워하는 고향이 여기가 아닌 거기였다. 현대문명의 발생 지인 서쪽 나라였다. 일마는 누구보다도 대담하게 그 향수의 갈증을 채우고 꿈을 수입한 것이다. 일마의 심중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훈은 자기일 듯싶었다.
 "실물로 예증한 셈이지. 일마두 맹랑한 걸물이야."
 "어서 금발미인 구경이나 나가세나."
 능보는 팔 시계를 들어 보면서 훈을 재촉했다.
 일마들을 맞이해 호텔까지 동행해다 주고 훈과 능보는 거리로 나오면서 머리 속은 나아자의 인상으로 그득히 차 넘쳤다. 오래간만에 보는 동무, 일마  의 정든 낯도 나아자의 신선한 인상 속에서 숨어 버리곤 했다.
 "흡사 누구 같을까 ── 영화배우의."
 훈이 생각해 내려고 애를 쓸 때 능보가 수월하게 잡아내면서,
 "류쉐엘 같지 않은가 ──코리이느 류쉐엘. 불란서 배우의."
 "옳지, 류쉐엘과 비슷해 ── 온순하고 순결한 자태가."
 "눈이 높단 말야. 일마가 사람 하난 잘 골랐어. 한 점 나무랠 곳이 없어."
 "내가 만약 일마라면 이상 더 꿈이 없겠네.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나 더 바랄 것이 없겠어. 그만하면 얻을 것은 다 얻었단 말야. 그 이상의 원은 욕심이란 것야."
 "일마의 꿈두 필경은 동양이었던 모양이지. 나아자의 얼굴은 아무리봐두 동양의 것이거든. 동양의 특징을 가진 순 서양의 얼굴이야. 눈이며 눈썹이며 코며가 온순한 조선의 것이란 말야. 피부가 희구 머리카락이 노랄 뿐이지."
 "일마의 꿈이 우리의 꿈일 테니까. 우리 모두가 꿈꾸는 하나의 이상형 일지두 모르지. 어떻든 장안에 일색 하나 더 늘었어. 내가 미인이로라구 뽐내는 축들이 나아자의 앞에서야 숨이나 크게 쉬겠나. 그 눈, 그 별 같은 눈망울."
 역 폼에서 일마가 사람을 차례로 소개하니 머리는 숙이지 않고 방글방글 바라보던 그 눈이 선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자동차로 호텔에 이르렀을 때 모든 새로운 것에 신기한 듯 눈을 보내면서도 끝까지 품격 있고 의젓한 나아 자였다. 묵은 전통에서 오는 교양의 빛이 은연중에 드러나 있었다.
 초저녁이기는 했으나 식사도 할 겸 두 사람은<실락원>을 찾았다. 화장을 마치고 난 은파가 뛰어나오면서,
 "나두 역에나 나갈걸요. 금발인의 풍채가 어때요 그래."
 궁금해 라니,
 "나아 자를 본 눈으로 지금 은파를 보려니까 흡사 말뚝을 대하는 것 같구료.
 은파는 벌써 여자가 아니야."
 하고 훈이 나무래도 은파는 천연스럽게,
 "옳아, 그렇게 놀랍단 말이죠. 어떻길래 교만한 일마의 눈에 걸렸죠. 정말 한번 봐둘걸요."
 "나두 여자 보는 눈이 달라진 걸. 그 오똑한 조각을 보구 난 뒤엔 거리의 여자 란 여자가 죄다 널쪽같이 납작하게만 보인단 말야."
 능보의 술회에 은파는 비로소 샐쭉해 하면서,
 "당신들의 그 꼴같잖은 서양 승배 그만들 둬요. 거지가 뭘 보구 침 흘리듯 서양이 라면 사족을 못 펴구 ── 야만의 추태지 뭐란 말요."
 
 흥분하는 양이 통쾌해서 훈은 숭굴숭굴 웃으면서,
 "누가 서양을 숭배하나, 아름다운 것을 숭배하는 것이지. 아름다운 것은 태양과 같이 절대라나. 서양의 것이든 동양의 것이든 아름다운 것 앞에서는 사족을 못써두 좋구 엎드려 백배 천배 해두 좋거든. 부끄러울 것도 없구 추 태두 아니야 — 은파가 그렇게 짜증을 내는 건 되려 속을 뵈이는 점이지. 괜히 가만히 나 있잖구."
 "그놈의 아름다운 건 다 무엔구."
 "나두 은파와의 결혼을 좀더 생각해야겠어."
 "미안하우. 제발 요량대루."
 은파도 능보를 따라 웃으면서 다시 농으로 돌아가 자라는 화해졌다.
 "그렇게 놀랍다면 그럼 —— 가령 미령보다두 더 잘났단 말요?"
 "미려와 나아자와 — 글쎄, 내 생각엔 나아자가 난걸."
 그러는 자리에 뛰어든 것이 종세였다. 늦도록 시중을 들고 오다 보니 그렇게 늦었다.
 "나아자들을 보구 제일 실망한 게 누군 줄 아나."
 종세는 숨도 갈지 않고 다짜고짜로 이 소리 였다,
 "미려라네 — 호텔에서 찬찬히 살피려니 그 수심에 넘치는 자태는 차마 못 보겠데. 멀리서 멀끔히 바라보는 그 자태를."
 동무들을 보낸 후 일마는 나아자와 함께 작정된 이층 방으로 올라갔다.
 나아자는 여행의 피곤도 잊고 기쁜 기색이었다. 거리의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째이고 동무들의 흥성흥성 나와 맞이해 주고 하는 것이 초행의 그에게는 반가운 인상을 주었다.
 "호텔이 이렇게 훌륭한 줄은 몰랐군요. 하얼빈서두 드물게 보는 호화로운치 창이에요."
 사실 만족스런 표정이요 말소리였다.
 "이곳에두 서양 문명이 상당히 뿌리깊게 배어 들었거든 — 적어두 겉만은."
 "당신의 고향이 아주 맘에 들었어요. 유쾌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호텔만이 조선의 모양이 아니라우. 호텔 밖에 여러 가지 구저분한 현실면 이 있을 테니 아예 실망은 하지 마우."
 "어느 고장엔 두 가지 면이 없나요. 왜 밝은 쪽이 있으면 어두운 쪽두 있는건 아무데나 매일반인데 실망을 하다뇨."
 보이가 앞서서 방을 열고 여러 짝의 트렁크를 들여놓았다. 일마가 목욕, 식사 등 몇 가지의 주의를 묻고 열쇠를 받으니 보이는 나갔다. 두 사람만이 넓은 방안에 섰을 때 일마에게도 사실 오랫동안의 긴 여행을 마치고 마지막  목적 점에 도달했다는 안도의 느낌이 우연히 솟았다.
 넓은 침대, 의장, 화장대—두 사람의 소용인 그런 방안의 살림그릇이 홀몸의 것과는 달러 염염한 모양을 보이고 있는 속에서 나아자의 자태는 한층 사랑스럽게 보인다. 그 역 안도의 감정 속에서 잠시 방심의 상태로 서있는것이었다.
 북으로 향한 창을 여니 저물어 가는 뜰 안에 팔각당의 검츠레한 윤곽이 내려 보인다. 나아자는 창 앞에 서서 부근의 풍경을 진기한 것으로 바라보았다.
 "저게 조선의 집인가요?"
 "옛날사람들이 세운 낡은 집."
 "얼마나 넉넉하고 운치가 있어 보이는죠 — 흡사 만주에서 보는 것 같은."
 "같은 동양의 집이거든."
 "동양을 전 원래부터 이해하지만 그 동양의 아름다운 것을 참으로 즐겨 할수 있을 것 같아요."
 "아름다운 것은 즐겨해두 추한 것에서 느끼는 환멸은 얼마나 큰 것일까. 추한 것이 아름다운 것보다는 언제나 많으니깐."
 "추한 건 추한 것으로 또 동정이 가게 되죠."
 "팔각당 넘엔 개천이 있구 그 넘엔 빈민굴이 있다우. 빈민굴 없는 데가 없겠지만 조선은 전체가 한 커다란 빈민굴이라우."
 "그럼 빈민굴 속에서 함께 살죠. 누가 반드시 아름다운 것만을 원하나요."
 나아자는 돌아서서 일마에게로 몸을 쏠리며,
 "저를 참으로 잘 이해해 주실려면 제가 강박한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주셔야 돼요."
 진득이 일마의 눈 속을 들여다본다.
 "당신을 이렇게 따라 나온 건 괜히 바람에 불려서가 아니예요. 의외의 행운을 얻은 것을 부러워한 까닭두 아니구 피차의 계급이 같은 것을 만만히 봐 서두 아니구 — 참으로 당신을 믿구 사랑하니까 모든 것을 버리구 이렇게 길을 같이한 것이죠."
 나아자는 사랑한다는 말 이상의 표현을 한 줄을 몰랐으나 그 한마디가 속과 정성을 다 털어논 한마디였다. 당신을 좋아하구 존경하구 믿구 끔찍이 여 기구 — 한다는 뜻이었다. 최대한도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누가 그런 줄을 모르우."
 "그럼 절 오해하지 마세요. 저두 또 믿어 주세요."
 몸을 맡기면서 새삼스럽게 일마의 애정을 구한다. 두 사람은 마치 그것이 첫 번인 듯 열정적으로 피차를 안았다. 이미 아내인 나아자를 일마는 오늘 신  선한 신혼의 기분으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겼다.
 보이가 노크를 하고 목욕의 준비를 고하지 않았던들 두 사람은 좀체 갈라질 줄 몰랐을 것이다.
 호텔은 기숙사가 아닌 까닭에 각각 방 사람들의 생활은 반드시 일치 되는 법이 없다. 식당에서 식사하는 시간이나 로비에서 쉬는 시간이나는 각기 다르고 자유롭다. 그런 속에서도 미려는 더욱 그런 시간의 배려가 다른 사람들과는 동떨어지게 달랐다. 될 수 있는 대로 뭇사람의 눈에 띠지 않도록 세심의 주의를 하는 것이었다. 식당에 나타나는 시간은 누구보다도 이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늦었고, 로비에 나타나는 것도 사람의 그림자가 뜸한 때를 택했다.— 아직도 일신상의 소문이 거리에 펼쳐짐을 즐기지 않는 까닭이었다.
 어제 오후 종세에게서 일마의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욱 알 수없이 기가 죽어지면서 방에만 박혀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설레는 마음과는 반대로 용기는커녕 도리어 주렵이 들었다. 웬일인지 두려운 생각이 났다.
 일마를 만남이 여간 일이 아닌 — 희망과 실망의 교차된 야릇한 감정이 들었다.
 저녁때는 되어 복도에 수선스런 발소리가 나고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마도 일마들의 도착인 모양이었다. 넓은 호텔 안에서는 어느 때 누가 떠나고 누가 오는지 일일이 눈치채고 헤아릴 수는 없었으나 그날 복도에서 나는 수선스런 말소리만은 미려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소리가 뜸한 뒤에 문밖을 지나는 보이에게 곡절을 물으니까.
 "바로 저 북쪽 구석방에 새로 손님이 들었답니다."
 혼자 설명 하면서,
 "만주서 돌아왔다는데 금발미인을 데리구, 아주 훌륭하군요. 국제 부부 치구는 보던 중 놀라워요."
 미려는 종세의 말눈치에서 일마의 국제연애의 일건을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보이의 입으로 직접 국제부부니 금발미인이니 하는 소리를 들으려니 공연히 뜨끔해지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굉장한 손님들이군."
 "저희두 외국 여자를 많이 봤지만 그렇게 째인 여자는 처음인데요."
 미려는 혼을 뽑으려고만 하는 소리 같다. 미려는 단번에 기가 죽으면서 보이의 설화를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밤에도 꼼짝하지 않고 방에만 있었고, 오늘 아침 식당에도 가장 늦게 내려간 것이었다.
 
 제 스스로 질려 제 몸을 방안에 가둔 것이다. 반달 동안 역시 두문불출 방안에서 죄수 노릇을 했다. 전날부터 내려오는 수심과 감상은 더욱 가슴을 물어 뜯었다.
 오후의 따스한 햇빛이 서창에 그득히 쪼일 때 정신을 차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바람을 쏘이러 뒤뜰로 내려갔다.
 일광실을 지나 후원으로 나가니 돌담과 벽에 기어오른 담장이의 신선한 빛이 눈을 끈다. 무엇보다도 민첩하게 가을을 수입한 그 진홍빛 잎새가 금시에 가을을 느끼게 했다.
 실상인즉 미려도 오늘 선선한 홑적삼을 벗고 붉은 겹저고리를 입었던 것이다. 저고리의 빛과 담장의 빛은 공교롭게도 일치되어 피차에 가을을 자랑 하는 듯 오후의 햇빛 아래에 신선하게 보인다. 미려에게는 자기의 모양이 보이지 않는 까닭에 담장이와 자기의 모양과 어느편이 더 아름다운지를 판단 할수는 없었다. 담장이의 빛을 보고 선뜻 가을 감각에 눈떴을 뿐이다.
 그러나 담장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
 잔디를 밟으며 후문으로 들어섰을 때, 저편 묵은 돌층대를 걸어 내려오는 화려한 색채가 눈을 끌었다. 그 역 담장이의 빛이었다. 진홍빛 드레스를 입은 염염한 자태가 담장이 이상으로 미려의 정신을 뽑았다. 붉은 머리카락에 해가 쪼여 금빛 윤곽이 그림 같다. 그 색다른 남녀가 누구인지를 미려는 물론 직각할 수 있었다.
 일마와 나아자였다. 단둘이고 원 속에서 오후의 산보를 하는 것이었다.
 미려는 주춤했으나 벌써 자기도 두 사람 눈에 띠인 몸으로 비겁하게 뒷걸음을 칠 수도 없어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에 두 사람도 차차 이쪽으로 가까워 왔다.
 나아자의 편에서도 멀리 미려의 자태를 발견하고 그 선선한 가을 감촉에 주의 했던 것이었다. 담장이 빛깔 같은 저고리의 고운 빛에 정신이 끌리면서 일 마를 돌아보았다.
 "조선 여자의 옷맵시가 곱다더니 헛말이 아니군요."
 언제인가 일마에게서 들은 흰옷과 꽃신의 아름다움을 문득 생각해 냈던 것이다.
 "흰옷두 곱지만 봄 가을로 시절이 변할 때의 색옷들두 저렇게 곱잖우. 긴 치마에 꽃신만 신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저두 한번 저렇게 채려 보겠어요. 짧은 치마에 구두는 흡사 양장인데요.
 투피스 셈으로."
 나아자는 자기의 옷맵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잊어버리고 미려의 맵시에  찬미를 마지않으며 마른 잔디를 사뿐사뿐 밟았다.
 그것은 흡사 미려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나아자의 자태에 잠시 취 했던것과도 같다. 붉은 드레스와 금빛 머리카락에 정신을 뽑혔던 것과도 같다.
 미려와 나아자 두 사람을 한꺼번에 바라보고 두 사람의 아름다움을 판단 할수 있음은 그 자리에서는 일마 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과 떠나 제삼자의 입장에 서 있는 까닭이다. 미려에게는 자신의 자태가 안 보이고 나아 자에게도 자신의 자태가 안 보이는 것이나 일마에게는 두 사람의 자태가 함께 보이는것이다.
 하얼빈을 떠난 후로 나아자의 자태를 오늘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는 일마에게 지금 눈앞에 나타난 그 뜻하지 않은 조선옷의 자태도 놀라운 것으로 비취었다. 나아자와 함께 염치불구하고 그를 바라보면서 가까이 왔던 것이다.
 서로 보아도 보지 않은 체 놀라도 놀라지 않은 체하고 시침을 떼고 스치는것이 문명인의 태도인지는 몰라도 야박스런 근대인의 버릇이다. 그러나 참으로 놀랐을 때는 그런 냉정한 여유도 없어진다. 일마와 나아자의 미려를 보는 눈이 그러했다. 미려가 머뭇거리면서 엇비슷이 외면하고 있는 동안에 두 사람은 은근히 그를 관찰하면서 지났다.
 참으로 행복스런 한 쌍이었다. 공작같이 자랑스럽고 행복스런 두 사람 이었다. 미려는 외로운 자신의 모양과의 대조에서 오는 쓸쓸함을 느끼면서 더 돌아볼 염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섰을 때, 몇 걸음 앞섰던 일마가 다시 뒤 돌아서면서 소리를 거는 것이 아니었던가.
 "……저,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으나 — 남미려씨가 아니던가요?"
 그 목소리에 미려도 돌아서면서 처음으로 일마와 대면했다.
 "역시 미려씨이시군요."
 그 한마디 속에는 무한한 감회와 뜻이 있는 성싶었다. 팔년 동안 포개진 시간의 주름이 있었고, 그 주름 속에 간직하고 잊혀졌던 회포가 그 한마디 속에 살아난 듯 들렸다.
 미려도 시간의 주름을 뛰어넘어 팔년 전의 회포에다 오늘을 잇은 것 이었으나 벌써 감격과 기쁨보다는 오늘은 쓸쓸한 고독과 서글픔이 앞섰다. 행복스런 부부의 앞에서는 팔년 전의 회포도 벌써 무의미한 것이다. 팔년 동안 일신이 얽매어 있었고 오늘 그것을 풀고 자유롭게 뛰어 나왔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시간은 무정하고 엄숙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기대와 기쁨도 일 순에 사라지고 환멸의 슬픔이 커다랗게 맥쳐왔다.
 가까이 온 나아자에게 일마는 미려를 소개하고 한참 동안이나 두 사람만의  다정한 말을 건넸다.
 친구의 아내라고 소개하는 것일까, 혹은 교향악단 내연의 후원을 자청한 여자라고 일러줌이었을까. 나아자의 미소를 띠인 말소리를 번역해서 일 마는,
 "음악 후원의 좋은 일을 하시니 대단히 고맙다구 나아자두 기뻐하는군."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아자의 그 고마워하는 미소도 미려에게는 반갑기는커녕 괴롭게 들릴 뿐이다. 세상에서 기쁜 것은 벌써 자기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뻐하는 양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서게 된 자신의 쓸쓸한 모양을 반성하는 것 이었다.
 후원의 산보에서 방으로 들어와 미려는 저녁때까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일마를 그런 모양으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변치 않는 꿈의 대상이요, 그리운 마음의 고향이었다. 팔년 후에 처음으로 만나게 된 그는 벌써 찾 아들 고향이 아니고 멀어진 꿈이었다.
 며칠 전 집을 나와 황혼의 방 속에서 홀로 애달픈 향수에 운 것은 그래도 그 무엇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였다. 그 그리워하는 원의 대상이 일마 였음 은 아마 미려 자신도 또렷이 마음속에 집어서 느끼지는 못했을는지 몰라도 꿈을 가진 서글픔이요, 빠져 나올 길이 있는 고독이었다. 이제 일마를 만나 보니 벌써 막힌 길이요, 잃어진 꿈이다. 위안 없는 절망과 고독이 가슴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너무도 시간이 지리한 것 같아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을 겸 세수를 하고 화장대 앞에 앉았을 때 문을 노크하고 보이가 들어왔다.
 "저쪽 구석방 심부름인데요."
 하고 봉투에 든 편지를 내놓았다.
 "저녁을 같이 하시자던가요."
 보이가 먼저 발림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봉투를 뜯으니 일마의 글씨인 듯 한두어 줄 글이 간단히 읽혔다.
 — 나아자가 특별히 오늘 저녁 만찬을 대접하고 싶다 하오니 승낙해 주시면 큰 영광이리라 — 는 뜻의 것이었다.
 "곧 대답을 가져오라는 분분데 편지 쓰실 것 없이 제 귀에만 일러주시면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보이가 재촉하는 바람에 편지를 더 거푸 읽을 겨를도 없이,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생각할 겨를 도 없이 간단히 그 자리로 승낙의 대답을 주는 수 밖 에는 없었다.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던 까닭이다.
 보이가 나간 후에 그렇게 홀홀히 대답한 것이 혹 천하게나 여겨지지 않을까 하는 뉘우침도 나기는 났으나 그것도 자기의 편견이리라고 고쳐 생각 하면서 일마의 처지가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와의 접촉의 기회를 피할 것은 없다고 마음먹는 것이었다.
 세 사람의 만찬의 식탁은 특별한 분부로 보통과는 규모가 다른 모양이었다.
 미려를 앉힌 맞은편에 일마와 나아자가 나란히 앉아 화목한 웃음으로 그날 밤의 주빈을 대했다.
 "내가 조선 와서 처음 뵙는 당신이구 처음 대접하는 만찬이랍니다. 자랑은 아니나 반갑게 받아 주세요. 오늘 뜰에서 우연히 만나 뵙구 사귀게 된 정의로."
 나아자의 말인지 그렇지 않으면 일마 자신의 말인지 미려에게는 기괴한 착각이 일어나면서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날 밤의 그 만찬도 일 마자 신의 뜻에서 나온 것인지 짜장 나아자의 발설로 된 것인지도 헤아릴 수 없었다.
 "이왕 이곳에 나온 바에는 이곳의 하나씩 하나씩 배워 가야 할 테구, 그렇게 하려면 친한 동무두 한 사람쯤은 필요하다구 생각했었는데 오늘 마침 만나 뵙게 돼서 이런 행복은 없어요. 당신은 그렇게 곱구 의젓하신 것이 저 의 행복스런 동무될 것을 믿습니다. 오래도록 사귐이 길기를 바랍니다."
 나아자의 말을 일러준 후에 일마는 자기의 말로,
 "좋은 동무가 돼서 아무쪼록 잘 지도해 주십시오."
 하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일마를 중간에 세우는 것도 멋스러워 미려는 되구말구 기억하고 있는 영어로,
 "이렇게 알게 된 것이 되려 제게 다행입니다. 그 다행함을 져버리지 않도록 좋은 동무 되려구 애쓰겠습니다."
 한마디 대답하니 나아자는 뜻을 얻은 듯 이번에는 그도 영어로 변했다.
 "계획이 많답니다. 첫째, 조선말을 배워야 할 것 — 사랑하는 고장의 말이니깐, 둘째, 조선옷을 연구해야 할 것 — 나두 그 옷이 대단히 입구 싶답니다......"
 "아는 데까지는 가르쳐 드리구 말구요."
 두 사람의 대화하는 양을 일마는 신기한 것으로 바라보았다.
 그날 밤 홀에서 무도회가 있으니 함께 참석하자는 나아자의 권고에 미려는 수월하게 대답을 했으나 방에 와 생각하니 멋스럽기 짝없는 일이었다.
 
