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濕餘水습여수 沽河고하 鮑丘水포구수 濡水유수 大遼水대요수 小遼水소요수 浿水패수

2021.04.10

衛 지킬 위

調 고를 조, 뽑을 조, 아침 주
1. 고르다2. 뽑다3. 아침4. 선임(選任)함5. 적합(適合)하다

----------------------------

바이두 백과로 검색

 

軍都縣,隸屬上谷郡,在今北京市昌平區西南土城村。秦,設置。隸屬上谷郡。東漢時,改隸廣陽郡。故城在今北京市昌平區西南8.5公里的土城村。魏、晉,隸屬燕國。北魏,隸屬燕郡,時昌平縣並入軍都縣,軍都縣治徙今昌平縣東南40里之昌...
去網頁搜索:軍都縣

 

군도현(軍都縣)은 상곡군(上谷郡)에 속해 있으며, 현재 베이징시 창핑구(昌平區) 남서쪽 토성촌(土城村)에 있다. 진(秦)나라 때 설치되었다. 상곡군에 속했다. 동한(東漢) 때는 광양군(廣陽郡)에 속하게 되었다. 옛 도성은 현재 베이징시 창핑구 남서쪽 8.5킬로미터 떨어진 토성촌에 있다. 위(魏)나라와 진(晉)나라 때는 연국(燕國)에 속했다. 북위(北魏) 때는 연군(燕郡)에 속했으며, 이때 창평현(昌平縣)이 군도현에 병합되었고, 군도현의 치소는 현재의 창평현 동남쪽 40리의 장소로 옮겨졌다.
웹 검색: 군도현

 

 

 

-----------------

아래 3강 모두 어양군을 흐른다,

 

가.포구수는 어이진 북쪽 새 가운데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구장령 동쪽을 지나는데,

    세간에서는 대유하라고 한다.

나.고하는 어이진 서북쪽 90리 떨어진 단화령 아래에서 나오는데,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대곡수가 고하로 흘러든다.

다. 유수는 어이진 동남에서 나오는데

-------------------------------------------------------------

아래 검색 결과 포구수가  로현 옛성 서쪽을 지나는데, 그 로현 옛성은  현재 산서성 로성현 동북 40리에 위치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1.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潞縣'로현으로 검색한 결과.

潞縣 | 『中國古今地名大辭典』データベース:睡人亭 (shuiren.org)

 

潞縣

古潞子國。漢置潞縣。故城在今山西潞城縣東北四十里。後魏改刈陵。移治漳水北。城遂廢。

 

⦿漢置路縣。後漢改曰潞。以潞水爲名〔水經注〕鮑丘水逕潞縣故城西。〔寰宇記〕潞縣在幽州東六十里。本漢舊縣。〔通鑑〕「契丹旣強。寇抄諸州皆徧。幽州東十里之外。人不敢樵牧。趙德鈞爲節度使。於州東五十里。城潞縣而戍之。民始得耕稼。」今京兆通縣東八里甘棠鄕。有古城。蓋隋唐時潞縣治。五代唐移今通縣治。明廢。

 

⦿遼置。今闕。當在熱河巴林境。

 

분석:중국고금지명 대사전을 보면 한나라때 로현이 2개(潞와路)인 것으로 나온다.

漢置路縣。後漢改曰潞。以潞水爲名. 한나라때 로현路縣을 설치했고 후한때 로현潞縣으로 개명했는데 

로수'潞水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또 수경주 포구수편에 보면  鮑丘水入潞,通得潞河之稱矣。포구수가 로현으로 흘러드는데 그래서

 포구수가 로하라는 이름을 얻었다.

즉 전한의 로현潞縣과  로현路縣은 같은 것이다.

