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8
여름 장날이 원래 그러하듯이,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지만 장터는 벌써 한산해졌습니다. 더운 햇빛이 천막 아래로 내리쬐며 사람들의 등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다 돌아갔고, 팔리지 않은 나무꾼들만 길거리에 남아 있습니다. 이들도 석유병이나 고깃덩어리 정도만 사면 만족할 사람들인지라 오래 버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파리 떼와 모기들도 귀찮게 날아다닙니다. 얼굴이 얽힌 데다 왼손잡이인 옷감장수 허생원은 동업자인 조선달에게 말합니다.
"이제 그만 정리할까?"
"잘 생각했네. 봉평장에서는 한 번도 기분 좋게 장사한 적이 없지.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어."
"오늘 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 거야."
"달이 밝으니 괜찮을 거야."
조선달이 오늘 번 돈을 세는 것을 보고, 허생원은 말뚝에서 넓은 천막을 걷고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명 필과 주단 바리가 두 상자에 꽉 차 있었습니다. 멍석 위에는 천조각들이 어수선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다른 장사꾼들도 거의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빨리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생선장수, 땜장이, 엿장수, 생강장수 등은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일은 진부와 대화에서 장이 서니, 이들은 어느 쪽으로든 밤을 새며 길을 가야 합니다. 장터는 잔치가 끝난 뒤의 마당처럼 어수선하게 벌어져 있었고, 술집에서는 싸움이 터졌습니다. 술 취한 사람들이 욕을 하고, 여자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장날 저녁은 항상 이런 소란스러운 분위기로 시작됩니다.
"생원, 시치미 떼지 마세요. 충주집 말이에요."
여자의 목소리에 문득 생각난 듯이 조선달이 웃습니다.
"화중지병이지. 어린애들이나 좋아하지."
"그렇지 않을걸. 장사꾼들이 그 집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왜 그 동이가 유독 그 집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감쪽같이 충주집을 유혹한 눈치예요."
"뭐야, 그 애송이가? 돈이라도 썼나 보지. 착실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알 수 없죠. 궁리 말고 가봅시다. 내가 한턱 쏠게요."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따라갔습니다. 허생원은 여자와는 인연이 멀었습니다. 얼굴이 얽혀 있어 여자를 대할 자신이 없었고, 여자들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충주집을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고 발이 떨리며 그 자리에 굳어버립니다. 충주집 문을 들어서서 술자리에서 동이를 만났을 때는 어찌나 화가 났는지, 동이가 여자와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동이에게 화를 내며 따귀를 때렸습니다. 동이도 화를 내며 일어섰지만, 허생원은 마음먹은 대로 다 말했습니다.
"어디서 굴러먹은 녀석인지 모르겠지만, 너도 부모가 있을 텐데 그 꼴 보면 좋아하겠냐? 장사란 제대로 해야지, 여자가 뭐냐? 나가라, 당장!"
동이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나갔고, 허생원은 그런 동이가 측은하게 느껴졌습니다. 너무 심했나 싶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충주집 여자는 술을 따르는 손길이 거칠었지만, 젊은이들에게는 약이 된다고 했습니다. 허생원은 술잔을 비우며 취해갔고, 동이의 뒷일이 궁금해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이가 헐레벌떡 와서 허생원을 부릅니다.
"생원, 당나귀가 난리가 났어요."
"아이들이 장난쳤겠지."
허생원은 동이의 마음씨에 가슴이 울렸습니다. 그는 장터로 달려갔습니다. 당나귀는 평생을 함께한 짐승으로, 둘은 서로 닮아 있었습니다. 허생원은 아이들을 쫓아내며 당나귀를 달랬습니다.
조선달과 동이는 제 나귀에 짐을 싣기 시작했습니다. 해는 이미 많이 기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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