 부부가 보이는 속임 없는 친절이 가슴에 사무쳐서 선뜻 대답은 한 것이나 그날 밤 만찬부터가 결코 편편하고 떳떳하게 받을 것은 못되었다. 황차 무도회에 이르러서야 쓸쓸한 홀몸이 무슨 체면으로 부부 속에 끼어 면구스런 꼴을 보일 수 있을 것인가.
 나아자의 친절 앞에 부끄러운 생각도 났다. 나아자의 마음과 미려의 마음은 반드시 똑같이 담박하고 무심한 것은 아닐 듯싶다. 일마와 미려의 지난날의 미묘한 관계를 모르는 까닭에 나아자의 심중은 백짓장같이 맑고 관대한 것이나 일마에게 대한 과거의 회포를 가슴속에 지니고 그것을 말할 바 없는 미려의 심중은 그만큼 괴롭고 복잡했다. 나아자는 일마와 부부로서 통 하는것이나 미려도 일마와는 한 줄기 은은한 마음의 교통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꿈에도 모르는 나아자의 앞에서 미려는 부끄럽고 죄스러운 생각이 났다. 그런 복잡한 마음의 그림자를 품고 부부 사이에 끼어 천연스럽게 자리 없는 한몫을 보자는 것이 떳떳한 예의로는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승낙한 일이요, 한편 행복된 나아자의 은근한 자랑에 의지 해본 들 어떠리 하는 심정도 없지 않아서 옷을 갈아입었다. 요행 모인 사람들은 반드시 모두가 부부끼리가 아니요, 홀몸인 외짝도 많았던 까닭에 미려는 나아 자들의 틈에서 그다지 불편한 느낌 없이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호의와 우정의 표현이라는 것일까 — 음악이 시작되자 나아자는 첫 춤 의상대를 미려에게 청하는 것이었다. 앞에 와 서서 선뜻 손을 잡고 끌때 미려는 영문을 몰라 일어서면서 세상에 여자들끼리 추는 춤이라는 것도 있나 생각 하면서 끌려 나갔다. 사람들도 두 사람의 춤을 진귀한 것으로 바라보았다.
 미려는 뭇시선 앞에서 겸연쩍으면서도 나아자의 뜻을 고맙게 여겨 그 야릇한 한 번 춤을 즐겁게 출 수 있었다.
 춤이 끝났을 때 일마는 박수하면서 그제서야 부부의 춤이 시작되었다. 몇번을 거듭한 때였을까. 이 역 홀몸인 듯한 외국 사람 하나가 나아자에게 춤을 청하고 나아자가 승낙했던 까닭에 일마는 비로소 그 틈을 타서 미려와 결고 일어섰다.
 일마와 맞붙들고 도는 미려에게는 신기한 생각이 났다. 춤이란 그런 때의 두 사람을 맞붙들어 세우기 위해서 생겨난 물건 같다. 춤이 아니었던들 두 사람이 어찌 그렇게 수월하게 맞잡고 일어설 수 있었을 것인가.
 "오늘 저녁의 만찬이며 무도회며 — 누구의 발설인지 몰라두 미안만 해요."
 "다 나아자의 뜻이죠. 물론 별 속없이 정말 맘에 들어서 하는 짓이지만."
 "그러니까 더욱 미안해요."
 미려는 두려운 생각조차 들어서 외딴 곳으로만 돌면서,  "이 자리에선 물론 말씀드릴 수 없구 언제나 조용한 때 얘기 드렸으면 하구 있었는데 — 모든 것이 퍽두 변했답니다.
 "미려씨가 요새 이 호텔에 묵구 계시는 이유 말이죠."
 "어떻게 아세요."
 "종세군에게서 들었죠. 만해군의 실패와 그간 가정의 형편을 대강 알았습니다."
 "제가 잘못인지 만해가 그릇됐는지 지금 와선 분간할 수 없어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집을 뛰어나와 봤으나 눈에 뜨이는 것이 모두 괴로운 것 뿐이군요."
 은근히 자기들을 의미하는 말인 줄을 알고 일 마는,
 "늦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너무 늦은 까닭에 모든 것이 어긋나구 뒤틀리구만 것입니다."
 "지각을 한 사람의 맘속이 얼마나 쓸쓸한지 아마도 먼저 와 나란히 앉은 사람들에겐 일 바 없을 것예요. 뭇시선이 자기를 조롱하는 것만 같아서 부끄럽구 설구…… "말도 아무릴 수 없게 가슴이 주저앉으면서 몸에서 맥이 빠지는 것이었다.
 "애꿎은 세상일이 언제나 그런 게죠."
 아무리 들어도 일마의 말은 답답하고 범연하고 평온하다. 만족된 사람의 배부른 감상이지 괴로운 하소연은 아니었다. 일마의 심경과 미려의 심경은 오늘 벌써 판이한 성질의 것이었고 그 사이의 거리도 퍽이나 멀었다.
 "애꿎다는 것은 — 제 맘은 이렇게 불행하건만 일마씨의 맘은 그렇게 행복스럽단 말이죠."
 "물론 난 행복에 대해 말하려는 것두, 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만."
 "별이예요. 하늘 위의 별이예요. 쳐다볼수록 점점 멀어져 나중에는 까맣게 높아지는 그 별이예요 — 손을 뻗치나 벌써 손끝에 닿지 않는."
 지껄이다가 문득 좌우를 휘둘러볼 제 두려운 생각이 불현듯이 들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일마와의 사이가 무엇이길래 그렇게 마음의 하소연을 하고 그를 괴롭히는것인가. 법적 수속이 끝나기 전에는 아직도 남의 아내인 몸이다. 아내된 몸으로 일마에게 마음을 고백해서 옳을 리 없으며 그에게 나다분히 싫은 소리를 늘어놀 염치도 없다 — 태도를 반성할 때 지금 추고 있는 춤조차가 두려운 것으로 여겨졌다.
 음악이 끝나자 의자에 주저앉으며 괴롬 속에서나 놓여난 듯도 했다. 남의  춤을 바라보는 편이 한결 편한 노릇이다. 더구나 일마 부부의 춤을 바라보고있노라면 그 아름다운 한 쌍의 모양이 꿈속의 것으로 느껴지면서 더욱 멀어가는 하늘 위 별들이다. 바라보기가 안타깝기는 하나 두려운 생각만은 없어지는 것이었다.
 몸이 불편한 것을 청탁하고 미려는 먼저 홀을 사양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일마와 나아자의 함께 겨른 양이 떨쳐버리려고 해도 고집스럽게 떠오르면서 마음을 괴롭힌다. 떨어지는 별같이 눈앞으로 휙 날아왔다가는 다시 하늘 위로 까맣게 솟아오르곤 한다. 손 앞에 가장 가까이 있는 듯하면 서도 기실 아득하게 멀어서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것이다. 평생 그 별들을 우러러만 보고 지낼 생각을 하니 눈앞이 새까맣게 어두워진다.
 "그릇된 오산이었던가."
 이 며칠 동안의 자기의 행동을 생각해 보나 행동과 오늘의 결과는 별개의 것 이었다, 결과를 계산해서 한 행동이 아니요. 그 행동은 행동으로서 당연한것이었고 오늘의 결과야말로 뜻하지 못했던 의외의 것이었다.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희망과 행복이 아니었다. 앞으로 외롬과 슬픔이 닥쳐올 것을 예 료 하면서 그렇다고 물론 행동을 뉘우치는 것은 아니었으나 막연한 불안에 잠기게 되었다.
 이튿날 오후 울가망한 판에 거리에 산보를 나가려고 아래로 내려갔을 때 복도에서 우연히 일마를 찾아온 종세를 만나 그의 입에서 의외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마치 그 맘을 전하려고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이 긴한 목소리로,
 "만 해군의 소식을 아십니까."
 하고 수군거렸다.
 "왜요, 또 칼부림을 하구 싸웠나요."
 "도망을 쳤답니다 — 상해로 사랑의 줄행랑을 놨어요."
 "네. 상해로 사랑의…… "냉정하려고 하던 미려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랑의 줄행랑이라니요."
 "청매와 손을 잡구 — 말이죠."
 "청매라니 — 기생 말이죠."
 "눈치는 나두 벌써부터 짐작은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감쪽같이 사라질 줄은 몰랐어요. 청매는 사실인즉 내게두 무관한 사람이 아닌데 얼떨떨해 정신이 없는걸요. 거리의 소문 속에 내 이름두 한몫 끼이게 됐으니 이런 망신두 없구요."
 미려는 그 길로 당황히 버리고 나온 집을 찾아가 보았다.
 
 떠날 때의 집 그대로의 속에서 식모가 뛰어나와 아이같이 반기며 미려의 손을 잡았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쓸쓸해 못 견디겠다는 뜻인 듯싶었다.
 "제발 아씨는 더 가지 말아 주세요."
 휑휑한 복도에서 식모는 울 듯이나 낯을 찡그리는 것이었다.
 시절의 의욕 가을은 완전히 거리를 둘러싸고 생활 속에 젖어들고 있었다.
 물든 수목이 아름답고 여자들의 치장이 눈을 끌고 과일가게 앞이 신선한 향기를 풍기게 되었다.
 그 시절의 향기와 빛깔 속에서 사람은 한층 긴장되며 왕성히 쏟는 생활의 의욕을 느꼈다.
 가을은 의욕의 시절인 듯싶었다. 줄기찬 생활에의 의욕이 세포의 구석구석에서 넘쳐 나오는 것이었다.
 뜰 안의 한 포기의 나뭇가지에서도 물론 잎새들이 조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뜻을 일으켜 주고 힘을 복돋아주는 듯 보였다.
 적어도 훈은 그 맑게 개인 오전의 가을 나무를 바라보면서 전신으로 시절의 탄력을 느끼며 솟아오르는 힘을 느꼈다.
 반도영화사 사장실에서였다.
 김명도와 마주앉아 그에게 긴한 부탁을 받으면서 문득 창밖으로 뜰 안의 나뭇가지를 내다보노라니 알지 못할 힘이 솟아오르는 곳이었다.
 영화의 창 작 각본을 써 달라는 청이었다. 그 청을 하기 위해 명도는 일부러 사람을 보내 훈을 초청한 것이었다.
 "……기어이 집필해 주시면 사로서 더한 영광은 없겠습니다."
 거듭 조르는 명도의 간청에 훈도 구미가 동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사례를 물론 예에 어그러지지 않을 정도로 드릴 작정이구요."
 명도는 즐겨서 시작한 영화회사의 일이라 이름이 사장일 뿐이지 계획, 경리, 각반 일을 거의 혼자 손으로 맡아보다시피 하는 처지였다. 원작의 교섭은 물론 사례에 관한 것도 자기 혼자의 뜻과 요량으로 적당히 작정했다.
 "사례가 문제가 아니라 ──""그럼, 더욱 거절하지 마시구 ──""짧은 시간에 생각을 해낼 수 있을까 해서요."
 "가을철을 이용해서 촬영을 마치려는 까닭에 급히 서두는 것인데 촉박은 합니다만 특히 생각을 하셔서."
 훈이 망설이는 것을 명도는 반은 벌써 승낙의 태도임으로 알고 조급히 결  론으로 훈을 내려 씌우려는 것이었다.
 "두 주일 안으로 완성될 것을 믿겠습니다."
 자리를 일어서면서 벌써 용담은 끝났다는 듯이 밖으로 훈을 끄는 것 이었다.
 촬영소는 다른 곳에 둔, 순전히 사무만을 위한 영화사라고는 해도 온 채의 집을 쓰고 있는 이 구석 저 구석에는 배우와 종업원의 그림자도 펀득펀득띄어서 어딘지 없이 화려한 공기가 떠돌고 있다.
 영화사업에만 따르는 그 특유한 공기가 훈에게 일종의 자극을 주는 것 이었다.
 거리에 나와 훈을 그릴로 이끌었다.
 오찬을 시작 하면서,
 ".......터놓구 말씀 드리면 이번 영화를 이렇게 조급히 서두르는데는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닷한 내막도 아니었으나 대단히 비밀인 듯한 어조로,
 "선생두 아시는 여배우 단영의 청이 기어쿠 원작을 선생께서 얻으라는 것 입니다. 간곡한 부탁을 저두 저버릴수 없어서."
 "단영의 청이요."
 초문의 소식에 훈도 귀가 뜨이면서 부탁의 내용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 새겨 보았다.
 "물론 단영 자신이 출연할 것이니까 여주인공의 배역을 완전히 살리는 작품을 희망합니다만."
 "단영의 청이라구요.?"
 또 한번 외어 보면서 단영의 자태를 새삼스럽게 가슴속에 떠올려 보았다.
 "단영 때문에는 사실 있는 애를 태우고 간을 다 녹이면서 여러 해를 바쳐 오는 접니다만 ── 그렇게 어여쁜 노새같이 어거하기 힘든 여자는 처음이예요."
 명도의 아닌 때의 주책없는 하소연이었으나 사실 훈도 그들의 사이를 짐작 하지 못하는 배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훈 자신 단영에게는 마음으로는 타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시 돋친 줄기 위에 한 송이의 야물어진 해당화 ── 그것이 단영의 인상이라고 할까. 열정을 머금은 붉은 꽃은 모진 가시 위에 덩그렇게 올라 앉은 까닭에 사람들은 탐스럽게 우러러볼 뿐 좀해 손을 대지 못 한다. 언덕 위 해당화에게는 그리운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다 속의 산호주다. 푸르게 내다보이는 바다 속에 붉게 잠겨 있는 산호주의 수풀을 자나깨나 꿈꾸는 것  이나 언덕 위와 바다 속과는 거리가 너무도 멀다. 모래밭에서 바 닷 바람을 쏘이고 조수냄새만 맡고 사는 해당화는 슬프기 짝없다. 바람 속에 산호 주의 냄새를 맡으나 걸어가 산호주를 만날 길은 없다. 언덕위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면 언제나 서글프다. 반기며 날아드는 봉접은 많으나 산호주의 꿈에 잠겨 있는 그에게는 하나도 긴한 것이 없다. 가시를 준비해 가지고 막아 내기에는 급급했다. 축들은 좀해 손을 대지 손울 대지 못한다. 야물어진 그한 송이 꽃을 탐스런 것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단영을 싸고도는 뭇 사내들 속에서 가시의 탄식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명도들이었으나 훈도 그 속의 한 사람임은 훈과 단영만이 아는 일 이었다. 퇴폐의 꽃일지는 모르나 퇴폐의 매력에 훈은 누구보다도 끌리는 것 이었다.
 "한 송이 악의 꽃이야."
 하는 동무들의 비판을 들으면서 ── 악의 꽃이므로 더욱 기우는 정을 금 할수 없었다. 악의 아름다움에 대한 애착은 세기가 바뀌어도 여전히 하나의 숨어서 흐르는 정인 모양이다.
 단영이 일마에게 대해서 애태우고 있음을 훈도 잘 안다.
 어떤 때 일 마에게,
 "자네가 평생에 한 번 가지겠다는 굉장한 사랑이라는 게 어떤 것 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사랑의 대상으로 단영의 어디가 부족하단 말인가. 단영은 너무도 붉은 꽃인지는 모르나 그러니까 되려 굉장한 사라의 대상으로 적당하지 않은가."
 걱정도 아니요, 충고도 아닌 이런 말을 던진 일이 있었다.
 "연애는 취미의 문제라고 생각하네. 자네 취미에 맞는 다구 반드시 내 취미에 맞을 게 아니거든, 그렇게 비위에 맞거든 자네나 어서 한몫 대서 보게나."
 일마가 대답하는 것을 훈은 쓸쓸하게 받으면서,
 "내 취미는 내 취미지만 단영의 취미라는 것이 있을 테니깐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든가."
 말하는 것이었다.
 일마는 일상 원하던 굉장한 연애의 표본으론지 만주서 나아자를 데리고 왔다. 단영의 심사가 절망 속에서 얼마나 뒤흔들리고 있을까를 훈도 잘 짐작 할 수 있다. 그의 마음속이 가엾어지면서 ── 그에게 대한 훈 자신의 정이 조금도 줄어지지 않고 여전히 솟는다. 오늘 명도에게서 단영의 뜻을 거쳤다는 각본 부탁의 일건을 듣고 더욱 감회를 금하지 못하던 것이다……  식사를 마치려 할 때 훈들은 같은 그릴 문간에 나타난 단영을 문득 발견 했다.
 훈과 명도가 사장실에 잇을 때 단영도 영화사에 있었던 것이다. 훈들이 나간 후 얼마 있다가 단영도 배우 주손과 함께 거리로 나와 훈들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훈과 명도의 그날의 교섭을 알고서임은 물론이었다.
 명도는 단영을 가까이 불렀다. 반드시 식사를 하러 온 것도 아닌 듯 훈들의 식사가 끝났을 때 단영은 벌써 주손과도 떨어져 훈들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오래간만에 저두 얘기가 있어요."
 둘이 거리를 걸었다.
 "사장은 그만 물러가셔요. 저두 제 부탁을 좀 하게."
 장승같이 머물러 선 명도를 흘겨보면서 단영은 훈과 함께 멀어가는 것 이었다.
 단영의 조금 풀 없는 자태를 훈은 가을의 탓이라고 느끼면서, 물론 그 의 마음의 그림자를 살피지 못하는 배 아니었다. 가을은 의욕의 시절이자 또한 감상의 시절이다. 생활의 건강한 의욕을 느끼는 훈에게도 그날한 줄기 감상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조용한 뒷거리로 들어서자 단영은 핸드백 속에서 담배갑을 집어냈다. 익숙한 솜씨로 권연을 태워 무는 것을 훈이 신기한 것으로 바라보노라니,
 "요새 담배가 부쩍 늘었답니다."
 단영은 생긋 웃으면서 연기를 내뿜는다.
 "여자의 용기가 사내보다 훨씬 웃질인 모양인데 ── 난 벌써 십년째 담배를 배우려는 것이 아직두 옳게 피우지는 못하니."
 훈의 솔직한 고백이다.
 "── 무서운 생각이 나서 흡연을 종시 못하는구료. 객겨서 쓰러질 듯 한 생각이 들군 해서 ── 단영이 나보다 웃질야."
 
 "첨엔 독하고 떫구 쓰더니 차차 구수해지면서 입에 맞게 되었어요. 독이라는 것두 정만 들이면 차차 좋아지는 모양이예요."
 "그놈의 독을 정 들일 수 있어야지."
 하는 훈에게 보라는 듯이 단영은 깊게 연기를 머금고 솔솔 뿜으며,
 "홧김에 담배밖에는 먹을 게 있어야죠. 실상은 맛을 알구 먹는 것두 아닌 모양이에요. 거저 시간을 태워 버리구 뉘엿거리는 속을 가라앉힐라구 대중 없이 푹 푹 피우는 것이죠."
 
 "담배 먹는 이유라는 것두 그렇게 단순치는 않구료. 단영이 담배 먹는 이유 ── 가을의 글줄이나 우러나겠는데."
 "만주서 돌아와서부터 하루에 다섯 갑씩 태우게 되었답니다. 도룡뇽 이 안개를 뿜듯 연기로 온통 몸을 감추어 버리자는 셈이죠."
 "연기가 속 몸을 감춘다 ── 나두 다시 담배나 배워 볼까."
 단영은 반쯤 탄 것을 버리더니 다시 새것을 피워 물었다. 다섯 갑을 태우는 이치가 거기에 있었다. 그렇게 반개씩을 허비해 버리며 손을 쉬지 않는 동안에 다섯 갑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세상에 꼭 한가지의 원하는 물건이 남았을 때, 선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단영의 목소리를 수수께끼같이 들으면서 훈은 얼삥삥했다.
 "잡을 수 없는 언덕 위에 것이든 평생 맘속으로 꿈이나 꾸는 수밖엔 더있수."
 "꿈만으로 사람이 만족할 수 있나요."
 "만족 할수 있구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꿈밖엔 남아진 것이 없으니깐 말요."
 "꿈으로 해결된다면 세상일이 얼마나 편안하구 수월하겠어요. 원하는 물건 이 라면 필경에는 가져 보구 맨져 보구 뜯어 보구 하지 않으면 안타까워서 배길 수 없는 사람의 천성이니 걱정이죠."
 "맨져 보구 뜯어 보구 할 수 없으니 꿈이래두 꾸구 지낸단 말이죠."
 어조를 갈아서,
 "── 가령 그 원하는 것이 사랑일 때 사랑은 한쪽만의 뜻으로 되는 것은 아니니 그때 꿈이라는 건 기막하게 자유로운 행복이거든. 가령 내가 단영을…… "훈의 농에 단영은 비로소 마음을 놓으면서 터 놓고,
 "일 마를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를 생각 중이에요."
 비로소 일마의 이름을 들으면서 마음의 그림자의 초점을 헤쳐 보이는 것 이었다.
 "── 꿈이구 정신이구 제겐 다 소용없어요. 범이 토끼를 잡듯 앙칼진 발톱으로 목을 잡아서 할퀴구 뜯구 시원할 때까지 피를 마시지 않구는 견딜수가 없어요. 숨김없는 욕망이 별것 아닌 이것예요."
 "시원할는지는 몰라두 ── 단영이 그런 어여쁜 범이 될 수 있을까가 문제지."
 "선생께 한 가지 청이 있어요."
 