 

2. '潞水'로수로 검색

로수潞水가 탁장수濁漳水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潞水 | 『中國古今地名大辭典』データベース:睡人亭 (shuiren.org)

 

潞水

亦作潞川。卽今濁漳水。〔周禮職方氏〕翼州。川曰漳。浸曰汾潞。〔後漢書郡國志注〕潞。濁漳也

⦿見潞河條。

 

3. '潞河'로하로 검색

潞河 | 『中國古今地名大辭典』データベース:睡人亭 (shuiren.org)

 

潞河

即白河。爲北運河之上游。〔水經注〕「沽水俗謂之西潞水。鮑丘水世謂之東潞水。會流南逕潞縣爲潞河。」今尙稱北運河爲潞河。潞縣後漢置。明廢。故城在今京兆通縣東。

 

⦿在山西潞城縣北。源出縣東北二十里微子城。西北流入漳水。此水以在潞地。遂蒙潞名。非職方冀浸之潞也。

 

-------------------------------------------

嵐람~남기 람, 남기嵐氣는 산속에 생기는 

 

신당서 지리지에도 산서성에 로하가 있다고 기록.

新唐書卷三十九 志第二十九 地理三

新唐書/卷039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wikisource.org)

河東道,蓋古冀州之域,漢河東、太原、上黨、西河、鴈門、代郡及鉅鹿、常山、趙國、廣平國之地。

河中、絳、晉、慈、隰、石、太原、汾、忻、、澤、沁、遼為實沈分,代、雲、朔、蔚、武、新、嵐、憲為大梁分。

 

為府二,州十九,縣百一十。

其名山:雷首、介、霍、五臺其大川:汾、沁、丹、潞

厥賦:布、襺。厥貢:布、席、豹尾、熊鞹、鵰羽。

하동도는 대략  옛날 기주 지역이다. 한나라때  하동, 태원, 상당, 서하, 안문, 대군 및 거록, 상산,조국,광평국의 땅이다.

하중,강,진,자.,습,석,태원,분,흔, 로潞, 택, 심, 요를 실침분으로 하고,대,운,삭,울,무,신, 람, 헌을 대량분으로 한다.

 

2부를 두었고, 19주가 있으며,현은 110개다.
명산은:뇌수、개、곽、오대산이고, 큰 강은:분하、심수、단하、로하이다
부는:포、견.공은:포、석、표미、웅곽、조우이다.

-----------------------------------------------------------------------

2021.02.18

 

同歸동귀~돌아가 닿는 곳이 같음

絫루~포갤 루/동의자 累누~여러 누 ------------  藪수~덤불 수, 큰 늪 수/

狐~여우 호                               -------------  浸침~잠길 침/

薊계~삽주(엉거싯과에 속한 여러살이 풀) 계------峨아~산 높을 아,

翮핵,력~깃촉 핵, 세발솥 력          ----------------洞穴동혈~깊고 넓은 굴의 구멍, 터널,

淇기~강 이름 기                       ---------------- 鼓고~북 고,

洹원~강이름 원, 세차게 흐를 환.   -----------------聚취~모일 취,모을 취,

淶래~강이름 래                        ------------------累루,렵~묶을 루, 땅이름 렵,

橫횡~가로 횡, 가로지르다           ------------------恆항~항산 항, 恒의 本字,

堪감~견딜 감. 감당堪當 견디어내거나 받아 들임.

稻도~벼 도,                             -------------------奢사~사치할 사,豪奢호사:호화롭게사치함,

臼구~절구 구,찧다

㶟[lei]~강이름, 지금 하북성의 영정하

戾려~어그러질 려, 반려返戾/  返돌이킬반.

剌랄~어그러질 랄

堰언~둑 언,

遏알~막을 알

瀆독~도랑 독

㶟루~물이름 루, 삼수변에 田 3개

雒락~수리 부엉이 락, 강이름 락, 읍이름 / 雒陽=洛陽/

霍곽,사~빠를 곽/ 고을이름 사, 주周의 나라이름.

邯鄲한단

沮저~막을 저, 적실 저, 강이름 저,

沇연~강이름 연,연수(沇水)

滎형~실개천 형, 못이름,형, 하남성 형택현에 있는 못,

牖유~바라지 유, 들창 유,

扇선~부채 선, 문짝 선,

扉비~사립문 비,

悉실~다 실, 모두 실,

蓋개~덮을 개,

--------------------------------------------

左傳

공자(孔子)의 『춘추(春秋)』를 해설한 주석서이다. 『좌씨전(左氏傳)』, 『좌씨춘추(左氏春秋)』, 『좌전(左傳)』이라고도 한다.
『춘추』는 중국 최초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책으로 춘추시대(春秋時代, B.C. 770~476)에 일어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좌전 [左傳]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昭소~밝을 소, 밝히다. 소명昭明

-----------------------------------------

포구수

其《遏表》云:高梁河水者,出自并州,潞河之別源也。

그 알표에서 전하기를 "고량하는 병주에서 나오는데 로하의 다른 수원이다"

 

1.산서지집요(山西志輯要: 靑,1780)에는 고수(고하)는 소산(少山)의 고령(沽嶺)에서 나와서
낙평현(樂平) 북쪽을 지난다고 했다.
또 소산(少山)은 일명 고산(沽山)이라 했고, 청장수(淸漳水)가 고산에서 나온다고 했다.
즉 고하, 낙평 모두 산서성 지역에 있다.

 

2.수경주에서 고하는 어이진 서북쪽 90리 떨어진 단화령 아래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대곡수가 고하로 흘러든다.

이 강이 흐르면서 습여수와 포구수등과 합쳐져서 로하가 된다.

이 강의 위치만 파악하면 습여수와 포구수의 위치도 파악할 수있다.

또 고수는 동남 또는 남으로 흐르는 강이다. 즉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이기 때문에 동서로 흐르는 강은 고하가 아니다.

고수는 맨 마지막에는 동남으로 흘러서 청하와 만난다.

 

〈沽河又東南逕泉州縣故城東,王莽之泉調也。

沽水又東南合清河,今無水。清、淇、漳、洹、滱、易、淶、濡、沽、滹沱,同歸于海。故《經》曰派河尾也。〉

고수는 동남으로 흘러 천주현 옛성 동쪽을 지나는데  왕망의 천주이다.

고수는 동남으로 흘러 청하와 합해지는데 지금은 물이 없다.

 

청하, 기수,장수, 원수,구수, 역수,래수,유수,고하,호타하는 모두 모여서 바다로 들어간다.

고로 하천의 갈라진 꼬리라고 했다.

 

청수는 하내군 수무현 북쪽 흑산에서 나온다.

出河內隆慮縣西大號山,기수는 하내군 융려현 서쪽 대호산에서 나온다.

出上黨泫氏縣, 원수는 상당군 자씨현에서 나온다.(상당군은 산서성에 있다.)

出河內蕩陰縣西山東,탕수는 하내군 탕음현 서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른다.

 

4.포구수

又南過潞縣西, 포구수는 남쪽으로 흘러 로현 서쪽을 지난다.

 

鮑丘水入潞,通得潞河之稱矣。高梁水注之,

포구수는 로현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로하라는 명칭을 얻었다. 고량수가 포구수로 들어온다.

(중간 생략)

其《遏表》云:高梁河水者,出自并州,潞河之別源也

그 알표에서 전하기를 "고량하는 병주에서 나오는데 로하의 다른 수원이다"

 

--------------------------------------------------------------------------------------------

上党郡,秦置,屬並州。有上党關、壺口關、石研關,天井關。戶七萬三千七百九十八,口三十三萬七千七百六十六。

縣十四:長子,周史辛甲所封。鹿谷山,濁漳水所出,東至鄴入清漳。屯留,桑欽言「絳水出西南,東入海」。

餘吾,銅□,有上□亭,下□聚。沾,大黽穀,清漳水所出,東北至邑成入大河,過郡五,行千六百八十裏,冀州川。

涅氏,涅水也。襄垣,莽曰上黨亭。壺關,有羊腸阪。

 

沾水東至朝歌入淇첨수는 동으로 흘러 조가에 다달아 기수로 들어 간다.