 단영은 새삼스럽게 아첨하는 태도였다.
 "일마를 마지막으로 꼭 한번 만 만나게 해 주셔요."
 "그게 한 가지 청이란 것요?"
 "저는 이젠 만나주지 않는답니다. 선생께 부탁하는 수밖엔 없어요."
 "만나서 할퀴구 뜯구 하겠단 말이지. 동무를 불쌍한 토끼로 팔아 넘긴다?"
 "대신 선생의 청을 들어 드릴께요. 무엇이든지."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 노릇을 하란 말인데 은전 서른 잎으론 내 맘을 살 수 없어."
 "은전이 싫으면 뭐든지 드린다니깐요…… 제 인생은 어차피 많이 남은 인생은 아니예요. 적당한 때 깨끗하게 살러 버리려구 해요. 일마를 마지막으로 만나겠다는 것이 결코 과한 욕망은 아닐 것 같아요."
 거기까지 실토를 하는 단영의 심중을 훈은 측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단영과 일마 두 사람의 승부에서 이겨서 양양한 일마에게 보다도 가엾은 패자 단영에게 동정이 감은 자연스런 일이다. 일마를 한번 대면 함이 단영에게 그렇게 중대한 뜻을 가지는 것이라면 아무리 친우일지언정 그 의뜻을 한두 번만 휘어서 잠시 단영 앞에 굽히게 함이 그를 리가 없을 듯 싶다. 몇 시간의 희생쯤이 한 사람을 구하는데 그다지 대단한 것이라고는 생각 되지 않았던 것이다.
 훈은 애걸하는 단영에게 선선하게 대답하고 일마를 상대로 두 사람의 비밀의 계약이 그 자리에서 맺어졌다.
 "그럼 저녁에 어김없이 일마를 빼내 올 테니."
 "선생의 힘을 믿겠어요."
 "큰 음모나 꾸미는 것 같아서 맘이 좀 떨리기두 하는구먼 ── 요행 일 마가 내 말이라면 하늘같이 믿는 터이라…… "훈과 헤어진 단영은 반날 동안 혼자 생각에 잠기어 솟아오르는 흥분을 금 할 수 없었다.
 훈이 무심히 던진 음모라던 말이 가슴속을 파고들면서 제 스스로 감격을 일으켜 주는 것이었다. 사실 단영의 마음속에는 훈도 모르는 단영 자신도 집어내 말하기 어려운 한 폭의 숨은 음모가 있었고 계획이 서리어 있었다.
 생각만 해도 율연히 몸이 떨리는 그 계획에 자신 겁을 먹으면서도 냉정히 차근차근 마음을 정리해 갔다.
 "내게 남은 꼭 한 가지 길이다."
 
 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담하고 엄청난 계획이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을 내버리려고 결의한 그의 심경으로는 당연한 귀결일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의 그것 한 가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려도 좋다고 작정했다.
 단영은 원래부터 열정의 노예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품성이다. 열 정의 마지막 꽃을 찬란하게 피워 보고 사라짐이 그에게는 여자로서의 본의였다.
 사랑하는 것은 눈앞에 두고 꿈으로만 지낼 수는 없는 것이다. 가져 보고, 만져 보고, 뜯어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 단영의 이런 신념은 언제나 변할 때가 없었다.
 훈과 약속한 조그만 그 집으로 일찌감치 가서 한 간방에 요리도 분부 해놓고 보이들에게 필요한 말도 일러 놓았다.
 방에 우두커니 앉아 시계를 보며 미심해 하고 있는 동안에 훈이 나타났다. 틀림없이 일마를 동반해 온 것이었다. 신기한 생각이 나서 단영은 벌떡일어나 두 사람 앞에 막아섰다.
 일마는 놀라는 눈치였다. 약속과는 다르다는 듯이 훈을 원망하는 듯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뜻인가. 단둘이 소설 얘긴지, 각본 얘긴지를 하자구 사람을 끌어내더니."
 "내가 좀 있다구 소설 얘긴 못하나요. 왜 그렇게 언제나 눈에 가시 같이만 보여요?"
 단영이 곧 목소리를 누 그리며,
 "만주서 온 후 첨이길래 저녁이나 한 때 드릴까 생각했었죠. 과히 허물 마세요. 부인 생각이 나시더래두 좀 앉으시구. 짧은 인생을 그렇게 칼날같이 엄격하게 저밀 필요가 뭐예요."
 훈이 그 뒤를 받아서 데설데설 노닥거리는 바람에 일마도 하는 수 없이 얼굴빛을 누그리고 자리에 앉는 수밖에는 없었다.
 "끌어내기에 얼마나 고심참담을 했게 ── 홀몸일 적에는 얼마든지 자유로 할 수 있던 동무두 장가만 들면 꼼짝없이 매인 몸이니 ── 세상에 결혼이 무서운 것야."
 훈이 야유하는 듯 일마 대신에 도리어 단영을 보니,
 "나아 자가 만만한 여자가 아니죠 ── 더구나 요새 신혼 기분이래서."
 단영도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 찰거머리같이 사시장철 붙어만 있는 게 부부라면 결혼은 죄수나  노예의 길밖엔 더 되나."
 "날 이렇게 윽박어대자고들 끌구 나온 셈인가."
 일마가 덜 좋아하는 것을 단영은 위로한다는 것이 되로 조롱하는 셈이 되었다.
 "정다운 부부를 보구 샘이 나서 하는 소리죠 ── 그러나 나아자는 저 두 잘 아니 걱정하실 것은 없어요. 나중에 책임을 묻는다면 저두 한몫 나서서 설명 해두 좋으니까요."
 "잘들 노닥거린다 ── 대체 오늘밤 목적이 뭐란 말요."
 일마가 화를 내고 행여나 나가 버릴까를 겁내서 단영은 그의 마음을 잡기에 애쓴다.
 "만주서 너무두 알뜰한 대접을 받았기에 답례를 할까 해서요. 여행담 두들을 겸."
 "단영은 만주 여행을 안하구 왔단 말인가."
 "욕당한 이야기나 할까요. 카바레와 호텔에서 기억이나 하세요. 남을 그렇게 모욕하구두 내 사는 건 내 특권이로라구 늠실거리긴가요."
 "누가 누굴 욕준 셈일꾸. 남의 방에 멀쩡하게 침입하구서두 되로 욕을 받었다구."
 "언제나 그 원수 안 갚나 두구 보죠. 사람들 앞에서 욕주구 울리구 ── 여자 하나의 마음쯤 아무리 무시하구 짓밟어두 좋다구만 생각하는 야만인은 언제나 한번 변을 당하구야 버릇이 떨어져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든가. 내가 복수의 날 얼마나 맘속에 곱아 왔게."
 "에그 무서워라. 원수를 갚겠다구. 어서 얼마든지."
 "장담은 그만둬요. 사람이 장잠만은 안할 것이라나."
 "장담을 할게. 어서 그 맘먹은 복수나 해보라니까."
 "내일 아침에 후회하는 꼴을 누가 다 볼꾸. 그 육신을 땅바닥에 눕히구 엉엉 짖는 꼴을."
 물론 그 말의 내용을 아는 것은 단영 한 사람뿐이었다. 단영의 가슴속에만 묻혀 있는 하나의 비밀이었다.
 일마와 훈은 암팡진 여자의 '농’에 되려 마음이 유쾌해지면서 처음에는 서 름 서름하던 만찬의 자리가 차차 화해가고 즐거워 갔다.
 "술두 쓰다."
 유별스럽게 입에 쓴 그날 밤의 술을 단영이 섬기는 대로 받아서 기울이면서 일마의 꽁하던 마음도 점점 풀려 가는 것이었다.
 "원래 쓴 것이 술인데 사내대장부가 술쯤에 항복을 하구야 내 복수를 받 을 수가 있수?"
 단영이 추스르는 바람에 사실 일마는 없는 주량을 내서까지 입에 대고는 잔을 한 번도 거절하는 법이 없이 들이켰다.
 훈도 일마와 거의 같은 양의 술을 마시게 되었다.
 뉘 알았으랴, 단여의 소위 복수하는 것은 참으로 그 술이었던 것이다.
 유별스럽게 입에 쓴 그날 밤의 술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그다지 술에 약하지 않는 일마와 훈이언만 보통 때의 반도 못되는 주량으로 곤드레만드레 취해 버렸다. 술맛에 취한 것이 아니라 외에 또 그 무엇에도 취했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모르는 결에 정신을 잃고 자리에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깊은 잠에 잠겼다.
 그 모양을 보고 단영은 기뻐도 했거니와 한편 겁을 먹는 것도 사실이었다. 보이를 부르더니 두 사람의 조치를 각각 다르게 분부하는 그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마는 단영의 아파트에 있었다.
 새벽녘이 되어 침대에서 잠이 깨어 자기의 몸이 의외에도 단영의 방에 누워 있음을 깨닫고 일마는 크게 놀랐다. 그렇게 된 간밤의 곡절이 번개 같 이몸을 흐르며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단영과 같은 침대 같은 요 속인 것이다. 옆에 누운 단영의 몸을 밀치며 벌떡 일어나니 벌써 밤은 완전히 밝은 때이다. 창이 환하다. 모르는 결에 허물을 가지게 된 하룻밤은 육체와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새겨 놓고 지금 활짝 새인 것이다. 나른한 몸과 정신이 금시 긴장되면서 날카로운것이 육신의 중추를 찔렸다.
 "간밤에 대체 무엇이 일어났었누."
 단영도 결코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만을 감았을 뿐 말끔한 정신으로 멀뚱거리고 있었다. 일마보다도 먼저 깨어나 잠 안 오는 새벽을 갈피갈피 생각 속에서 곰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마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정신이 좀 드셨어요?"
 따라 일어나 요 속에 발을 뻗고 나란히 앉으려니 탐탁한 일마의 육체 가바로 옆에 앉은 것이 별안간 신선한 욕망을 일으켜 준다.
 몸을 쏠리며 그의 목덜미에 더운 입을 갖다 대려다가,
 "요 어여쁜 악마!"
 
 하고 밀치는 바람에 단영은 거의 침대 밖으로 밀려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비싸게 굴지 말아요. 당신의 몸이 뭘 그리 순결하다구."
 얇은 슈미즈 바람으로 침대 아래로 내려서는 단영의 자태에 일마는 새삼스럽게 부끄럼을 느끼면서 똑바로 그를 바라볼수 없었다. 곧 자기 자신의 자태를 돌아보면서 낯을 붉히고 옷섶을 여미며 부리나케 침대를 내려섰다.
 "나를 그래 어 어떻게 했단 말인구, 이 요물 같으니."
 달려들어 단영의 머리를 벅벅 쥐어뜯고도 싶었으나 ── 이제는 벌써 그것도 무의미할 것 같아서 내의며 양복이며 어지럽게 널려진 옷가지를 주섬주섬 주워 모을 수밖에 없는 일마였다.
 "얼마든지 복수를 하라구 거듭거듭 장담을 하더니 ── 이제 와서 대장부 답지 못하게 싫은 소린 뭐요 ── 그렇다구 한번 새겨진 허물이 벗어질까."
 "복수, 이게 복수란 건가. 괴악한 음모요 죄악이지 이게 복순가."
 "아무러나 내 화나 풀었으면 복수지 칼을 들구 격투를 해야만 맛 이겠수."
 "내가 만약 검사였다면 이 자리로 고발을 하겠다 ── 부정한 술로 사람의 정신을 뽑구, 그 동안에 악을 하다니 훌륭한 범죄야."
 "고발이구 뭐구 해보지. 제단에 올랐던 가엾은 희생의 양이 무얼 큰소릴해요. 그만한걸 다행으로나 여기지 못하구 ── 내 계획이 살로메의 계획이 아니었던 걸 기뻐나 해요. 당신이 요하네가 아니었던 것이 천상의 다행 이었지 내 결머리로 당신의 목인들 못 잘랐을 줄 아우?"
 단영의 살스러운 소리에 사실 일마는 뜨끔해지면서 대꾸도 없이 옷을 분주하게 갈아입는 것이다. 단영의 생사를 가리지 않는 살로메적인 무더운 열정은 일마의 잘 아는 바였다.
 "어서 놀라지나 말아요 ── 계획을 생각한 장본인은 나였든지 몰라 두 침대에서의 의사는 순전히 당신의 것이었음을."
 의외의 한마디에 일마는 옷 입던 손을 휘들휘들 떨면서 금시 얼굴이 화끈 달았다.
 "뭐 뭣이라구. 사람을 농락해 놓구두 되려…… ""그러게 놀라지 말라구 그랬죠. 남녀 중에서 농락한 것이 누군지는 참으로 조물주만이 알 일이예요. 아담이 이브를 꼬였는지 이브가 아담을 꼬였는지 ── 신화만을 믿을 수도 없는 우리가 어찌 안단 말요."
 
 "사람을 속여 놓구두 이제 와서 그런 발뺌을 하려구…… "일 마의 손이 자기도 모르는 결에 달려가 단영의 볼을 갈기고 있었다. 단  영의 말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정말이라면 ── 그 무서운 진실에 소름이 치밀었던 것이다.
 "그렇게 설렐 것이 없어요. 당신두 결국 한 사람의 사내였던 것이구 사내의 뜻아라는 걸 당신을 통해서 똑바로 알았어요. 조금두 황당해 할 것이 아니라 피차이 맘을 곰곰이 반성해 보는 것이 어때요. 사람의 천성이라 구 할까 본능이라구 할까, 그것이 그다지 고귀한 것도 신령스런 것두 아니구 정조라는 건 말하자면 하나의 자세요, 태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당신의 결백이라는 것두 일종의 태였을 뿐인 것을 ── 자기만의 장한 듯 그렇게 남을 모욕 할 것은 없었단 말이요."
 단영의 한마디 한마디가 뼈 속에 잦아들면서 일마는 대답할 바를 몰랐다.
 더 단영의 볼에 손을 댈 수도 없었다. 화는 벌써 단영 한 사람에게 대해서 만 나는 것이 아니었다.
 "술 취한 속에서 사람이 무얼 할지 뉘 아나. 정신을 온통 뽑아 놓구 그 잠꼬대 속에서 한 허수아비의 행동을 가지구 이러쿵저러쿵 시비하는 게 그르지."
 입에 보나 가리운 듯 말소리도 약하고 작다.
 "허수아비의 행동인지 무엇인지는 모르나 난 그 행동 속에 숨은 인간의 천성이라 구 할까, 잠재의식이라구 할까, 그걸 말하는 것에요. 천성과 본능은 많은 사람이 다 같다는 것, 성인두 없구 군자두 없구 코가 하나구 눈이 둘이듯, 다 같은 범상한 지아비와 지어머니라는 것 ── 내가 기뻐하는 건이 발견이예요. 신대륙의 발견 이상의 발견 ── 발견은 만족을 주었어요.
 내겐 벌써 두려운 것도 없구 겁나는 것도 없구 당신에게 대한 우상적 존경두 사라졌어요 ── 그렇다구 물론 당신을 경멸하는 건 아니나 아직두 이렇게 좋아하구 사랑하니까요. 그 뻐기는 것이 얄밉구 아니꼬울 뿐이지."
 일마는 옷을 갈아입고 나서 단영의 말을 한마디 한마디 새겨들으며 가만히 있기가 멋쩍어 즐기지 않는 담배를 붙였다.
 "……결국 책임을 나누자는 셈인가. 일을 저질러 놓구 나서 혼자만 악마가 되기 싫으니까 한 굴레 속에 나마저 잡아넣자구 버둥거리는 모양이지."
 "버둥거리긴 누가. 내게 책임문제가 돌아오면 당신두 꼴 좋겠다. 어디 세상에 공포나 좀 해놀까. 꿀리는 게 누군지 알아보게. 난 조금두 겁날 것이 없어. 겨 묻은 개가 무슨 개를 흉본다더라. 악마니 뭐니 하면서 ── 아직 두 내 앞에서 그 아니꼬운 영웅노릇을 하구 군자노릇을 하구 싶단 말이지."
 맞선대야 밑천조차 찾을 것 같지 않아서 일마는 담뱃불을 죽이고 자리를  일어섰다.
 "아무리 속이 달어 해두 악마는 악마거든. 어여쁜 악마 ── 지금 내 심사가 홍등가에서 하룻밤을 지내구 나가는 폭밖에는 더 되는 줄 아나."
 그 말에서 같이 단영이 모욕을 느낀 적은 없었다. 금시 눈초리가 휘어 오르고 입술이 파랗게 질리는 것이었다.
 "뭐요. 홍등가에서 하룻밤을 새웠다구. 이 멀쩡한 악한 같으니."
 담배갑을 집어던진 것이 일마의 얼굴을 맞히고 떨어졌다.
 "── 그래두 뼈가 살아서. 어디 두고 보자. 내게 항복하구 와서 설설 빌 날이 있잖은가. 비밀의 열쇠가 내 손아귀에 꼭 쥐어졌거든. 이 열쇠만 한번 던지는 날에는 당신의 그 알뜰한 결혼생활두 산산이 조각이 날 것을 각오나 하구 있어요, 큰소리 말구. 나만 더 노엽혀 보지. 괜히."
 위협의 말만이 아니었다. 단영은 자기의 곁머리를 위해서는 사실 무엇을 할지 헤아릴 수 없는 여자이다. 일마는 뜨끔해지면서 이마에 땀이 빠지지 돋았다.
 "어서 나아자 앞에 가서 변명할 말이나 잘 생각해 봐요 ── 별안간 볼일이 있어 시골 내려갔다가 새벽차로 왔다든지, 촌에는 우편소가 없어서 전보를 못 쳤다든지 ── 그럴듯한 거짓말이나 꾸며 봐요. 행여나 나아 자가 짜증을 내구 달아 나왔다간 정말 야단일 테니."
 일마는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 대꾸를 못하며 방문을 나갔다. 흡사 꾸중을 받으며 나가는 아이의 모양이었다. 단영을 설굳혔다가는 사실 큰일이 날것 같아서 양같이 온순한 자태였다.
 일마는 이른 아침의 거리를 걸으면서 떨떨한 입맛을 금할 수 없었다.
 단영의 앞에서 큰소리는 해보았으나 사실 홍등가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나오는 기분은 아니었다. 일마에게는 홍등가에 드나들어 본 경험이 없지 않았다. 그런 때의 그 감격 없는 범상한 기분은 아니었다.
 마음속에 고집스럽게 남는 것이 있었다.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 속에는 알 수 없는 공포도 있었고 부끄럼도 섞였다.
 시렁 위의 한 개의 과일을 훔쳐먹었을 때의 흥분 맞잡이는 되었다. 두렵고 부끄러우나 그 속에는 일종의 숨은 감격이 있었다.
 그 감격이 두렵고 부끄러웠다. 아무에게도 고할 수 없는 부끄럼이 불쾌한 감정을 일으켰다. 입맛이 떱떨하고 쓴 것은 반드시 담배를 피운 맛만도 아니었다.
 
 "누구의 허물이 더 클꾸."
 를 생각할 때 벌써 마음이 괴로웠다.
 단영이 일마의 자유를 유린한 것같이 일마 또한 단영의 자유를 밟아준 셈이 아니던가. 유혹의 시초가 누구였든지 간에 결과에 있어서는 같은 허물을 똑같이 진 두 사람이다. 단영이 일마에게 꿀릴 것이 없듯이 일마 또한 단영을 면책하고 윽박아댈 염치가 없었다. 단영이 도도하게 내섬기던 말이 한마디 한마디 다시 살아 나오면서 떳떳하게 고개를 쳐들 수가 없었다. 같은 허물의 연루자요, 같은 음모의 공모자인 것이지 유독 일마가 단영에게 대해 죄를 물을 것은 아닌 것이다.
 "결국 가엾은 여자다, 단영은."
 측은한 생각이 나며 그런 위험한 모험까지를 해서 원을 채우자는 단영의 심지에 한 줄기 동정이 없지 않았다. 안타까워하는 심사가 밉다느니 보다는 먼저 딱한 것이다. 애걸복걸하는 여자의 열정이라는 것은 남자에는 역시 한 폭의 풍경으로 바라보이는 것이 아닐까. 풍경은 언제나 마음을 위로해 주는것이다.
 그러나 이런 동정이 일마에게는 번민을 더해 주는 결과가 될 뿐이었다.
 단영을 동정하니 더 어쩌자는 것인가. 동정은 동정으로 해놓고 허물은 허물대로 남는 것이다. 동정으로 말미암아 허물이 지워질 리는 만무하다. 허물에서 오는 번민은 단영에게 대해서보다도 더 많이 나아자에 대해서 솟았다.
 단영에게 대한 마음의 해결은 그것으로서 지웠다고 해도 아내 나아 자에게 대해 서는 무엇으로서 그 지울 수 없는 허물을 바로잡자는 것일까. 눈앞이 어두워지고 다리가 떨렸다.
 사실 호텔에 이르러 먼저 목욕실에 들어가 몸을 씻고 정신을 맑히고 방에 들어갔을 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는 나아자를 보고는 선뜻 말이 나가지 않았다.
 나아자는 밤새도록 잠 한숨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눈이 붉고 얼굴이 하룻밤 사이에 홀쭉 빠진 것도 같다. 그 역 그 자리에서 얼른 말이 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호텔을 나간 길로 별안간 급함 일이 생겨 동무와 함께 저녁차로 시골을 다녀온 것요."
 거짓말을 하면서 일마는 속이 무시무시했다.
 "── 내년 봄쯤 교외에 집을 지을까 해서 땅을 좀 살려구 거간이 꼭 어제 래야 틈이 있다구 해서 부랴부랴 떠났던 것인데."
 거짓말은 뒤를 이어 차레차례로 새로운 거짓말을 낳았다. 내 섬기면서도  일 마는 자기의 재주에 놀랐다. 한편 단영이 거짓말의 지혜까지를 뙤어 주던것이 뼈저리게 생각났다.
 "── 촌이래서 밤중에 전보나 칠 수 있단 말요? 놀랄 줄은 알았으나 하는 수 없이 시침을 떼는 수박에는 없었소."
 때를 따라 거짓말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거짓말이 아니었더라면 그 당장을 어떻게 모면했을 것인가.
 "땅이 나보다두 더 소중한가요?"
 "노여 마시오. 두 사람의 집을 지을 땅이 아니오?"
 달려들어 안으니 나아자도 거역은 하지 않았으나 그것으로서 전부가 해결 된 것은 아니다. 일마는 저지른 결과가 얼마나 큰가를 새삼스럽게 느끼며 몸이 떨렸다.
 괴로워하는 것은 일마뿐이 아니었다. 단영도 저지른 일의 결과가 결코 소홀한 것이 아님을 점점 깨달으며 마음이 무거워 갔다. 당장에서는 통쾌해서 일 마의 앞에서 싫은 소리도 해보고 큰소리도 쳐보았으나 혼자 곰곰이 생각 할 때 반드시 통쾌한 것만도 아니면서 서글픈 생각이 들며 마음이 침울해 갔다.
 그렇게 원하던 것을 삽시간에 가져 버렸다. 그런 수단으로밖에는 일 마의 뜻을 휘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휘인 뜻의 결과로 남은 것 이 무엇이던 가. 그 인색한 기쁨에서 얻은 만족이 대체 얼마나한 것이었던가.
 정신은 놓치고 육체만 잠시 얻었다고 그 만족이 그다지 달가운 것은 못 되었다. 차라리 육체를 놓치더라도 정신을 얻었던들 더 보람 있지 않았을까. 가져 버린 후의 일시의 육체의 감동이라는 것이 참으로 보잘것없고 뜻없는 것임을 실감으로 깨달으면서 단영은 마음이 서글프기만 했다.
 처음부터 각오는 했던 일이나 질서를 깨트리고 악으로 악을 산 것이 더욱 마음을 괴롭혔다. 일마에게 대해서 큰소리는커녕 부끄럽기 짝없다. 다시 또그와 면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일마뿐이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해서 부끄럽다. 낮을 쳐들고 걸어다닐 수도 없을 것이다.
 "악마에게두 후회라는 것이 있나."
 자신을 비웃어 보며 마음을 다져는 보나 그럴수록에 반성은 더욱 맵고 차게 가슴을 매질했다.
 그날 하루 아파트에 박혀 가지가지 생각에 곰싯거리며 해결 없는 마음의 방황을 한 것이다. 다음날 또 하루 거리에 나갈 기력이 없었다.
 잠옷바람으로 침대에 누웠다 일어났다 하며 차를 달이고 레코드를 걸고하는 것이 종일의 일이었다.
 
 저녁때는 되어서 찾아온 것이 훈이었다.
 "학질이 걸렸나. 꼼짝 안하구 들어만 있게."
 학질이란 말이 지금의 꼴을 똑 들어 맞춘 것 같아서 단영은 뜨끔하면 서손이 얼굴로 갔다. 얼굴에 그 무슨 표정이라도 났을 것 같다. 휘줄한 자기 꼴이 새삼스럽게 돌려다 보이면서 ── 겸연한 마음을 버리고 될 수 있는대로 범연하고 대담하게 굴려고 애썼다.
 "정말 학질이래두 걸린 것 같아요. 골이 뜨끈뜨끈한 게."
 "학질을 뗐어야 할 것이 학질에 걸리다니."
 조롱하는 훈도 피곤해 보인다. 아마도 쓴 술에 톡톡히 혼이 난 모양이다.
 "목표만을 노리지 남자까지를 골릴 필요야 있었나. 난 대체 무슨 꼴 인구. 함정 속에 함께 끌려들어간 토끼두 아니구."
 "노여워 마세요. 그만한 희생쯤."
 단영은 미안한 듯 훈의 앞으로 나서며,
 "교환 조건으로 계약하구 하룻밤 동안의 희생을 산 것이니 대상을 반드시 갚아 드릴 테예요."
 "무슨 대상으로 갚잔 말인구. 몸 피곤한 것쯤이 문젠가. 상한 내 비위를 무엇으로 바로잡으려구."
 "내가 일마를 원했듯 당신은 날 원하지 않았어요? 일마를 내 희생으로 바쳐 주었듯 어서 날 희생으로 하란 말예요. 얼마든지 당신의 뜻대로 하세요."
 온전히 한 몸을 맡긴다는 듯 훈에게로 쏠리며 몸을 던지다시피 한다.
 "자, 난 지금 당신 앞에 바쳐진 양이에요. 어서 뜻대로…… "두 팔을 훈의 목에 던지고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었을 때, 훈이 날쌔게몸을 피한 까닭에 단영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사람이 이렇게두 타락했었나. 자랑을 잃었나. 난 단영의 맘을 얻고 저 한 것이지 이렇게 희생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오."
 "내가 맘을 바친다면 어떡하시겠어요."
 "자랑을 잃은 여자를 난 사랑할 수 없수. 교만하고 도도할 때의 단영을 사랑한 것이지 이제 이 타락한 꼴을 누가…… "그 한마디가 단영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다. 자기가 일마에게 느끼는 것을 훈이 지금 그대로 말해준 셈이다. 참으로 마음을 얻지 못하고는 사랑은 뜻 없는 것이었다.
 뮤우스의 선물  시절의 선물로서 하얼빈교향악단의 공연같이 거리에 자자한 파문을 일으킨것은 없었다. 신문의 선전이 야단스럽고 골목 골목에는 포스터가 찬란하게 나부꼈다. 사람들은 포스터 앞에 서서 그 가을의 선물에 신선한 구미를 북 돋우고 있었다.
 찻집에서들 만나면 공연의 곡목을 앞에 놓고 어중이떠중이 비판과 이야기에 정신이 없었다.
 "일마의 공이 적지 않어. 서울에 교향악단이 다 오게 됐으니."
 "일마의 공두 공이지만, 시민 전반의 교양이 높아졌다는 좌증이 아닌가."
 "아무렴, 서울이 어떤 문화도시게. 동경 다음엔 가리. 이런 때 일마의 맡은 일이 중요하단 말야."
 "곡목에 이의가 있네. 누가 좋아한다구 베토벤은 이렇게 많이 넣었을까.
 사람의 혼을 온통 뽑을 작정이래두 베토벤에 속을 사람은 없거든."
 "오라, 자넨 모차르트를 좋아했겠다. 베토벤 반대일젠."
 "암, 세상에 모차르트 이상 가는 음악가가 있겠나. 모차르트와 슈베르트, 그리고 쇼팽 ── 음악가치구야 그들이 제일이지. 베토벤은 미치광이야. 음악가 다운 음악가는 아니야."
 "그건 자네 취미, 그런 경솔한 판단을 내리다간 땅속의 베토벤에게 꾸중을 당하리. 어서 주제넘은 소리 말구 공연이나 들어보구 말하세 그려."
 남을 비판할 때의 사람은 항상 자기의 교양이 본위요 제일이다. 아무리 위대한 고전을 가져와도 자기 비위에 비치워 암팡지고 대담한 비판을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또한 즐거운 개인의 자유이기도 한다. 하기는 이것도 이 곳의 음악 교양의 전반적 향상의 증거라면 반가운 일이 아닌 것도 아니다.
 공연이 성황을 이룬 것이 반드시 향상의 예증은 아닐는지 몰라도 첫날 밤 공연의 성황은 사실 특기할만한 초유의 것이었다. 수천의 음악의 팬들이 회장 안에 그득히 모여들어 거리의 교양의 정도를 그 외래의 단체에게 보였 음은 통쾌한 일이었다. 원래의 그들의 수고를 위로하는 방법으로 그에 미치는것이 없었다. 만당의 갈채가 일단을 더없이 기쁘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일마와의 사건이 있고 훈과의 갈등을 가지게 된 단영은 그 후 여러 날 동안이나 겸연한 마음에 두문불출 아파트에만 박혀 있다가 오래간만에 거리로 나온 것이 마침 공연의 첫날밤이었다.
 사실은 명도가 여러 날 째 찾아와서 단영의 잠잠한 자태를 보고 영문을 몰라 궁금히 생각하던 중 그날도 음악회의 초대권을 준비해 가지고 일찍부터 찾아왔던 것이었다. 단영의 심사로는 벌서 명도의 앞에서도 부끄러운 생각  이 나서 그와의 동행을 주저한 것이나 강잉한 청에 마지못해 함께 나온 것이다.
 일마와의 비밀을 가지기 전에는 명도에게 대해서 대담하고 뜻대로 행동 하던 단영도 오늘에는 풀이 없고 기가 죽어서 별반 거역이 없이 그의 말대로 쫓았다.
 회장의 화려한 공기는 단영에게는 지나쳐 현옥한 것이었다. 수천의 얼굴들 속에는 물론 자기를 아는 얼굴도 많았던 것이며 그들이 모두 자기한 몸의 비밀을 눈치채고나 있는 듯이 보여서 단영은 저린 제 발에 얼굴도 의젓이 쳐 들지 못했다. 많은 시선이 오고가는 속에 명도와 짝지어 않은 것부터가 유쾌한 일은 아닌데다가 자기를 알아보고 찬찬히 살피는 시선 앞에서는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미 군중 속에 나타났다는 것이 뭇사람의 눈에 띠자는 뜻이 아니었던가. 응당 일마를 만나게 되었고 이층 방 한구석에서 훈을 발견하고 또다른 좌석에서 미려와 혜주의 일행을 찾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일마는 그날 밤 공연에 관계되는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아래층 앞자리에 나아자와 나란히 앉아 무대 위 단원의 연주를 열심히 바라보는 것 이었다.
 무대 위에서는 검게 단장한 수십 명의 단원이 밝은 등불을 받고 그 무슨 신령스런 일단 같이도 보인다. 신령스럽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이 각각 가진 악기들이 조화되어서 영감의 음률로서 참으로 신령스런 감동을 자아내게 했다. 지휘자의 손짓 하나로 영혼의 목소리가 무수한 악기에서 새어나와 조화 되었다. 고전작가의 명곡들이 그들의 손에 의해서 후대에 다시 살아나 감동을 전달하려는 것이었다.
 무대만을 바라보며 물을 뿌린 듯이 고요한 장내에 베토벤의 「운명」의 선율이 우렁차게 고요하게 흘러왔다. 음악은 실생활의 감동을 전달하는 것 일까. 사람들은 「운명」의 암시에 혼을 뽑히운 듯 조용한 속에서 감동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운명의 문은 열렸다 닫혔다 하면서 사람의 뜻대로는 휘 일수 없는 것이었다. 그 무서운 의지에 농간을 당해 사람들은 다만 웃고 울고 할 뿐이다. 수천의 청중은 「운명」의 곡조에서 자신의 운명을 반성하며 울고 혹은 웃으러 온 셈이다. 곡조를 따라 웃지 않는 사람, 울지 않는 사람이 누구 였으랴, 사람의 운명은 거개가 이 두 가지 요소 위에 섰는 것이다.
 제이악장의 고요한 울음이 끝났을 때, 단영도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었다.
 삼악장, 사악장까지를 울가망한 심사로 듣고 났을 때 알 수 없는 피곤이 전신을 엄습하며 현기증을 느꼈다. 아직도 제일부의 연주가 채 끝나지 않았건  만 명도를 그대로 앉힌 채 단영은 잠시 자리를 떴다.
 그러나 운명에 우는 사람은 단영만은 아닌 듯 그가 사람 속을 헤치고 휴게실로 나왔을 때 막 앞에서 나온 것이 미려와 혜주가 아니었던가. 그들 역 피곤한 마음에 잠시 자리를 일어선 모양이었다.
 단영은 웬일인지 그들에게 그 자리로 동감을 느끼며 가까이 갔다. 외에 별로 사람들이 없는 휴게실은 외딴 것같이 고요하다. 단영은 물론 미려와 면목도 있었으나 같은 음악의 같은 감동 속에 잠기고 있는 그 당장에서는 더욱 친밀한 동무가 아닐 수 없다. 친밀한 태도로 미려의 앞에 자리를 잡은것이 극히 자연스럽게 보였다.
 "운명의 맛이 지독하죠. 사람의 혼을 제멋대로 뒤흔들어 놓는 것이 무서운 심술쟁인가 봐요."
 단영의 말에 미려도 그를 주의해 보면서 익숙한 낯을 지었다.
 "운명에 쫓겨 나오셨수. 운명에 거리면 대담하고 용감한 사람이 없는 모양이지. 당신 같은 분이 다 하소연을 할 젠."
 "내가 그렇게두 용감해 보이나요. 내 생각으론 제일 약한 사람만 같은데."
 말하면서도 단영은 사실 자기가 약한지 강한지를 헤아릴 수 없었다. 몰염치와 만용으로 물과 불을 헤아리지 않고 부딪쳐감이 참으로 강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런 행동 다음에 오는 실망과 번민은 대체 무엇인가. 단영은 자신을 도저히 강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용감하잖구 뭐요. 자기 뜻을 세우구, 거기에 휘어 오도록 세상사를 정복 하려는 것이 강한 것이 아니고 무어요."
 미려의 말을 무슨 뜻인고 하고 단영은 그를 찬찬히 바라보기가 문득,
 "무대 앞에 일마를 보셨어요?"
 하고 말머리를 돌려보았다.
 "나아자와 나란히 앉아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스럽다는 듯 보이지 않아요?"
 왜 하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소리를 꺼내는구 하고 혜주가 단영을 노려보는 동안에 미려도 들은 척 만 척 수심에 겨운 눈으로 딴전을 보았다.
 "세상에 한 사람의 운명의 총아가 있다면 그건 일마에요. 제일 행복스럽고 굳센 것도 그이죠. 자기의 행복 때문에 몇 사람의 희생이 생겨두 그건 알바 아니거든요."
 "일마 얘긴 왜 자꾸 해요."
 미려는 견딜 수 없어 확실히 싫은 낯으로 단영을 보았다. 무슨 얄궂은 심  술 인구 하고 야속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일마를 미워하지두 못하구 멸시 하지두 못하는 처지가 되려 측은한것이 아닌가 해요."
 단영은 대체 일마에게 대한 자기 자신의 감정을 하소연함인지 미려의 마음속을 추측해서 말함인지 미려는 그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미워는 하지만 그가 불행하게 되기를 빌지 목하는 마음 말이죠."
 혜주는 단영의 수다스러움을 찬을 수 없는 듯 자리를 일어섰다.
 "일마가 오늘밤 음악회에 무슨 상관이게 자꾸 일마 말만 한단 말요."
 단영을 책망하는 듯 말함은 곧 미려를 동정함이었으나 미려는 혜주를 뒤따라 일어서지는 않으며.
 "전 좀 더 앉아 있겠어요."
 하고 혜주에게 먼저 가기를 권하는 것이었다.
 혜주가 한 걸음 먼저 자리로 돌아간 후 미려는 단영과 단둘이 마주앉게 되었다. 단영에게는 할말이 많이 있을 듯 짐작되며 그것이 미려에게는 은근 히 듣고도 싶었다.
 단영이 일마에게 마음을 홀짝 기울이고 그의 뒤를 따라 만주까지 쫒아 갔던 것은 미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단영의 마음은 미려자 신의 마음과 똑같은 처지에 있다. 다만 미려보다 단영이 한층 적극적 이요, 대담하게 뜻을 나타내고 행동할 뿐이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 끼리 라면 피차에 회포도 깊을 것이요, 할말도 많을 것이다. 미려는 그날의 단영을 귀치않기는커녕 전에 없이 긴하게 여겼다.
 "차래두 청할까요."
 단영은 좀더 자리를 갈아볼까 해서 휴게실 옆 찻방을 바라보면서 자리를 일어섰다. 미려도 거역 없이 선선히 뒤를 따랐다.
 찻잔을 앞에 놓고 조용한 자리에 둘이 앉았으려니 음악회에 온 것이 아니라 흡사 그렇게 이야기할 기회를 타서 온 것 같은 느낌이 났다. 두 사람에게는 실없이 비싼 음악회였고 음악회로서 보면 두 사람은 가장 게으른 청중 이었다.
 "…… 사람을 사랑하는 법이 사람마다 각각 다르겠지만 어떻게 하면 가장 만족스러울지 ──"벌써 꺼릴 것이 없이 미려는 단영의 말을 순순히 받았다.
 "이편만의 짝사랑이라면 만족하구 안할 게 있수. 만족 이전의 더 큰 문제두 해결 못했는데."
 두 사람의 대상이 같은 한 사람임은 이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굳이 일  마의 이름을 집어내 말할 것도 없었다.
 "생각해선 안될 것을 생각하는 건 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요새 자꾸만."
 "난 생각이 다른데요."
 단영은 즉시 반박하면서 대담하게 의견을 말한다.
 "생각해선 안될 것이라면 세상에 그런 것이 얼마나 많게요. 세상은 그렇게까지 옹색한 곳은 아닐 법해요. 생각하구 안 하는 건 각자의 마음의 자유 일 것이구 맘속으로 생각한댔자 그것이 죄 될 것이야 없죠. 미려씨야 요 만큼두 죄진 것이 없으리라 생각해요."
 그럼 자기 자산은 죄를 지었단 말인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미려는 단영의 입만을 주의했다.
 "난 미려씨같이 그렇게 맘속으로 꿈만을 굴 수는 없는 천성이에요. 맘 먹은 것은 꼭 행동으로 옮겨야만 시원하지 신선같이 꿈만 먹군 배가 부르지 않거든요."
 "그래 어 어떻게 꿈을 행동으로 옮겼단 말요?"
 단영의 심상치 않은 말투에 미려는 황당하게 반문한다.
 "놀라지 말아요 ── 일마를 휘어 버렸죠. 손안에 넣구 맘대로 휘 둘러보았죠."
 "뭐 뭐요. 휘둘르다니."
 청천의 벽력이나 본 듯 미려는 미상불 놀라서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지내구 보니 다 헛것이에요. 정복을 했다구만 생각한 건 내 불찰. 되려 정복을 당하구 보기 좋게 넘어진 셈이요……역시 행동보다는 꿈이 나은 모양이에요. 꿈만 꾸구 있었던들 이런 환멸을 느끼지 않았을걸."
 단영의 말에 미려는 두 번째 놀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미려는 단영을 노리나 단영은 대담하고 범 연 한 태도이다.
 "거짓말인가 하시죠. 너무도 놀라운 사실이실 테니까요. 그러나 내겐 아주 범상한 사실이 됐어요."
 미려는 행여나 실성해 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여 단영이 점점 무서운 존재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구 싶은 건 결국 뒤에 남은 결과 말인데 ── 절망이 되려 그것을 가지기 전보다 더 크다는 것이에요. 차라리 그대로 곱게 지냈던들 이렇게까지 괴롭지 않았을걸. 모든 것을 알아 버린 때의 실망, 그게 얼마나 큰지는 지금 나밖엔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요. 미려씨는 그렇게 어느 때까지  나 곱게 꿈이나 꾸세요. 그 이상 것을 바라지 말구."
 "당신은 내게 무서운 것을 들려주었소."
 미려는 새삼스럽게 몸서리를 치면서 단영에게 시선을 옮겨 버렸다.
 "── 사람이 그렇게까지 모든 것을 깨트리고 멋대로 할수 있단 말요.
 인생은 아직두 그처럼 관대하단 말이지. 아, 무서워 괜히 쓸데없는 말을 내게 전했지. 비밀은 비밀대로 묻어 두지 못하구 왜 무슨 요량으로 그걸 내게말 했단 말요. 진저리가 나라."
 "내가 미워졌죠. 무서워졌죠. 그리구 일마가 싫어졌죠."
 단영의 말이 끝나기 전에 미려는 절레절레 흔들며,
 "싫어지구 말구. 모두가 싫어졌수. 추잡하구 불결하구 하나두 사람 같진 않구료."
 사실 눈앞에 단영은 벌써 사람의 겉가죽을 쓴 짐승같이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질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요, 온전히 결백성에서 오는 느낌이었다. 일마 또한 전의 꿈의 대상은 어니고 평범한 범부로 어리우는 것 이었다. 추잡하고 비루한 사내라는 안타까운 결론이 서글프게 마음을 찔렸다.
 "그러게 내가 좋은 일을 한 셈이죠. 일마에게 대한 경멸감을 일으켜 준것만 해두 내 공이 얼마나 커요. 일마에게 대한 꿈조차 사라졌다면 내가 미려씨 한 사람을 구한 셈이 아닌가요. 괴롬 속에서 동무 한 사람만 구해낸 양으로 그런 행동을 하구 지금 그걸 전한 것이라구만 생각하시죠."
 미려는 마음이 아팠다. 일마에게 대해 환멸을 느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참으로 그를 미워할 수 있었던가. 단영의 뜻밖의 말은 겹겹으로 괴롬만을 가져왔다.
 "당신은 꼭 악마만 같구료."
 "어서 일마마저 그렇게 여겨요. 그럼 맘이 한결 시원할 테니요."
 단영의 납신거리는 엇이 불유쾌해서 견딜 수 없을 때 두 사람 앞에 성큼 나타난 것이 명도였다. 단영을 기다리다 못해 자리를 일어나 찾아 나온 것 이었다.
 "웬일이요. 음악회가 거진 끝나려는데 딴 곳에서 놀구만 있으니 그렇게 허 름한 음악회란 말요."
 명도의 이야기가 더 길게 벌어만 질 것 같아서 단영은 자리를 일어섰다.
 "아예 날 원망하진 마세요 오늘 내 말이 참으로 고맙게 여겨질 때가 있을테니요. 그럼 먼저 실례해요."
 단영이 명도와 함께 나간 후, 미려는 잠시 혼몽한 속에서 혼자 자리에 앉아 있었다. 누구를 원망했으면 좋았을꼬 ── 그날의 운명을 저주하는 수 밖 에는 없었다.
 연주회는 마침 제일부가 끝나고 휴게가 시작된 때였다. 잠시 자리를 일어서서 휴게실로 나오는 사람, 그대로 머뭇거리는 사람으로 장내는 어지러웠다.
 종세, 훈, 능보 새 사람의 한패가 막 휴게실로 나올 때 훌쩍 스쳐 들어가는 여인 보고,
 "미려가 아닌가."
 세 사람은 금시에 알아맞혔다.
 "남편은 상해로 달아난 후 종무소식, 이혼수속끼지 마치구 인젠 완전한 자유인 이긴 하나 몸이 뇌이니 생각하던 일마가 저 꼴이라, 세상은 뜻대로 돼야 말이지. 일마 부부의 꼴이 얼마나 여인의 가슴을 찌를꾸. 즐거운 음악회를 되려 괴롭게 여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구. 사람 일 너무도 복잡해."
 제이부로 들어갔을 때 첫 곡목으로 차이코프스키의 「호도인형」의 연주가 시작 되었다. 악장마다 북국의 정서가 가장 짙게 나타난 곡조이다. 단원의 태반에게는 그 자기들 조국의 곡조가 더욱 적절한 정을 일으킬 것은 사실, 연주는 어느 때보다도 즐겁게 시작되었다. 침착하고 혹은 가벼운 선율이 다른 어느 곡조와도 구별되는 선명한 인상을 주었다.
 음악은 말하자면 하나의 발병이다. 한 구절 한 구절의 멜로디와 화음은 현실 속에 지천으로 흩어져 있는 음성과는 성질이 다르다. 음악은 자연의 음성이 아니다. 자연의 음성이 아무리 아름답고 묘하다 하더라도 한 토막의 음악을 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음악은 꾸며진 감동이요, 영감의 발명이다.
 아무데서도 들을 수 없는 유쾌한 음성의 배열이 자연이 주는 기쁨이상 몇 곱절의 기쁨을 준다. 장내는 물을 뿌린 듯이 조용하고 청중은 감동 속에 젖어 있었다. 차이코프스키의 혼이 사람들 가슴속에 살아나 있는 셈이었다.
 음악 속에 잠겨 있는 일마와 나아자의 마음 역시 모인 수천 사람과 똑같은 순간의 감정 속에 있었다. 같은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 한빛으로 칠해진다. 푸른 물속에 잠기면 다 함께 푸르게 물드는 것과도 흡사하다. 일마들도 푸른 물에 물든 눈으로 한결같이 무대 위만을 바라보는 것 이었다.
 단원들은 모두가 나아자의 고향 사람들이라 중에는 눈익은 사람도 많았다.
 피차 하얼빈에 수십 년을 살면서 거리에서 그 어느 곳에서 서로 눈에 띠었고 바라보았던 사람들이다. 그 면목이 있는 사람들의 연주를 먼 외지에 나와서 들으려니 나아자에게는 누구보다도 다른 또 한 가지의 감회가 솟았다.
 특히 그 속에는 나아자가 친하게 지냈던 동무 이봐놉이 있었던 것이다. 그 에게로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쉴새없이 일마의 귀에 수군덕거리며 남편의 동감을 구하려던 것이었다.
 "어때요. 제법 잘 어울리지 않아요? 실수나 하지 않을까 해서 지금 맘이 조밀조밀해요."
 이봐놉은 첼로 뒤에 숨기다시피 하고 앉아서 긴 활을 느릿느릿 그었다. 사실 그 주체스런 꼴을 보면 실수나 하지 않을까 해서 걱정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어디인지 부실하고 맥이 없어 보인다.
 "첼로는 원래 느린 악기니까."
 말하고, 일마는 침착한 음조와 이봐놉의 늦조인 품성의 일치를 느끼면서 신기한 발견이나 한 듯 유쾌했다.
 "이봐놉군이 첼로를 하는 줄은 꿈에두 몰랐구료."
 "저두 그가 이렇게 일행을 좇아 나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넓은 하얼빈에는 음악가두 어찌나 많은지 이봐놉쯤은 음악으론 도저히 밥두 먹을 수 없어 쩔쩔매던 판인데 어쩌다 한몫 뛰어들었는지 일행이 도착하는 날 얼마나 놀랐는지요."
 이봐놉은 별사람 아니라 일마가 하얼빈에 머무르고 있을 때 나아자와 함께 묘지에 갔다 우연히 만나게 되었던 바로 그 이봐놉이었던 것이다. 가을 임에도 얇은 여름 양복의 허줄한 꼴로 일마의 주의를 끌었을 뿐 아니라 한 조각의 감상조차 일으키게 했던 바로 그였다.
 음악가론 밥을 먹기는커녕 낡은 자동차라도 한 대 얻었으면 택시 운전 수로 입에 풀칠이나 하련만 그것도 못해서 쩔쩔맨다는 사정을 나아자의 입을 통해서 들었던 그가 그렇게 단원 속에 한몫 끼어 연주여행을 나오게 될 줄은 일 마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아자보다도 되려 놀람이 더 컸던 것이다.
 "부디 이번 연주에 성공해서 이봐놉에게두 행복이 돌아가기를 비는 바요.
 모처럼 나왔던 길에 생애의 길이나 옳게 잡았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그 부실하고 허절한 꼴을 보고는 사실 충심으로 동정이 갔다.
 "성공하겠죠. 이번 길을 나온 그들에게 주위 뜻이 왜 냉정하겠어요."
 나아자는 확실히 고향 생각에 잠겨 있는 모양이었다. 이봐놉들의 성공을 비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두터운 것이 아니었던가.
 연주회가 끝났을 때, 청중의 대부분이 물밀듯 문이 메이기 한바탕 쏟아져 나간 후에 남은 한패는 연주자들의 모양을 보고 돌아가려고 문간에 어릿 거리고 들 있었다.
 무대 뒷방에서는 주최자측인 현대일보 사장 이하 관계자 여러 사람들아 단  원들의 수고를 치하하러 밀려 있고, 텅 비인 장내에는 아직도 파도같은 갈채의 반향이 남아 있는 듯도 했다. 무대 뒤에는 무수한 화환과 생화의 꽃다발이 찬란하게 널려 그것이 뒷방으로까지 연했다. 연주회로서는 전무의 성황 이었고 더없는 성공이었다. 악단과 시민에게 다함께 기쁜 일이었다.
 주최자측의 치하에 단원들은 피곤한 속에서도 만면 기쁨으로 대답 하면서 누구들보다도 당야의 성과를 반가웠다.
 주최자측도 아니요, 그렇다고 단원도 아닌 얼삥삥한 존재가 일마와 나아 자였다. 즉 주최자측에서도 감사의 말을 받고 단원들에게서도 반갑다는 말을 들으면서 일마는 모든 것이 자기의 공으로만 돌려지는 것이 낮이 달고 얼삥삥 했다. 나아자는 솔직히 말을 받을 때마다 웃음의 표정을 지니면서 응대에 바쁠 지경이었다.
 수다스럽고 어지러운 그런 한바탕의 절차가 지난 후 일행은 방안에 치울것을 치워 놓고 문간으로 나갈 때 어릿거리고 섰던 사람들은 가까이 줄레줄레 모여들었다. 그 속에는 훈과 능보도 섞여 있었고, 멀리 떨어져 단영과 명도의 짝도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미려의 자태만은 물론 보이지 않았다. 단영에게서 놀라운 소식을 듣고 그는 요란히 수물거리는 마음을 도무지 걷잡을 수 없어 자리에 잠깐 앉았다가 곧 일어나 횅하니 집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단영만이 올차게 끝날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
 훈과 능보는 일마에게 한마디 연주의 비판이나 들려줄까 한 것이 그렇게 수선스런 속에서는 그에게도 달려가기도 쑥스러워 우두커니 한구석에 서 있는 동안에 일행은 차례차례로 등대하고 서 있는 자동차에 앉은 것이었다.
 일마도 같은 호텔이라 맨 뒤차에 부부가 나란히 하고는 늘어선 군중을 내버리고 호텔로 내닫는 것이었다. 버림을 받은 군중은 그 일렬의 긴 자동차의 행렬을 멀끔히들 바라보는 것이었으나 중에서도 일마부부의 인상이 가장 신선하게 눈속에들 남았다. 특히 단영에게는 누구에게보다도 그들의 자태 가유 달리 인상적이고 마음을 부질없게 들쑤셨다.
 "아니꼽게 나 좀 보라는 듯이."
 꼴사납다는 듯이 단영은 그들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발을 돌리면서 기실 속으로는 긴 한숨을 뽑았다.
 "바람이나 쏘이구 갈까."
 하는 명도의 청도 거절하고 혼자 저벅저벅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렇게 한눈 안 팔고 곱게 돌아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맥없이 침대에 풀썩 주저앉으니,
 "미려에게는 쓸데없는 소릴 괜히 ──" 하는 뉘우침이 솟았다. 아무리 되풀이해 보아도 그날 밤 일이 경솔하게만 생각 되었다.
 "결국 효과가 무엇이란 말인가. 내 자랑을 한 셈인가. 그의 길을 바로 잡자구 한 셈인가. 허나 내 맘은 지금 이렇게 구역질만 나구 미려 또한 괴로워하게만 되지 않았는가. 괜히 긴한 척 쓸데없는 짓을 하구 쓸데없는 말을 피운 것이다. 나조차 점점 이렇게 괴로워지니…… "같은 때 미려도 자리에 일찌감치 누워서 괴로운 마음에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남편이 상해로 실종한 후로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식모와 단 둘만의 호젓한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려준 단영이 나쁜 것두 아니구 일마가 그른 것두 아니구 내 맘이 원수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달아나는 이 맘을 잡을 수 있을꾸. 무슨 굴레를 가져오면 이 맘을 잡아 씌울 수 있을꾸."
 전등불이 눈에 빤히 비취면서 바시랑바시랑 도무지 잠이 들지 않는다.
 호텔로 돌아온 일행들은 각자의 방으로 곧들은 안 올라가고 아래편 객실에서 잠깐 쉬며 잡담에 잠겼다.
 나아자는 서울길이 하루하루 익은지라 그들을 접대한다는 뜻도 있었던지 자연 행동을 같이하게 되었다. 일마의 생각 같아서는 그만큼 그들과 휩쓸 린뒤이라 그만 헤어져 저기들은 먼저 방으로 올라갔으면서도 싶었으나 나아자는 그 눈치를 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피곤한데 올라가지 않으려우?"
 하고 말해도 나아자는,
 "좀더 함께들 있다 가면 어때요. 위로 겸 ──"하면서 좀체 몸을 뜨지 않았다.
 여자라고는 나아자 한 사람인 까닭에 남자들만의 단원들 속에서는 한 이채인 것이 사실이었고 그가 자리에 끼어 있으므로 기분들이 부드럽고 즐거운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나아자로서는 선뜻 자리를 뜨기가 어려웠던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그 정도의 가쁨을 줌은 조그만 예의 였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먼저 올라갔다 오리다."
 굳이 나아자를 잡아 세울 수도 없어서 일마는 혼자 객실을 나와 이 층으로 올라갔다.
 옷도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그 옷 그대로 침대에 피곤한 몸을 던지고 얼마 동안이나 누워 있었을까. 눈을 감은 채 걷잡을 수 없는 명상에 잠기면서 ── 확실히 말할 수 없이 피곤한 마음을 느꼈다.
 