泫氏,楊谷,絕水所出,南至野王入沁。高都,莞谷,丹水所出,東南入泫水。有天井關。潞,故潞子國

□氏,陽阿,穀遠。羊頭山世靡谷,沁水所出,東南至滎陽入河,過郡三,行九百七十裏。莽曰□近。

-----------------------------------------------------------------------------------------------

분석: 후한서 지리지 20권 군국2에 보면 기주가 나오는데 기주冀州 거록군鉅鹿郡은 낙양 북 1100리에 있으며,

거록군에는 석양정昔陽亭이 있는데, 두예가 말하기를 "첨현沾縣 동쪽에 석양성昔陽城이 있다"고 했다.

첨현沾縣은 산서성에 있는 곳으로 기주 冀州 역시 산서성 지역에 있었다.

석양昔陽은 수경주 청장수편에 나오는 지명이다.

 

또 수경주 청장수편을 보면,

"《淮南子》曰:清漳出謁戾山。高誘云:山在沾縣。今清漳出沾縣故城東北,俗謂之沾山

회남자왈 청장수는 알루산에서 나온다.

고유(『회남자주(淮南子注)』를 지은 후한때 사람)가 말하기를 알루산은 첨현에 있다.

지금의 청장수는 첨현 옛성 동북에서 나오는데 세속에서 첨산이라 부른다."

 

又南逕昔陽城。《左傳‧昭公十二年》,晉荀吳僞會齊師者,假道于鮮虞,遂入昔陽。

또 청장수는 남쪽으로 흘러 석양성을 지난다.

 

後漢書 《志》第二十
郡國二 豫州 冀州

後漢書/卷110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wikisource.org)

 冀州

鉅鹿郡,秦置。建武十三年省廣平國,以其縣屬。雒陽北千一百里。十五城,戸十萬九千五百一十七,口六十萬二千九十六。

기주 거록군은 진나라秦때 설치했다.

낙양 북쪽 1100리에 있다.

 

下曲陽,有鼓聚,故翟鼓子國。〈杜預曰縣西南有肥累城。古肥國,白狄別種。〉

거록군 하곡양에는 고취가 있다. 옛 곽고자국이다. 두예가 말하길 "하곡양현 서남쪽에 비루성이 있는데 옛 비국肥國이며,

백적의 별종이다.

 

有昔陽亭。〈左傳昭十二年晉荀吳入昔陽,杜預曰沾縣東有昔陽城。(取)〔肥〕故都也。

기주 거록군 하곡양에 석양정이 있다.

춘추좌전에서 전하길 진晉의 순오荀吳가 석양에 들어왔다.

두예가 말하길 "첨현 동쪽에 석양성이 있다"

 

(아래 중산국 위치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역사적 사실만 도움받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첨현의 위치는 산서성 태원 동남쪽에 있다)

 

중산국:

적족(狄族) 선우부(鮮虞部)는 초기에는 우타이산[五臺山] 남서부의 칭수이허[清水河] 유역에 살고 있었으나, 춘추시대의 정치적 혼란기에 허베이성[河北省] 중부의 스자좡[石家莊] 인근에 선우국(鮮虞國)을 세웠다. 기원전 530년부터 진(晋)의 장수인 순오(荀吳)의 공격을 받아 중인성이 함락되고, 연맹의 속국인 비(肥, 지금의 河北省 藁城)와 고(鼓, 지금의 河北省 晋州)가 진(晋)에 병합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기원전 507년 진(晉)의 평중(平中)으로 쳐들어가 진(軍)의 장수인 관호(觀虎)를 사로잡으며 크게 승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나라의 명칭을 '중산(中山)'으로 고쳤다.

중산국 (naver.com)

[네이버 지식백과] 중산국 [中山國] (두산백과))

 

 

分类:需要指定公元的紀年

 

zh.wikisource.org

趙國,秦邯鄲郡,高帝改名。雒陽北千一百里。五城,戸三萬二千七百一十九,口十八萬八千三百八十一。

 邯鄲,〈張華曰:「趙奢冢在邯鄲西山上,謂之馬服山。」〉有叢臺。〈有洪波臺。〉

  易陽,〈魏都賦曰:「溫泉毖涌而自浪。」

注曰:「溫泉在易陽,世以治疾,洗百病。」〉

"온천은 역양에 있다. 세상에서는 이것으로 질병을 치료하고,백가지 병을 씻는다" 했다

  襄國,本邢國,秦為信都,項羽更名。有檀臺。〈史記曰趙成侯,魏獻榮椽,因以為檀臺。〉有蘇人亭。

  柏人,

  中丘,〈晉地道記曰有石門塞、燒梁關。

-----------------------------------------------

한서지리지에 보면

漢書/卷028上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wikisource.org)