 무슨 까닭으로의 피곤인지 적확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혼몽한 심사였다.
 반시간이나 그 모양그대로 누워 있었을까. 나아자는 종시 올라오는 소식이 없었다. 눈을 뜨니 어찔하면서 방안이 순간 깜깜한 듯하다. 벌떡 일어나서 무의식간에 방을 나가 아래로 내려갔다.
 객실에는 사람이 듬성했다. 거의 각기 방으로들 간 뒤요, 나머지 몇 사람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는 속에 나아자는 이봐놉과 한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에 정신이 없었다.
 "조금두 곤하진 않은 모양들이지."
 일마도 자리에 가 한몫 앉으니 이봐놉이 빙글빙글 웃으며,
 "오래간만에 만나니 아는 처지에 할 얘기가 많구려. 하얼빈은 이젠 아주 추워졌는데 여긴 아직두 이렇게 선선한 게 견디기 좋단 말요. 묘지에서 만났을 적엔 생면부지 서름서름한 처지더니 알구 보니 이렇게 피차에 관계를 가지게 됐구료."
 인사 겸 던지는 말속에 필요 이사의 아첨하는 태도가 들여다보이는 듯이도 느껴졌다.
 "조선의 인상을 서로 말하고 있는 중인데 이봐놉의 인상이 대단히 좋았다는군요. 모든 것이 이국적이구 독창적이어서 맘을 댕긴대요."
 나아자가 이봐놉의 심경을 대신해 설명해 주는 것을 들으며 일마는 범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 다행이오. 모처럼 온 데가 인상이 좋아야지 나빠서야 쓰겠수."
 "아주 맘에 들어요. 될 수 있으면 나두 이곳에서 살아 보구 싶구료. 하얼빈은 싫증두 났거니와 우리 같은 사람에겐 너무 박질한 도회구 좀 이런 낯설은 고장에두 살아 보구 싶구먼."
 그런 이봐놉의 말이 반드시 쓸데없는 인사의 말만은 아닌 듯 ── 진담의 고백으로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오래도록 사시구료. 그렇게 맘에 든다면."
 "첼로나 켜가지구 먹을 곳이 있나요. 있다면 단연 머무르구 말구요."
 "글쎄요."
 그 이상의 질문은 벌써 일마에게는 과중한 부담이었다. 말머리를 흐려 트리 면서 딴전을 보니 그제서야 나아자도 피곤하다는 듯이,
 "자, 그럼 이만들 헤어질까요. 밤두 늦은 것 같은데."
 제의하며 자리를 일어서는 것이었다.
 일마도 이봐놉도 뒤따라 일어서며 일마는 나오는 하품을 금할 수 없었다.
 방으로 올라와 옷을 갈아입으면서 일마는 나아자와의 사이에 그 무엇인지  개운하지 못한 것을 느끼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나아자 역시 일마에게 대해 전과 같이 말이 수다스럽지 않은 것은 일 마와 같은 감정을 품고 있는 탓이었을까.
 일마는 무거운 공기를 못 이겨 말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애썼다.
 "이봐놉이 이곳에 머물러 살구 싶다구 누차 말하니 그게 진정이란 말요?
 공연한 인사말 같이만 여겨져서 ──"그런 일마의 질문이 그 자리에서 부당한 것이었을까.
 도대체 그날 밤 일마의 감정의 개운치 못한 원인이 이봐놉에게 있었고 그런 줄을 나아자 또한 알고 있는 것이라면 일마의 이봐놉에 관한 질문은 사실 불필요하고 주책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아자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이 남편을 보며,
 "내가 어찌 안단 말요. 이봐놉을 신사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말을 믿는 것이 옳겠죠."
 부드러운 말솜씨는 아니었다.
 "누가 그를 신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단 말요. 외딴 곳이구 사정이 다르구 하니까 그의 그런 말이 내겐 웬일인지 실없이만 들린단 말이지."
 "외딴 곳이구 사정이 다른 것이 걸린다면 전 왜 이 먼 곳에 나와 있을까요."
 나아자의 그런 대꾸가 실책이었던지도 모른다.
 "그럼 나아자와 이봐놉의 경우가 똑같단 말요? 나아자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이곳까지 나왔수. 사랑 때문이 아니었수. 나를 믿으니까 나와 함께 나온것이 아니었수. 이봐놉은 무엇 때문에 이곳을 원한단 말요. 역시 사랑 때문이란 말요? 누굴 사랑해서란 말요."
 일마가 조금 흥분한 어조로 이렇게 반문했을 때 나아자는 사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무죽거리면서 적당한 말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랑 때문이라면 외딴 고장두 두려울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구해 하필 이곳으로 나온단 말요."
 여기에서 나아자도 비로소 말의 실마리를 얻은 듯,
 "사람이 반드시 사랑 때문에만 사나요 ── 딴 고장에 오는 이유로야 사랑 외에 직업을 구하는 수두 있겠지. 자유를 구하는 수두 있겠구…… "하며 말문을 연다.
 "그럼 이봐놉은 직업과 자유를 구해서란 말요?"
 "제게 물을 것이 무어예요. 아까 그에게서 들은 대로가 아니예요?"
 "이곳에 무슨 알뜰한 직업이 있다구 그걸 구해서 이 곳까지 ──" 말이 끊어진 채 한참 동안이나 침묵이 흘렀다.
 나아자도 그제야 일어서서 잠자리옷을 천천히 갈아입으면서.
 "말씀하는 속뜻을 누가 모를 까봐요. 오늘 저녁 눈치두 다 알아채구 있었어요. 그러니까 저두 불쾌했구 우울했어요. 우울하니까 뺃서두보구요."
 의젓이 말한다.
 벗은 옷을 침대 밑에 걸고 잠옷의 띠를 졸라 매면서,
 "다 오해예요. 제게 대한 이 며칠 동안의 추측은 다 오해였어요 ── 말 하기두 추접하나 이봐놉과의 사이에 그 무슨 남모를 사정이 있지나 않은가 생각 하셨을 것이나 임의의 추측에 지나지 못하다는 걸 제 입으로 똑바로 말 해 드리는 것예요."
 나아자의 입에서 그렇게 정면으로 명확하게 이봐놉의 말을 듣는 것이 일 마를 어질어질하게 했다. 부끄러운 생각이 나며 얼굴이 화끈 달았다.
 먼저 그렇게 터놓고 말하는 나아자의 뜻에 거짓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되려 지나친 표정을 지닌 것이 아닌가 하고 뉘우쳐도 졌다.
 "누 누가 나아자를 오 오해한단 말요."
 "오해하지 않았거든 앞으로나 오해하지 말아요."
 일마는 고개를 숙인 채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사실로 나아자에게 대한 공연한 내 의심이었던가."
 일마는 침대 속애서 여전히 생각에 곰실거렸다.
 나아자와 이봐놉의 사이를 의심한 것은 불찰인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자별스럽게 보였던 것은 사실이었고 그런 때 아내를 범연히만 보는 남편이라는 것이 세상에 있을까. 한번 고부려 추측해 보는 것도 자연스런 심정이 아닐까.
 "하긴 그게 도덕과 교양의 차이일지는지도 모르긴 하나."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의 차이에서 오는 감정의 구별일는지도 모른다.
 개인주의 도덕의 입당에서 보면 그 정도의 아내의 태도와 풍습은 당연하고 문화적이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을 곡해한 자기의 태도는 부당하고 비 문화적인 셈이 되는가. 일마는 협착한 자기의 도덕률에 비치어 나아 자들의 그것이 눈부시고 한편 부끄러운 생각도 났다. 이기적이요, 원시적인 그런 감정의 노출이 한없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무슨 염치로 나아자를 오해할 수 있는가. 사실 부끄럽다면 일마는 나아 자를 오해한 이상으로 자기 자신이 부끄러운 것이다. 남편의 이기주의 ── 남자의 특권인 듯이도 뭇사람이 뉘우칠 줄 모르는 이기주의 ── 그것이 아내에게 대해서 더없이 부끄러웠다. 단영과의 관계를 가진 일마의 처지로 누  구를 책할 수 있는가. 그 무서운 허물에 비하면 나아자의 태도쯤은 문제도 안된다. 숨은 비밀을 일마는 평생 가슴속에 감추어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설혹 있다고 하더라도 아내를 속이는 마음으로 일신이 어찌 편안할 수 있으랴.
 그러나 대체 어떻게 하면 그것을 터놓고 말할 수 있을까. 말하고 그 결과 아무 풍파 없이 무사할 수 있을까. 이런 복잡한 궁리에 잠길 때 일마는 부끄러울 뿐 아니라 두려워졌다. 금시 파멸이 올 듯 두렵고 황당한 것이었다.
 참으로 허물은 자기편에 있고 죄는 내 몸에 숨어 있다. 나아자를 책망 함은 천부당만부당이다. 도덕률의 차이가 아니라 그를 오해하고 책할 남편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쓸데없는 오해로 시작된 것이 결국은 그렇게 자신의 괴롬과 번민으로 변했다. 침대 속에서 어느 때까지나 앓으면서 그날 밤은 무한히 괴로운 밤이 될 것 같았다.
 "할말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어서 더 하세요."
 그 역 무엇인지 생각에 잠겨서 앉았던 나아자는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그제야 침대로 왔다.
 "할말이라니 내게 무슨 더 할말이 있겠수."
 일마가 미안한 듯 고개를 돌리니 나아자는,
 "사람의 맘이란 멀끔하게 씻어 버려야 시원한 것이지 조금이래두 께름한데가 있으면 잠시나 지낼 수 있나요. 하루 이틀이 아니구 앞으로 장구한 세월을 살아가야 할 텐데 어금니 새에 께름한 걸 끼고야 편치 못해 어떻게 지내요."
 일러듣기 듯 말한다.
 일마는 더욱 부끄러워지면서 대답할 바를 몰라,
 "께름 하구 안할 게 있수. 살려면 이런 때두 있구 저런 때두 있지."
 하면서 웃어 보이니 나아자도 웃음으로 대답하면서 덜석 몸을 던진다. 일 마의 얼굴을 거의 문지르듯 늘 하는 야댠스런 애정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서 만사가 해결된 것이었을까. 나아자와 이봐놉과 일마 세 사람의 관계가 결말을 지은 것이었을까.
 한 가지의 뜻하지 않은 돌발사건이 잠시 일마의 정신을 빼앗아 그런데 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했으니 다음날 저녁 연주회 좌석에서 일마는 돌연히 한장의 전보로 말미암아 그 자리로 혼란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도 초저녁인 제일부의 둘째 곡조가 시작된 때였다.
 무대 옆 검은 막 앞으로 등불 켜진 현판이 나타나며 청중의 주의를 끈지오래 였다.
 
 일마가 거기에 주의를 보냈을 때는 그 광고의 현판은 벌써 퍽이나 오랫동안 그곳에 방황하고 있었던 때였다.
 일마는 현판의 글지를 발견하고 주춤했다. 자기를 부르는 것이다.
 ── 천일마씨 휴게실까지 나오시오. 급한 일이 있소 ── 의 글발이 꺼졌다 켜졌다 하는 등불 앞에서 깜박깜박 반짝이는 것이 아니었던가.
 일마는 두어 번 거듭 읽으면서 뜨끔해졌다. 천일마는 역시 자기에 틀림없는 것이다. 좌우를 둘러보니 일어서는 사람은 없다. 같은 이름은 없는 모양 이었다.
 "무슨 일일까, 나를 부르니."
 나아자에게 알리면서 일어서 나갈까 어쩔까를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 두 사람 좌석 앞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일마의 앞에 와 머무른 것은 종세였다. 설레는 어성으로,
 "호텔에서 보이가 자네에게 전보를 가져왔네. 얼른 휴게실에 나가 받아 보게나. 기다리구 있으니."
 무슨 전보인고 하고 일어나 종세의 뒤를 따라 나갔다.
 "맘대로 펼 수도 없어서 자네를 데리러 왔네만."
 휴게실에 나가니 앉았던 보이가 일어서며,
 "지급 이기에 가져 왔는데요."
 하고 전보를 내보인다.
 부랴부랴 뜯어보면서 일마는 한참은 무슨 소리인지를 분간하지 못했다.
 거듭 읽으니 차차 내용의 뜻이 알려졌다.
 ── 사건돌발 황당불이 급래희망 한벽수 ── 하얼빈의 동무 한벽수에게서 온것이다.
 일부인을 보아도 그럼이 틀림없었다.
 "사건이라니 무슨 사건인구."
 함께 들여다보던 종세도 동무의 일이 궁금했다.
 "낸들 어찌 알겠나."
 일마는 대답하면서도 생각할수록 곡절을 알 수 없어,
 "필시 중대한 사건인 모양인데, 무엇이든 간에 급래 희망이랬으니 가는 봐야지."
 하면서 마음의 설렘을 느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그러고만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보이를 먼저 보내고 일 마는 급히 휴게실을 나갔다.
 
 "그래 떠날 작정인가."
 "막차로 떠나겠네. 전보를 쳐서 되묻재두 날이 걸릴 테구 눈치가 대단히 급한 모양인데 그대로 있을 수야 있나."
 장내에 들어가 나아자에게 곡절을 말하니 그 역 놀라 당황해 하면서,
 "정말 떠나실 작정이예요?"
 하고 거듭 반문 한다.
 "먼저 호텔로 갈 테니 천천히 듣구 오구려."
 따라 일어서는 나아자를 만류해 앉히고 일마는 호텔로 돌아와서 조그만 트렁크에 대강 행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차시간까지에는 아직도 두어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짐을 꾸려 놓고 나서 하염없이 앉았을 때 나아자가 쫓아왔다.
 "저두 함께 떠나겠어요."
 아내의 제의에 일마는 감격 하면서,
 "고맙긴 하나 짧은 여행에 그럴 것까지야 있수."
 타이르니 나아자는,
 "혼자 가시기 무료하실 테구 하얼빈은 제 고향이니 아무리 자주 다녀 두 제 겐 괜찮거든요."
 "거추장스럽게 그럴 것이 없구 어서 악단의 손님들 접대두 있구 하니 그대로 머물러 있구료. 얼른 다녀 올께."
 "사랑하는 사람을 혼자 내놓다뇨."
 아내의 마음씨가 일마에게는 한없이 고마웠으나 사정을 설명하면서 만류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야단스럽게 얼싸안고 애무를 받으면서 나아자는 간신히 터득하고 구부러졌다.
 사
 
 건
 
 일마가 그날 밤 단독으로 하얼빈을 떠난 것은 주위 동무들에게 즉시로 알려졌다.
 그의 일거일동은 근변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주의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괴롭다고는 하면서도 둘째 날 밤도 여전히 연주를 들으러 나왔던 단영은 그날 밤으로 그 일마에게 일어난 변동을 알게 되었다.
 일마의 황당해서 어릿거리는 양을 보고 종세에게 물으니 그런 사연이었다.
 일마가 또 하얼빈으로 간다 ── 고 생각하니 단영은 자기도 한 번 밟았던 땅이라 알 수 없는 그리운 감회가 솟으며 가슴이 설렘을 느꼈다.
 일마에게 대한 감정이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탓이다. 하얼빈은 깊은 마음  의 상처를 받은 곳이었만 그 상처가 아직도 스러지지 않은 오늘 그곳이 여전히 그립다. 일마의 몸을 그곳에 두고 생각함이로다. 일마의 가는 곳이므로 변함없이 그리운 곳이다.
 "무슨 일루 또 하얼빈에 가누. 생각만 해두 지긋지긋한 곳."
 명도도 지난 일이 진저리가 나서 이렇게 말하면 단영은,
 "카바레의 밤을 생각하세요. 욕을 주었던지 욕을 받았던지 분간할 수 없는 그날 밤 일을."
 하고 맞장구를 치면서도 속으로는 그렇게 원수의 곳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대체 무슨일로 일마가 가게 된 것인구, 그렇게 급작히."
 의아해하면서 여행의 유혹을 느끼는 단영 이었다 이튿날 거리에 나갔다가 우연히 혜주를 만나 말결에 일마의 이야기를 전 한 것은 자기도 모르는 결에 역시 일마의 일에 열중해 있었던 까닭이다.
 혜주도 일마의 말이라면 범연히는 듣지 않았다. 미려와의 관련을 생각 함으로 였다.
 그 말을 듣기가 바쁘게 그날 오후로 혜주는 미려를 찾아가 그에게 전했다.
 미려가 적은 식구에 적적해 하는 까닭에 혜주는 이틀도리로 그를 찾았던 것이다. 일마의 소식은 살같이 빠르게 미려의 귀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일마가 어젯밤 별안간 하얼빈으로 떠났다는구료."
 혜주의 전하는 말을 미려는 심상하게 들으려고는 하면서도,
 "무슨 까닭에 떠났을까요."
 하고 어성이 변해졌다.
 "친한 동무에게서 전보가 왔는데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던가."
 "무슨 사건 일까…… ""급해서 사연두 알려 오지 못한 모양인데 ── 일 마가 돌아올 때에나 알수 있을까."
 "혼자 떠났을까."
 "같이 나서는 나아자를 떼놓구 혼자 떠났다던가."
 "오래 묵을 작정으로."
 "지내봐야 알 일이지. 일 처리되는 대로 올 테니까."
 미려는 여러 가지 궁금했다. 무의식간에 황당한 목소리로 묻게 된 것이 겸연쩍어서 침묵하니 그 눈치를 아는 혜주는 동무의 속을 뽑아 잡았다는 듯도 한 노련한 표정을 보이며,
 "신변이 그렇게두 수다수럽던 일마가 잠시래두 혼자 있게 된다는 것이 바 라기 어려운 하나의 가회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수수께끼나 걸듯 말하니 미려는 무슨 뜻인고 하고, ` "일 마가 혼자 있다는 것이."
 하며 말을 받아 중얼거리다가 문득 혜주가 던진 암시를 홀연히 깨달으며 뜻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기회라면 ── 사실 바라기 어려운 기회일 것이다."
 "기회란 것은 놓치지 말구 잡아야 하거든."
 "……일마를 쫓아갔댔자 ──""가서 모든 것을 확적히 하구 오구려."
 "그런다구 시원한 게 무에 있수."
 "어서 주저하지 말구 ── 눈앞에 차례진 일을 하라니까."
 혜주는 거의 명령이나 하듯 미려를 재촉한다. 미려는 현혹한 생각에 사실어 쨌으면 좋을까하고 마음이 어지러운 것이었다.
 며칠이 자난 후 일마에게서 종세에게로 사건의 내용을 알리는 간단한 편지가 왔다. 종세는 궁금한 판에 전보로까지 문의해도 회답이 없어 한층 당황 해 하던 터이라 그 편지는 두렵고도 반가운 것이었다. 자기도 한몫 그 사건 속에 끼어나 든 듯이 흥분하면서 동무들 사이로 편지를 가지고 다니며 설레는 것이었다.
 나아자에게도 편지가 온 것은 물론이요, 같은 내용의 것임에도 틀림은 없었다. 따라서 종세는 사건의 내용을 나아자에게까지 전하러 다닐 필요는 없었으나 누구보다도 그가 가장 흥분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사건이란 순전히 한벽수 개인에 관한 것이었으나 원체 엄청난 일이었던 까닭에 일마의 조력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내용의 한 토막 한 토막이 읽는 사람에게는 신기했다.
 ── 두 번 밟는 하얼빈이 달포 전과는 아주 달라져서 날도 차거니와 인상도 판이해졌네. 이곳에 오는 중 이번같이 마음이 어수선하고 산란한 때는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몰라 수선거리고 설레나 즉시로 해결이 솟지 않는 난처한 상태에 놓여서 근심과 걱정으로 지내는 판이네. 하얼빈이란 곳이 지금까지와 는 달라 또 하나의 생각지도 못했던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고 이 새로운 요소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도시의 인상이 지금까지와 는 달라진 것을 신기하게 느끼고 있는 중이네.
 하기는 그 어디인지 넓고 깊고, 그 깊은 속에 헤아리지 못할 그 무엇이 숨어 있으려니는 생각되었었으나 그런 것이 실상으로 표면에 솟아나 사람을 놀랠 줄이야 누가 알었겠나. 깊고 어두운 구렁 속에 악의 꽃이 붉게 피어  있 음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런 악과 죄 이외에 공포가 숨어 있을 줄은 아마도 헤아리지 못했으리. 하얼빈은 향수의 도시만이 아니라 공포의 도시임을 처음으로 깨달았네. 무시무시한 전율의 도시라네. 안심하고 즐거운 날만을 보낼 수 없는 위험하고 무서운 도시 임을 서로 깨달은 것이네.
 하얼빈의 이 새로운 인상과 성질을 이렇게 야단스럽게 늘어놓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이번 사건의 성질을 이해함에 도움이 되는 까닭이네. 한없이 복잡한 이 깊이를 모르고는 이번 일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네. 자네들까지 놀라게 해서 미안하나 사건이란 것은 온전히 한벽수군 ── 보다도 그의 숙부 한운산의 일신에 걸린 것이네. 한마디로 내용을 말하면 운산이 대규모의 갱 일단의 손에 걸린 것이네. 그의 몸이 사라진 지 벌써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날마다 협박장만이 들어오고 소식은 아득하단 말야.
 한운산은 자네도 알다시피 이곳에 들어온 지 수십 년의 적수공권으로 백만 대의 재산을 쌓은 사람. <대륙당>의 큰 약포를 가지고 상계에서도 손을 곱는 터인데 하필 그가 갱의 손에 걸렸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던 까닭이요 ── 갱은 주로 외국인들로 된 대규모의 일단인 듯 한 데 그런 것의 존재가 이 도회에 있다는 것이 아까도 말했지만 의외요, 놀랍 단말이네. 흡사 영화의 수법이야. 그 영화의 한 토막이 바로 이곳에 일어났 단말이야.
 나거된 몸은 아마도 국경지방이나 그렇지 않으면 바로 이 도회의 어느 구석에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운산의 한 몸을 전당으로 삼십만원을 강요하고 있네. 현금 삼십만 원을 갖추어 가지고 국경지방의 모지로 몸을 찾으러 오라는 협박인데. 처음 당하는 큰일이라 가족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설레고있을 뿐 경찰 쪽과 협력해서 대책을 생각은 하고 있으나 지체되면 당 자의 목숨이 위험할 것도 같아서 역시 돈을 마련해 가지고 몸을 찾아오는 수밖에 없으리라 고 생각되는데, 거기에 따르는 위험도 있어서 지금 진퇴유곡의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다네. 일이 되어가는 대로 또 편지는 하지만 벽수군의 걱정과 그를 위로해야할 내 입장을 생각해 보개. 아득해 어쩔 줄을 모르는 형편 들이라네. 그럼 동무들에게도 소식이나 전해 주게.
 하얼빈서, 일마 하얼빈 지당가 <대륙당>에서는 가게를 하고 휘장을 내리고 근심에 넘치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주인을 잃은 집안은 수심에 겨워 장사 여부가 아니었다. 번화한 거리에서 그 한 곳만이 좌우와 구별되어 어두운 구름  속에 싸여 있는 것이 지나는 사람들의 눈에도 역력히 알렸다.
 가게 안에서는 한 간 방에 집안 사람들과 점원들이 밤낮으로 모여들 앉아 경황 없는 속에서 두런두런 설레고들 있었다.
 집안 사람들이라고 해도 운산이 없는 후에는 허씨부인과 어린아이들과 벽수의 ── 불과 몇 사람이 안되는 단출한 식구 외에는 한 식구같이 친하게 기숙하고 있는 몇 사람들의 점원들 뿐이다. 큰일을 당한 집으로서는 너무도 적적하고 쓸쓸한 지경이었으나 그러므로 벽수가 일마를 부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흡사 상사집같이 경황없는 속에서 커다란 절망에 내려눌린 채로 맥들을 못추고 있었다.
 가장 슬퍼하는 것이 허씨 부인이어서 남편과 함께 수십 년 동안의 조 강의 협력을 해온 그로서 오늘의 뜻하지 않은 조난은 자기 한 몸의 일과 진배 없이 마음을 쳤다. 일을 당한 첫날은 정신없이 울고만 있었던 것이 날을 지낼수록 남편의 일신의 위험에 대한 걱정은 더욱 솟아서 절망과 낙담이 더해 갔다. 한집안의 기둥을 잃게나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몸부림을 쳐도 시원 치 않으리만큼 속이 달았다.
 아침에 경찰에서 서원이 소식을 물으러 왔다가 간 후로는 더욱 괴괴한 속에서 반날을 지내기가 무한히 괴로웠다. 일이 있은 첫날은 서원들이 나와가게 안을 진을 치고 밤을 새워 가면서 삼엄한 경계를 했었으나, 다음 날부터는 서원이 번갈아로 나와 출장경계를 하는 한편 나날의 소식을 묻는 것 이었다. 가게로서는 별도리없이 경찰의 노력에 의지할 뿐으로서 수색의 결과가 어떨까 해서 시시각각의 정보를 고대하는 것이나 아득하기 짝이 없다.
 고대하는 마음이란 괴로운 것이어서 하루 동안을 멍하니 기다리고 나면 말 할 수 없는 피곤이 엄습하는 것이었다.
 저녁때가 되니 벽수는 나른한 정신의 피곤을 느끼면서 감출 수 없는 절망의 빛이 더해 갈 뿐이었다.
 "결국 협박장의 요구하는 대로 하는 수밖에는 없는 일인데 어떤 방법으로 하면 좋은가 하는 문제가 남았을 뿐이죠."
 마지막 결론같이 말하는 소리가 집안 사람들 에게는 별로 신기할 것이 없었다. 현금 삼십만 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벽수는 신문사의 직무까지를 버리고 이 며칠 동안 서두른 결과 수월하게 필요한 액수를 갖추어 놓게 되었다. 경찰의 말 한마디로 그것을 갱단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이나 어떤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안전할까 하는 것과 또 한 가지 그것을 옳게 전달한다고 그들이 나거한 몸을 어김없이 아무 박해도 가하지 않고 물려줄까 하는 것이 다음 문제요 걱정이었다.
 
 원래 갱의 성질로 희생된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법이 드물다. 자기들의 정체의 탄로를 겁내서 희생된 사람은 대게 목숨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 이상례이다.
 소굴을 알리지 않기 위해 당자의 눈을 가리워 둔댔자 안전한 책이 못될 그들 로서 목숨을 천대함은 그들의 도덕일는지도 모른다면 ── 지금에는 벌써 그 목숨에 대한 의심과 걱정이 가장 큰 것이었다.
 "현금의 전달을 경찰의 손에 위탁하지 않을 수두 없지만 경찰의 손으로 괜히 설굳혔다간 희생이 클는지두 모르구 어떻게 함이 좋을는지."
 허씨부인도 적당한 방책을 몰라 난처했다.
 "말이 국경지방이지 단의 정체가 거리의 그 어느 구석에 숨어 있을 것아 사실인데 어수룩하게 변지까지 갔다가 또 무슨 봉변이 있을지두 모르는 일이구…… "해결 없는 하루가 또 그렇게 해서 무의미하게 저물려는 것이었다.
 일마도 외에 별로 하는 일 없이 <대륙당>진영 속에 한몫 끼워 날을 지우는것이었으나 결국은 벽수의 동무를 해주는 셈밖에는 되지 못했고 그 로서의 신통한 지혜나 방법의 연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기는 그것으로서 족 한 것 이었으나 하루를 그렇게 앉아 지내노라면 ── 그것만으로 피곤해지고 나중에는 답답해졌다.
 그날도 벌써 그 이상 더 새로운 변화도 진전도 있을 것 같지는 않아 저녁때 일마는 잠깐 숨을 돌리려 가까운 찻집으로 벽수를 끌고 나갔다.
 여러 날 햇빛을 못 본 박쥐 같아서 대낮이 아닌 저녁의 등불이언만 벽수에게는 오히려 눈부시게 보이며 어질어질했다.
 "어떻게나 돼 나갈는지 도무지 추측을 할 수 있어야지. 아무리 생각 해봐두 그렇게 수월하고 안전하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거든."
 오래간만에 밝고 깨끗한 공기 속에 놓이니 정신이 드는 듯하면서도 한편 그만큼 걱정도 커지면서 한시도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한 담에야 천명에 맡기는 수밖엔 더 있나. 무난히 돼 나가겠지. 걱정만 한들 무엇하나."
 성의 없는 소리가 아니라 일마로서는 마음껏의 대답이었다. 그 이상의 다른 대답은 없었던 것이다.
 "경찰에 의탁한 것이 실책일는지두 모르구 ── 그렇다구 숨겨만 둘 수두 없는 노릇이었으나 ── 갱이라는 게 원래 험악한 성질의 것인데 화가 나면 감히 무슨 짓인들 못하겠나."
 "자네에겐 미안하나 난 지금 흡사 미국의 갱 영화나 보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나서 못 견디겠네. 하회가 어떻게 될까 해서 맘이 조릿조릿하단 말이야. 하얼빈의 한복판에 백주에 영화의 한 토막이 그대로 일어나다니."
 "하얼빈이 얼마나 큰 도회라구. 그러나 넓기로야 세계에서 뉴욕 담에 간다네. 구석구석에 무엇이 숨었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단 말야. 나두 사실 이번 일을 당하구 나니 이곳이 무섭다는 생각이 자꾸만 치밀어 오르네."
 벽수는 수십 년을 도회에서 다스려난 사람이나 이제는 벌써 자신이 없다는듯 온순한 눈동자에 겁까지 머금어 보인다.
 "── 그날 밤 일을 생각하면 지금두 몸서리가 쳐. 아침에 볼일이 있다구나 간 아저씨가 종일 돌아오지 않네 그려. 은행에 예금을 하러가는 눈치 였기에 시적시적 나서서 은행과 호텔과 감직한 곳을 모조리 들려봐두 안 보이길래 그 길로 돌아와 보니 다짜고짜로 그 협박장이네. 삼십만 원 두 놀라운 숫자지만 사람을 대체 어디루 끌구 갔을까에 정신들을 잃구 볶아들 쳐야 소용이 있어야지 ── 그날부터 무서운 도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생각 할수록 맹랑한 곳이야."
 "보기에 따라선 재미있기두 하구 우리 같은 백년날탕이야 간들 그런 음모 속에 걸릴 리가 있겠나 ── 백만장자라는 점이 편안한 생업은 못돼."
 일마가 굳이 껄껄껄 웃는 것은 벽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자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벽수는 아무리 해도 현재 웃을 형편이 못되었다.
 "경찰에 의탁한 것이 실책이라는 데는 내로선 여러 가지 뜻이 있네."
 알고보면 가지가지의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벽수였다.
 "── 자네두 알다시피 숙부의 반생이라는 것이 가시덤불의 길이었구 오늘의 지위를 쌓아 올리는 데는 말할 수 없이 위험하구 비합법적인 수단과 방법을 써온 것인데, 일단 경찰에 모든 것을 맡기구 결탁하게되면 자칫 하다 간 그런 반생 동안의 경력이 탄로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네. 현재두 여전히 그 종류의 생업을 숨어서 하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에 더욱 위태하단 말야 ── 내가 항상 지적하구 충고하구 나무래 오던 일인데 그게 이번에 더 큰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것이네."
 "지금 이 자리에서 자네의 그 정의파적 반성과 비판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괜히 사태를 복잡하게만 하구 생각이 혼란해질 뿐이지."
 일마는 벽수의 '양심’이라는 것을 되려 핀잔주며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날 저녁 일마는 여러 날만에 무료한 의무에서 해방되어 혼자만의 자유로운 하룻밤을 가지고 싶었다.
 찻집에서 벽수와 헤어진 후 호텔로 돌아와 식사를 마치고 났을 때 비로소  놓이는 마음을 느끼며 아무에게도 메이지 않은 개인의 자유를 회복한 듯 했다.
 그러나 그 자유로운 하룻밤을 어떻게 지냈으면 좋을까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것이,
 "에 미랴 나 찾아볼까."
 하는 계획이었다. 이 생각이 마음을 얼마간 즐겁게 해준 것이 사실이었다.
 하얼빈에 도착하던 길로 호텔과 <대륙당>과의 사이를 왕래했을 뿐이지 아직 한 번도 거리의 탐험을 나서지 못했던 일마였다. 넓은 거리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벽수를 제하고는 나아자가 없는 이제 사실 에미랴쯤밖에는 없었다. 나아자와 가장 친했고 일마와도 알게 된 에미랴다. 나아자로부터의 문안의 말도 전해야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건강하지 못하던 그가 요새는 어떻게 지낼까가 궁금도 해서 무엇보다도 그가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카바레<승가리>를 찾아가니 벌써 밤 시간이 시작될 무렵이라 댄서들은 모여들어 한편 구석에서 식사들을 한다 하며 설레는 것이나 그 속에 에 미랴 의자 태는 보이지 않았다.
 낯익은 한 여자에게 물으니,
 "몸이 아파서 여러 날째 나오자 않는 중예요."
 라는 대답이다.
 "또 앓는단 말요?"
 "앓으면 ── 늘 그 모양이죠. 애두 일 났어요."
 정말 걱정해 하는 말인 듯도 하고 이제는 벌써 그의 신세에 심드렁해졌다는 듯도 한 여자의 어투이다.
 또
 
 앓는다니 정말 일은 났구먼 ── 중얼거리면서 일마는 그렇다고 일부러 나선 길을 단념하고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어서 에미랴가 아직도 전과 같은 아파트에 있다는 것을 물어 가지고 카바레를 나왔다.
 골목길을 더듬어 간신히 한 번 다녀 본 일이 있던 그곳을 찾아냈을 때에는 밤도 어두어진 후이라 초라한 아파트의 꼴이 어둠속에서 한층 우중충해 보였다. 그러나 외모보다도 더 스산한 것이 에미랴의 방이다. 쓸쓸할 뿐이 아니라 시절의 탓으로 추운 방안이 여름보다도 을씨년스럽다. 냉랭한 침대 위에 누운 에미랴의 자태도 여름 때보다는 한곱 더 축나 모인다. 일마가 들어섰을 때 한참이나 있다가 그임을 알고 벌떡 뛰어 일어나며 놀라는 표정 이었다.
 "웨 웬일이세요. 언제 오셨어요. 나아자는 ──"목이 메이게 한꺼번에 물어댄다.
 
 "지금 카바레로 갔다가 앓는다기에 찾아왔는데."
 하고 일마는 벽수에 관한 일건으로 급작히 혼자 왔다는 것과 오늘 처음으로 거리에 나서 보았다는 것을 간단히 일러 들렸다.
 "갱의 일건은 저두 신문으로 알구 있었는데 ── 그래두 혼자 오시다뇨.
 나아자가 섭섭해 하잖아요."
 "잠깐 길인데 괜히 야단스러울 것 같아서, 그리구 교향악단 일행이 머무르구 있는 까닭에 그 접대두 있구 해서."
 "그래 나아자는 잘 있어요. 행복스럽구요. 언젠가 한번 편지는 받았지만."
 친우의 소식이 궁금한 듯 급하게 묻는 것이나 일마의 편으로 보면 에 미랴 의 몸이 더 급하고 염려되었다.
 "그렇게두 병이 잦고 몸이 고달퍼서 어떻게 한단 말요."
 "얼른 죽었으면 해두 목숨이 왜 그리두 질긴죠."
 실감에 넘치는 목소리가 일마의 가슴속에 뭉클하는 것을 던지는 듯도했다.
 병든 소녀의 허술한 자태가 뼈 속에 새겨지면서 그의 불행에 대한동정이 애틋하게 솟아올랐다.
 "정신을 채리구 용기를 좀 내야지 ── 에미랴의 일생은 꼭 하나밖엔 없는 절대적인 귀중한 것이 아니오?"
 이런 말은 그러나 일마의 입으로 보다도 벽 위에 걸린 에미랴의 어머니의 초상이 더욱 충심으로 일러 들리는 것이 아닐까. 여름에 본 그 초상이 여전히 변함없이 침대 위에서 에미랴의 불행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몸도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에미랴는 또 한가지 불여의 때문에 그렇게 실망 속에만 누워 있었던 것이다.
 일마는 조금이라도 그에게 용기를 주고 즐겁게 해줄 생각으로 강잉히 그 를 일으키고 거리에의 소요를 권했다.
 몸을 가다듬고 옷을 갈아입은 에미랴는 침대에 누웠을 때보다는 판이하게 신선해 보였다. 에미랴의 강적은 병과 또 한 가지 가난이다. 가난만 없 대도 그 의 인생은 얼마나 더 유쾌한 것이었을까. 오늘 하룻밤의 외출이 그에게 그렇게도 기쁨을 주는 것이다.
 에미랴는 거의 앞장을 서다시피 하고 충대를 내려서더니 횡하니 먼저 문을나 간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한 사람이라는 듯도 하다. 일마도 걸음을 맞추어 막 층계를 내려선 때였다.
 층계 옆방 문을 열고 급작스럽게 나선 것은 주인 노파인 모양이었다.
 문밖으로 사라진 에미랴를 내다보면서 손을 들고 저주하는 듯이,  "뻔질뻔 질하게. 앓는다더니 놀러만 나가면서 ──"중얼거리는 것이다. 그 말투로 일마는 날쌔게 그 무엇을 직각할 수 있었다.
 "내가 대신해 드릴 테니 무엇이든지 말씀해 보시오."
 급하게 물어대니 노파는 손가락을 곱으면서,
 "석 달치가 밀렸어요."
 빈정대는 것이었다. 일마는 자기가 직각했던 대로의 그 대답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노파의 자태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 필연코 그런 뜻이려니 느꼈던 것이다.
 "석 달치가 얼마요."
 지갑을 내서 노파의 말하는 액수를 그 자리로 세음해 치러주고 나서 더 말을 남길 필요도 없이 쏜살같이 문을 나갔다. 에미랴가 몇 걸음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급하게 뛰어가 미안하다는 듯 옆에 서서 걸으니,
 "무얼 하셨어요. 한참이나."
 에미랴가 묻는다.
 "잠깐 머뭇거리다 그렇게 됐구료."
 천연스럽게 대답하면서 골목을 벗어져 나갔다.
 노파와의 거래는 극히 짧은 시간의 일이었다. 일마가 그런 줄 눈치채고 급하게 서두른 덕으로 에미랴에게 감쪽같이 그 눈치를 안 보이게 된 것이 일 마로 서는 행복스런 일이었다. 만약 에미랴의 앞에서 그 변을 당했던들 그가 얼마나 무안해 했을 것이며 일마의 그런 호의를 받았을 리도 만무했을 것이다. 에미랴의 모르는 뒤편에서 순식간에 하나의 그 조그만 결말을 짓게 된것이 일마로서는 기쁘고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쁜 한편 에미랴의 신세를 생각하고 마음이 아파도 졌다. 에 미랴 는 그렇게까지 가난하고 불행한 것이다. 그를 돌보아주고 도와주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외로운 어머니의 초상이 그를 보호해 주고 있을 뿐이다. 에미랴같이 측은한 여자가 어디인들 없으련만 그를 알게 된 이상 가엷은 생각이 가슴을 쳤다.
 "나아자의 편지에 여러 가지 그쪽의 즐거운 인상과 재미있는 얘기가 그뜩 적혀 있었는데 대단히 행복스런 모양이죠. 아무쪼록 변함없이 유쾌하구 행복스럽게 지내기를 맘속으로 빌어 왔어요. 지금두 빌구요. 나아자를 생각 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저두 누구에게나 밑질 것 없는 그 중의 한 사람이예요…… 언제인가 노상에서 수우라를 만났더니 ── 나아자의 아주머니를 말예요 ── 나아자의 소식을 묻겠나요. 세상에서 아마 제일 행복스런 사람 일  지두 모른다구 대답해 주었더니 콧잔등을 찌푸리면서 안심했는지 비웃는지 더 말없이 지나가던가요."
 나아자의 행복에 대한 기다란 설화는 곧 에미랴의 행복에 대한 갈망의 소리와도 같이 들렸다. 나아자의 행복은 자기 자신의 행복이나 되는 듯 흥분 되어 말하는 것이 더욱 그의 불행의 인상을 신명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일마에게는 언제나 불행한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 자신이 지금까지 그닷한 행복된 편이 아니었던 까닭일는지도 모른다. 오늘밤의 에미랴는 벌써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가장 친한 동족 같이도 여겨지고 혈육 같이도 느껴졌다. 그런 까닭에 마음이 기쁘면서도 한편 아팠던것이다.
 변화한 밤거리를 걸으며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일마와 에미랴는 결국 카바레 <승가리>를 찾기로 했다.
 오래 나가지 않은 직장에 대한 에미랴의 걱정도 있었고 그로서는 오래간만에 낯을 내놓아야 할 의무도 있었다. 같은 값이면 에미랴의 걱정도 덜어줄 겸 일마는 낯익은 그곳으로 발을 돌린 것이었다.
 직장이라고는 해도 오래간만이래서 그런지 에미랴는 서먹서먹해 하는 것이한 사람의 낮선 손님과도 다르다. 아직 몸이 허전한 탓도 있는지 모른다.
 동료들 간에도 그 어디인지 어름어름해 하는 기색이 보였다. 일마는 그 외로운 에미랴를 보호나 하는 듯 자리를 같이하고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음이 의무라는 듯 그만을 위해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했다.
 일마와 같이 앉았다고 해도 에미랴는 아무나 손님의 상대를 하는 직업인이다.
 그러나 그에게 춤을 청하는 사람은 없었다. 에미랴의 우울은 그런 곳에서도 오는 것 같았다. 그의 육체와 인기는 벌써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는 단말 일까. 그 때문인지 그 쇠잔한 건강에 대중없이 술이 과했다. 발그레 물든 얼굴에 눈을 가슴츠레 뜨고 자기 손으로 얼마든지 따라서는 들이키곤 했다.
 그것을 보는 일마의 마음도 편안하지는 않았다.
 일껏 유쾌하게 하려고 한 밤이 차차 우울해 가기 시작했다.
 "쭉정이의 비애는 삘 날이 없구나."
 전번에 왔을 때 거리에서 느꼈던 '쭉정이’ 의 사상이 지금 또다시 일 마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거리의 장남 음악가와 꽃장수와 거지를 보고 느낀 비애가 오늘밤 에미랴의 신세를 봄으로써 또 한번 새삼스럽게 솟는 것이었다. 에미랴도 별수없이 음악가나 꽃장수와 고를 바 없는 하나의  쭉정이다. 사회의 최하층에 묻혀서 광명도 희망도 가지지 못하는 고달픈 인생인 것이다. 혈족의 차이도 피의 빛깔도 쭉정이라는 사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혈족의 단결이 쭉정이를 구해 주지는 못하는 것이요, 쭉정이는 쭉정이 끼리만 피와 피부를 넘어 피차를 생각하고 구원하고 합할 수 있는 것이다. 일마가 오늘밤에 에미랴를 누구보다도 몸 가까이 여기고 동정하고 측은해 함은 말할 것도 없이 그 까닭이었다.
 에미랴의 모양을 보고 있으려니 일마는 점점 자신이 우울해 가고 슬퍼 갔다. 어느 세상이 되면 쭉정이라는 것이 땅 위에서 사라질 것인가. 사라질 날이 있을 것인가 ── 하는 감상이 솟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무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에미랴의 우울은 일마보다 몇 곱절 더 하다는 듯,
 "── 이 잔의 것이 술이 아니구 독약이었으면 해요. 한 모금에 켜게요."
 암팡진 말에 일마는 몸서리를 치면서,
 "술이 좀 과했나부오."
 하고 홀 밖으로 잠깐 에미랴를 이끌고 나갔다.
 홀에 붙은 긴 복도에는 등불이 침침한 속에 군데군데 소파가 놓여 있었다.
 홀에서 제일 먼 자리에 에미랴를 붙들고 앉으면서,
 "에 미랴 는 오늘밤의 내 말을 들어야 하우. 꼭 한 가지 내 청이니까."
 에미랴가 정색하며 자세를 바로잡는 것을 보고,
 "에 미랴에게 지금 필요한 게 꼭 한 가지 있어. 건강이야.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의 내 청을 아예 거절하지 마시오. 내가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기 딱해서 그러는 것이니까."
 에미랴는 겨우 일마의 뜻을 알아채고,
 "나를 구원하잔 말씀이죠. 벌써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여자예요. 잠시 구 하게 된댔자 무슨 소용이 있어요?"
 "한 반년이나 일년 동안 휴양해 보구료. 그 정도의 힘은 내게 있으니."
 "말씀은 고마워두. 그리구 그것이 얼마간 좋을 것은 사실이래두 내가 무슨 낯으로 그 호의를 받는단 말예요. 나아자와의 친분을 생각한들 내가 어찌…… "에 미랴 를 주저하게 하는 것은 나아자에게 대한 도덕인 모양이었다. 무관 하다는 것을 적절한 말로 일려주려 할 때 문득 두 사람 앞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뜻하지 않은 벽수였다.
 "웬일인가."
 
 벽수가 그렇게 한가할 리가 만무한 까닭에 일마는 적지 아니 당황한 표정 이었다.
 "자네를 찾으러 왔네."
 벽수의 대답에 일마는 더욱 당황해 하며,
 "나를 찾다니."
 "진작 여기로 올 것을 괜히 몇 군데 들치노라구 지체만 한걸."
 "무슨 일인데."
 "자네와 헤어져서 가게엘 갔더니 별안간 웬 손님이 찾아왔데나. 서 울 서 일부러 자네를 찾아왔다는데 ── 누구인지 자네 생각나는 사람 없나. 옴 직한 사람으로 ── 여자 손님이데."
 "여자?"
 "단영은 아니구."
 "단영이 아니구 웬 여자 손님이 날 찾아온단 말인가. 꿈같은 소리지."
 중얼거리면서 일마는 사실 웬 소린고 하고 돌연한 소식에 얼삥삥했다. 아무리 고개를 흔들어보고 머리 속을 들척거려 보아야 다따가 자기를 그 곳까지 찾아올 여자의 이름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내가 그를 모르는 것이 큰 불행으로 생각되리만치 아름다운 여인인데 단영쯤은 비가 아니야. 자네가 알고 있는 여자 중에서 제일가는 인물을 골라 낸다면 그가 바로 그 여인이리."
 "제일가는 인물이라니, 내가 웬 여자를 그렇게 많이 안다구."
 "많든지 적든지 제일가는 인물이야 ── 하는 수 없이 자네 든 호텔을 가르쳐 주었으니 만나거든 내게 한마디 전해나 주게. 수천 리 길을 찾아 온 여자니 필시 곡절이 있을 텐데 괜히 먼길 왔다가 사건이나 일으키지 말게."
 "사건이란 자네에게나 일어나는 것이지 내게야 당한 것인가?"
 대답은 했으나 일마는 어안이 벙벙해서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곰시락 거리 면서 그 수수께끼의 여성을 찾아내기에 애쓰는 것이었다.
 "전할 말 전했으니 난 되로 가게로 가겠네만 아닌 곳에서 작작 놀구 어서 호텔 로나 돌아가 보게나. 그런 줄 알았더면 이리로나 데리구 올걸."
 타이르고 벽수가 나간 후까지도 일마는 잠시 옆에 앉은 에미랴의 존재도 잊어버리고 궁리에 잠겼다.
 "무슨 큰일이게 그렇게들 설레구 야단들이세요?"
 에미랴의 목소리로 겨우 제정신을 차리고 그를 새삼스럽게 알아보면서,
 "오라, 에미랴를 구원해 보겠다구 그에게 휴양을 권해 보던 중이었지.
 
 에미랴는 나아자에게 대한 체면으로 모처럼의 호의를 거절 했겠다…… "하고 몇 분 전의 자기로 돌아가면서 오늘밤은 이왕 에미랴와 함께 시작 된 밤이니 그와 마지막까지 동무해 줄 것, 에미랴가 아무리 사양한대도 일단 꺼낸 말은 끝까지 세원 그의 물질적 원조의 제의를 고집해 볼 것 ── 을 마음속으로 작정하는 것이었다. 미인이 찾아왔든 무엇이 찾아왔든 지금 내게 무슨 아랑곳인가. 중얼거리면서 '쭉정이’의 사상으로부터 시작된 그날 밤의 감상을 도로 일으켜 내면서 에미랴에게로만 주의를 보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일마는 호텔에서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뒤미처 들어온 보이가 의외의 손님을 안내해 온 것이다.
 보이가 나가자 좀 있다 들어온 것은 뜻밖에도 남미려가 아니었던가.
 순간 일마는 입이 꽉 막히면서 선뜻 말을 내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입과 함께 가슴도 막혔던 것이다.
 "놀라셨지요?"
 손님이 도리어 먼저 인사의 말을 던졌을 때 일마는 겨우,
 "그러구 보니……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간밤에 왔더니 안 계시길래 오늘은 아침부터 왔죠. <대륙당>에서 물어서 이 곳을 알았어요."
 벽수를 놀라게 해서 그가 일부러 카바레까지 뙤어 주러 왔던 서울서온 여자 손님이라는 것은 바로 미려였던 것이다. 간밤에는 심드렁해서 냉큼 자리를 안 뜨던 일마도 지금 그를 눈앞에 맞이하고서는 사실 그 의외의 방문 에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밤새도록 생각했어두 날 찾아온 것이 미려씨일 줄은 종시 터득하지 못 한 걸요.
 일마의 솔직한 고백이 결국 반갑다는 뜻인지 귀찮다는 뜻인지 헤아리기 어려운 어조를 띠인 것이었다.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련만 반면에 귀찮다는 느낌도 없었을 것인가. 귀찮다느니보다도 위험하다는 기색이 얼굴에 떠돎을어쩌는 수 없었다. 그런 기색을 또 미려가 알아채지 못할 리도 만무했다.
 "당돌한 거동에 퍽이나 놀라셨겠지만 저로선 이러는 수밖에는 없었어요.
 혜주에게서 이리로 떠나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둘이서 생각하다 못해 눈 꾹 감구 저두 따라왔어요. 거추장스럽더래두 용서해 주세요."
 "거추장스러울 것이야 무엇 있겠습니까. 미려씨의 자유행동인데."
 
 일마의 당연한 말일 것이나 미려로서는 그 냉정하고 범연한 어조 속에 한 줄기 섭섭한 기맥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 무슨 다른 말이 있을 법도 하고있어도 좋을 것 같다.
 "뒤를 따라왔다면 선생께 책임을 씌우는 것 같아서 미안하나 ── 어떻게 됐든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은 아무데두 매일 곳 없는 자유로운 입장으로 왔다는 것예요. 남의 아내된 몸으로도 아니요, 가정에 매어 있는 몸으로도 아닌 ── 그 이전의 일개 자유인의 자격으로서 온 것예요. 너무 귀찮아하실것두 없구 엄청나 하실 것두 없으세요.."
 하고 미려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동안의 자기 일신의 사정 ── 남편 만해와의 절연과 법적 수속의 완성과 구속 없는 자유인의 생활의 시작 등의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흡사 일마에게 안심을 주고 그의 경계의 기색을 누그려 주자는 뜻인 듯도 했다.
 "무슨 자격으로 오셨든지 간에 이런 반지빠른 때 하얼빈 구경은 불찰이죠. 가을두 아니요 겨울두 아닌 이때, 거리는 엉성하구 볼 것이라구 변 변한게 어디 있어야죠."
 비유의 말로 비꼬아 말하면서 일마는 차차 내용의 실토로 들어가려는 것 이었다.
 "너무 늦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해결될 대로 해결된 뒤가 아닙니까. 미려씨에겐 최근 그런 가정적인 변동이 있어서 일신상에 큰 변화가 일어 나긴 했지만 그건 일종 우연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구 한가지의 목적을 위해서 의지적으로 가져온 것은 아니거든요. 결과가 뜻과 맞게 됐다구 하더래두 벌써 때는 늦었구 주의는 이렇게 침착하게들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알아요. 저두 그런 줄 알아요. 아니까 괴롭구 어쩔 줄 몰라 갈팡질팡 하는거죠."
 "가령 내가 지금 이 호텔 한 방에서 미려씨와 만나고 있는 것을 ── 물론 그 속에 아무 뜻이 없다구 하더래두 ── 가령 나아자가 안다면 그의 맘이 어떻구 우리를 뭐라구 생각하겠습니까. 더구나 난 지금 아내 나아 자를 바꿀 것 없이 사랑하구 있는 터이기두 하구…… "흡사 책망하는 것과도 같다. 미려는 낯이 화끈 달면서 뼈 속까지 아프다.
 그러나 무안한 마음대로 화를 내고 울고 할 격도 못됨이 미려의 슬픔인 것이다. 더욱 목소리를 부드럽히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게 결코 선생께 이 이상 더 폐를 끼치거나 누를 입히거나 하지는 않을 생각 이예요. 다만 여기까지 온 목적이 꼭 한가지 있어요. 낸들 지금 무슨 힘으로 한번 결정된 모든 것을 뒤엎어 놓구 바로잡구 하겠습니까. 힘도  없거니와 그럴 면목인들 있겠습니까. 다만 꼭 한 가지 선생께 물으러 ── 선생의 입으로 한마디를 들으러 이렇게 떠나온 것예요. 말 한마디 들으러 수천 리 길을 온 것이 지나쳐 비싼 대가인지는 몰라두 서울서는 그런 기회를 얻을 수두 없었구 먼 곳에서만 속임 없는 선생의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침착한 미려의 말이 한마디 한마디 가슴속에 배어 들면서 일마에게도 비로소 경건한 마음이 솟기 시작했다.
 "그래 그 한마디 말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그 말을 꺼내기엔 제게 지금 큰 용기가 필요해요."
 일마의 지금의 입장이 아무리 곤란하다고는 하더라도 미려는 그에게는 한 사람의 손님인 것이다. 손님 중에서도 강장 반가운 손님 이어야 한다.
 냉정하고 쌀쌀하게 하면서도 깊은 마음속은 속일 수 없었다. 경계하는 마음으로 그의 앞에서 얼굴을 찌푸려는 보았어도 그에게 대한 지난날의 회포를 어찌 순식간에 떨쳐 버릴 수야 있었을 것인가. 차차 놀랐던 마음도 풀리면서 일마는 부드러운 태도로 미려를 대하게 되었다. 그의 의젓한 자태 앞에서 저절로 마음이 부드러워 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호텔식당에서 이른 오찬을 나누면서 이제는 벌써 원래의 진객을 접대 하는 태도 였다. 한마디의 말만을 하면 좋다는 수월한 책임의 배당이 마음을 얼마간 가볍게 해준 탓이었는지 모른다.
 "얼른 그 한마디 말이라는 것을 들을까요."
 반드시 성급히 재촉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궁금증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조르시면 더욱 말하기 어려워져요. 천연스럽게 모르는 결에 말 하게 돼야 할텐데 ── 이러다간 주럽만 들면서 옳게 말하게 될 것 같지두 않아요."
 음식을 먹는 솜씨까지 서툴러지면서 미려는 사실 점점 몸과 마음이 굳어져가는 모양이었다.
 "오늘 하루의 시간을 온통 제게 못 주시겠어요."
 "벽수군에게두 잠깐 들려봐야 하겠구 그렇게 한가하진 못한데요."
 "오늘 하루만요. 더 원하지 않을께요."
 "벽수 말마따나 이러다간 짜장 남의 사건 보러 왔다가 되려 제 사건 일으키게나 되지 않을까."
 이것은 물론 일마 속으로의 생각이었으나 사실로도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얼삥삥했다.
 
 "그리구 거리에서 제일 조용한 데가 어딘지 그리로 반날 동안만 저를 안내 해 주실 수 없으실까요."
 "조용한 데라니요."
 "그런 곳만이 제게 용기를 줄 것 같아요. 그런 곳에서만 제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두 중대한 말인가요."
 "선생의 소중한 대답을 들으려니까 말예요."
 "어디가 제일 조용할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야 조용한 곳이라면 교외밖엔 없을 것 같고 교외 라면 그가 아는 범위로는 묘지같이 고요한 데가 없을 법했다. 번잡한 공원보다도 강변보다도 어디보다도 한적한 곳이 묘지이다. 여자의 가슴 속속 들이로 감추고 있는 그윽한 한마디를 들으러 묘지로 가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일마는 하는 수 없이 그날 하루는 미려에게 바치는 수밖에 없게 되어 < 대륙당>에도 들리지 못한 채 호텔을 나온 길로 미려와 함께 자동차로 묘지를 향 했다.
 도중에서 문득 생각하고 꽃가게에서 한 묶음의 꽃을 사들었다.
 나아자의 어머니의 무덤에 바치자는 뜻이었다. 차는 휑휑한 거리를 한달음에 달렸다.
 여름과는 얼마나 달라진 풍경이었던가. 조금 흐린 날이라 묘지의 오후는 괴괴하고 쌀쌀했다. 휘추리만 남은 수목이긴 하나 원체 빽빽이 들어선 까닭에 깊은 수풀 바다가 일목에 내다보였다.
 나무 그림자밖에 드러난 사당의 벽화도 앙상하게 보이고 지름길과 나무 아래 쌓이고 쌓인 낙엽도 이제는 벌써 색채도 형적도 없어져서 소슬한 기색이 구내에 그득히 넘쳐 있다. 백양나무의 흰 살결이 더욱 희게 눈을 끌고 느릅나무의 가는 회초리가 연필 글씨같이 자자분한 획을 허공에 그었다. 사람 없는 벤치도 차고 쓸쓸하다.
 미려에게는 그런 풍경이 처음이라 한층 소슬한 느낌을 금하지 못하여 자기의 쓸쓸한 말을 전하기에는 참으로 맞춤의 곳이 아닌가고 생각하는 것 이었다.
 일마는 나아자의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 비석 앞에 꽃을 꽂아 놓고는 안으로 멀리 곧게 뻗은 지름길을 더듬으며 미려를 돌아보았다.
 "조용한 곳이라면 이렇게 조용한 곳은 없을 텐데 ── 어서 그 말씀이라는 걸 해보시죠."
 "선생의 현재의 안온한 가정생활에 행여나 금이 나게 할 외람한 생각을  제가 어찌 먹구 있겠습니까. 그런 뜻이 아닌 까닭에 이렇게 선생을 찾을수 있었던 것이지 딴 맘이 있다면 무슨 멋으로 뵈러 왔겠습니까. 선생의 행복을 비는 정성으로야 누구에나 뒤질 것 없다구 생각해요."
 미려가 이렇게 현재의 사정을 새삼스럽게 뙤어주는 것이 일마에게는 되려 괴로운 노릇이었다. 바로 나아자와 그렇게 나란히 서서 걷던 묘지이다. 등뒤에는 나아자의 어머니의 무덤이 있고, 그 무덤이 지금 이 두사람의 자태를 감시나 하는 듯, 슬퍼나 하는 듯,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괴로운 처지를 일깨워 주는 것이 일마의 가슴을 겹겹으로 죄어 주는 폭밖에는 안되었다.
 "제 행복을 빌어 주신다는 건 고마운 말씀이나, 진정으로 제 행복을 생각 해 주시는 도리는 저를 다치지 말구 그대로 가만히 버려 두는 것입니다."
 "알아요. 그러니까 전 제 맘을 억제하구 정복하려구 얼마나 오랫동안 남모르게 싸워 왔는지 몰라요. 피투성이가 된 맘을 간신히 달래놓구 나서 저 두 제 길을 찾을려구 애쓰는 중이예요. 한눈을 판댔자 말씀마따나 시기가 늦은 이제 어쩌는 도리가 있어야죠. 다만 한가지 가슴속에 밝혀둘 것이 있어요. 그 한가지의 정리가 아마두 제게는 영원의 평화를 가져올는지두 몰라요."
 미려는 한참이나 사이를 떼면서 한숨이나 짓는 듯 고개를 드리우며 말을이었다.
 "그건 지난날에 관한 것예요. 벌써 칠년이 되는지 팔년이 되는지 제 맘 두 몸두 순결하던 그때 ── 제가 발을 빗디디어서 불행한 오늘의 길을 밟은건 허영이었든지 운명이었든지 모르겠으나 모든 것이 삐뚤어진 오늘 제 가가장 즐거운 것은 지난 그때를 생각함 이예요. 지난날을 맘속에 되풀이 하면서 아마도 앞으로는 그 추억 속에서만 살게 될것 같아요. 추억에 잠길 때 그때의 일마씨의 맘이라는 것을 생각 하게 돼요. 열정의 깊이라고 할까 ── 지금 가장알고 싶은 게 그것예요."
 "전 그때 노여워 했죠. 횟불을 가지구 오던 곳을 살러 버릴 수 있다면 그렇게래 두 하구 싶으리만치 분해하구 괴로워했죠. 어떻게 그런 격분이 지금까지 평온하게 사라졌나 생각하면 흡사 기적의 일만 같아요."
 "괴로워하구 분해 하셨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요."
 미려는 귀중한 실마리나 잡은 듯 조금 격해지면서 일마의 말꼬리를 조급하게 받치는 것이었다.
 "괴로워 하셨다면 저를…… ""………… " "저를 사랑하셨던가요."
 천근 같은 무게를 가지고 그 한마디가 떨어졌던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용기가 미려의 얼굴에 나타나 보였다. 그 한마디야 말로 미려의 듣고 싶어하고 알고 싶어하던 꼭 한 가지의 과제였다. 수천 리 길을 준비해 가지고 온 한마디라는 것이 바로 그 말이었던 것이다.
 "저를 사랑하셨던가요."
 재차 떠받치면서 어세가 급한 게 거의 재촉하는 듯도 하다. 용기라느니 보다도 일종 열정에 가까운 광채가 그의 눈동자에 빛났다.
 "사랑하니까 괴로워한 것이겠죠."
 일마가 겨우 무거운 입을 떼어 한마디 대답을 던졌을 때 미려는 거의 날뛰는 듯이,
 "사랑 ── 아! 듣구 싶던 말이 바로 그 말예요. 지금은 어찌 됐든 한때 저 를 사랑해 주었단 말이군요, 그 말을 들으러 이 먼길을 떠났던 것예요.
 오랫동안 듣구 싶던 말을 오늘에야 처음으로 들었어요. 이 이상의 만족은 없어요."
 흡사 소녀 같은 가벼운 걸음으로 땅을 구르면서 손을 뻗쳐 길가의 나뭇가지를 무의미하게 휘어잡곤 하는 것이었다. 일마는 그 미려의 양을 바라보면서 할말을 했는지 못할 말을 했는지 자기가 던진 한마디의 영향이 얼마나 큰가에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긴 지름길을 깊은 속까지 걸어 들어가니 수풀은 더욱 빽빽하고 느릅나무와 백 양 나무의 어울린 가지가 허공을 덮어 버릴 지경이다. 겹겹으로 쌓이고 쌓인 낙엽이 발아래에 푹신푹신 밟히고 찬 공기와 나무와 하늘만이 보이는 것이 흡사 깊은 산속에나 들어온 듯하다. 사람의 그림자는커녕 새소리조차 침묵 해서 괴괴한 그 속이 두 사람에게는 무인지경의 별천지인 느낌이 들었다.
 그 고요하고 쓸쓸한 수풀 속이 두 사람의 체온을 한줌 한줌 식혀주는 것도 같다. 가슴속에 솟는 것은 피차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아니고 도리어 침착과 안정이었다. 더욱이 일마는 옛 생각과 미려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달아지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침착해 가고 차졌다. 날이 몹시 추웠던 까닭 일까. 사실 그는 옷을 얇게 입었던 탓인지 거의 몸이 덜덜 떨릴 지경으로 추워짐을 느끼며 미려의 말도 감동하는 자태도 가슴속에 그대로 얼어붙는듯 하다. 발에 힘을 주고 어깨를 활짝 펴면서 고개를 쳐들었을때 나뭇가지 사이에 희끗 날리는 것이 있었다. 새털일까 하고 보고 있는 동안에 굵은 떡 가루같이 어느결엔지 부실부실 내려서 지름길과 어깨 위에도 떨어지기 시작  한다. 눈이었다. 거리의 첫눈이었다. 일마는 그 첫눈을 신기한 것으로 바라보면서 추위는 이 눈의 탓이려니만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려는 그 시절의 선물에 새삼스럽게 주의를 보내지는 않았다. 추위보다도 첫 눈보다도 마음속 일로 가슴이 그득 차서 여전히 말을 이었다.
 
 "제게는 경쟁자가 한 사람 있어요."
 다따가의 발설에 일마는 의아 하면서,
 "경쟁자라 니요."
 "일마씨를 두구 말예요. 누군지 아시겠어요 ── 단영이예요."
 "단영"
 "다 알구 있어요 ── 단영이 제게 그 동안 일을 말해 주었다나요. 청 하지두 않았는데 제 스스로 제 비밀을 죄다 털어놓았다나요."
 "비 비밀이라니, 무 무슨 비밀을."
 "그날 밤 단영의 아파트에서의 일 말예요."
 거기까지 말하는 미려는 조금 잔인한 것이었을까. 그 한마디에 일마는 금시 얼굴이 파랗게 질리면서 입술이 떨렸다.
 놀라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저두 사실 그것을 들은 당장에는 놀라구 구역질이 나서 불쾌한 느낌을 참지 못했어요. 그러나 모든 것이 성급하고 초조한 단영의 실책으로 말 매은 것이거니 생각하니 조금 노염두 풀렸어요. 지금은 벌써 남의 옛날 얘기만 같으면서 아무렇지두 않아요. 이렇게 심드렁하잖아요."
 "…………"
 "그리구 오늘 이상한 걸 발견했어요 ── 저와 경쟁자인 단영과의 어느 편으로 승부가 기울었나를 명확하게 발견한 것이예요. 어느편이 이겼겠어요. 지금 이렇게 제 맘이 기쁜 것은 제가 이긴 탓예요. 단영이 자기의 비밀을 숨김없이 말했을 때 전 속으로 오늘 이 결론을 알아내구야 말 것을 맹세 했었어요."
 "…………"
 "오늘 그것을 알았어도 제가 이긴 것예요. 일마씨가 사랑한건 단영이 아니라 저였어요. 아파트의 비밀쯤이 제겐 부러운 게 아니예요. 마음의 사랑 ── 비록 과거 한때의 것이었다구 해두 나를 영원히 기쁘게 해주는 건 그것에."
 부끄럽기만 하던 일마에게는 이제는 차차 미려의 그 감동과 열정이 두려운것으로 여겨졌다. 불덩어리 옆에나 서 있는 듯 위험한 생각이 들면서 미려의 존재에 겁조차 났다.
 
 "지금 제게 한마디의 말이 있다면 그건 감사의 말예요. 일마씨에게 드릴말은 감사의 말뿐예요. 사랑의 말이라는 것이 여자에게 얼마나 고마운 것 인지를 제가 똑바로 알려 드리는 것예요."
 "너무 흥분하지 마시오. 날두 추운데."
 미려의 과도의 흥분이 심상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아서 일마는 사실 진심으로 그의 몸을 걱정했다. 눈은 점점 내려서 이제는 벌써 나뭇가지 사 이로도 보얗게 내려지는 것이었다.
 호텔로 돌아온 미려는 묘지에서와는 달라 사람이 변한 듯 냉정하고 침착해졌다. 눈 내리는 수풀 속에서의 감동과 흥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고요한 표정에 말조차 적었다.
 행장이라고도 별로 없는 가벼운 몸에 잠시 동안의 여행이라 아무데서나 하룻밤을 지낼 생각으로 일마와 같은 호텔 한 간 방에 트렁크만을 맡겨 놓았던 것이다.
 일마에게는 그 하루는 벌써 그것으로 허비되고 채워진 셈이었다. 미려와의 반날로 말미암아 정신이 그 뜻하지 않은 충동으로 가득 차져서 남은 짧은 반날 마음의 고삐를 다른 곳으로 쉽사리 돌릴 수는 없었다. 미려의 던진 말과 그가 보인 표정과 태도가 마음속을 고집스럽게 지배하면서 다른 정신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그 분주하고 벅찬 마음으로는 그날 더 에미랴를 찾을수도 없는 것이요, 벽수의 일을 돌보아 주러 갈 여유도 없었다. 마지막 시간까지 미려와 동무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거리에도 눈이 보얗게 내리면서 행길을 어느덧 희끄무레 덮었다. 오 고가는 사람들은 그 첫눈을 기뻐하는 듯 조금도 발들이 삠하지 않으며 눈속을 번잡 하게 들 걸어간다. 일마는 몸이 으슬으슬해지고 추위를 느끼면서 우선 거리로 향한 객실에서 더운 차를 분부했다. 목을 녹이며 행길을 내다보노라니 차차 몸이 녹아갔다. 포도를 스쳐 지나는 남녀의 옆얼굴들을 내다보면서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 위에 얼굴을 대고 있는 미려도 추위가 풀려옴을 느끼는 것이었으나 ── 눈 오는 날 커피의 향기는 왜 그리도 슬픈 것인가. 묘지에서의 수다스럽던 미려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차를 마시는 지금의 미려는 한결같이 슬프고 고달픈 자태이다. 더운 김이 얼굴을 녹이고 막힐 듯이 코를 찌르면서 눈썹을 적시고 긴 속눈썹 끝에 맺힌다.
 일마에게서 듣고 싶던 마지막 말을 들었고 그에게 감사의 말을 보내고 난이 제 미려에게는 더 남은 일이 없고 여행의 목적은 그것으로서 다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수풀 속에서 기뻐했듯 그렇게 참으로 지금의 마음이 만족스러울 수 있었던가. 사랑의 말 한마디를 들었다고 그것으로서 만사가 해결  되고 마지막 만족에 도달한 것이었던가. 슬픔은 끝날 날이 없고 그러므로 인생은 영원히 서글픈 것이다.
 "제게 남은 일은 이젠 떠나는 것밖엔 없어요. 더 드릴 말두 없구 더 받을말두 없구 ── 여행의 목적은 완전히 끝났어요. 오늘밤으로래두 떠나겠어요."
 하는 말은 만족에서 온 것이 아니요, 슬픔에서 오는 말이다. 서글픈 체관에서 던진 마지막 비명과도 같은 것이다.
 "더 붙들어 둘 체면두 못됩니다만 ──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라구 생각 하시는 수밖엔요. 사람이 현재의 만족을 영원히 지탱해 가는 수야 있습니까. 불필요한 것은 잊어버림이 인생에 있어서는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를 미려씨가 몸소 밟아 뵈이셔야지 그렇지 않구야 무슨 도리가 있습니까."
 일마의 처지로 미려를 더 만류해 둘 수도 그에게 더 진지하게 이야기 할말도 없는 것이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피차에 한시라도 속히 작별 하는것 뿐이다 "어서 옷이나 갈아입고 내려오시죠. 만찬이나 같이하시게."
 미려를 방으로 올려보내고 식당 보이에게 최후의 만찬의 식탁을 준비 시켜놓은 후 일마는 거의 한 시간이나 기다렸을까. 시간이 훨씬 지나 식당에서는 번잡한 식사들이 시작되었건만 미려는 내려오지 않는다. 오 분 십분 더 기다리다가 일마는 하는 수 없이 층계를 올라가 미려의 방문을 두드려 보았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밀치고 들어가니 미려는 침대에 쓰러져 울고 있는것이 아닌가. 가만히 눈물만을 흘리는 것이 아니고 어깨를 떨며 얼굴을 펀 지르르 반죽하고 있는 것이다. 손을 대고 말을 걸 재주가 없다.
 "……잊어버리라니 어떻게 잊으란 말씀예요. 과거와 현재는 왜 그리 엄격한 것인가요. 그리구 미래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까 묘지에서 보이신 이상의 큰 용기요.
 그 용기로 모든 것을 잊고 분별을 가져야 합니다."
 일마의 말이 대체 미려의 귀에 들어나 갈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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