 

河內曰冀州:其山曰霍,藪曰揚紆,川曰漳,浸曰汾、潞;其利松、柏;民五男三女;畜宜牛、羊,穀宜黍、稷。

하내는 기주이다  산은 곽산이고,천은 장수이고,강은 분하와 로하다.

 

正北曰并州:其山曰恆山,藪曰昭餘祁,川曰虖池、嘔夷,浸曰淶、易;其利布帛;民二男三女;畜宜五擾,穀宜五種。

정북은 병주이다: 산은 강은 호타하

----------------------------------------------

 

 

대명여지도는 1536년 명나라 이묵이 작성.

Yu ti tsung t'u [China in Ming Dynasty] | Library of Congress (loc.gov)

 

미국 의회 도서관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대명여지도가 나온다.

여기서 19장중 6번째 이미지를 보면 산서성 지도가 자세히 나온다.

화순위의 반쪽만 나온 글자는 평정 낙평 소산少山이다.

 

아래는 명나라 때 제작된 대명여지도의 산서여도이다.

 

 

수경주에 고하(고수)라는 강이 있다.

고하는 어이진 서북쪽 90리 떨어진 단화령 아래에서 나오는데,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대곡수가 고하로 흘러든다.

(지도 좌측 왼쪽에 대곡大谷이 보인다.)

 

이 강이 흐르면서 습여수와 포구수등과 합쳐져서 로하가 된다.

이 강의 위치만 파악하면 습여수와 포구수의 위치도 파악할 수있다.

또 고수는 동남 또는 남으로 흐르는 강이다. 즉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이기 때문에 동서로 흐르는 강은 고하가 아니다.

고수는 맨 마지막에는 동남으로 흘러서 청하와 만난다.

 

또 청수는 기수와 만나서 동으로 흘러 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분석: 수경주에 고수가 맨 마지막에 청하와 만난다고 적혀있는데 수경주의 청하는 청수와 같은 강이다.

왜냐하면 수경주 청수편에 보면 청수가 기하구라고 했고, 수경주 고하편에는 청수와 기수가 만난다고 했다.)

 

청하, 기수,장수, 원수,滱, 역수,래수,유수,고하,호타하는 모두 모여서 바다로 들어간다.

고로 하천의 갈라진 꼬리라고 했다.

 

청수清水는 기수와 만난다.

出河內脩武縣之北黑山,

〈黑山在縣北白鹿山東,清水所出也>

 

又東入于河。

〈謂之清口,即淇河口也,蓋互受其名耳。>

----------------------------------------------------------

금사지리지 하동북로,석주 온천현에 원망산과 온천이 있다.

溫泉貞祐四年五月改隸汾州。有遠望山、溫泉。

온천현은 정우4년(1216년)에 분주에 속하게했다.

 

온천은 수경주 고하편에 나온다.

又東南逕溫泉東,泉在山曲之中

양락수는 동남쪽으로 흘러 온천 동쪽을 지난다. 온천은 산골짜기 중에 있다.

 

---------------------------------------------------------

淇水기수

出河內隆慮縣西大號山,기수는 하내군 융려현 서쪽 대호산에서 나온다.

屈從縣東北,與洹水合,기수는 원수와 합해진다.

又東北過廣宗縣東,爲清河,또 동북으로 흘러 광종현 동쪽을 지나는데, 청하라 부른다,

 

산서성의 지리를 적은 산서지집요(山西志輯要: 靑,1780)에는

"평정주 낙평현에 소산少山이 있다. 소산은 현 서남 25리에 있고
일명 고산沽山이라고 한다.
고수(고하)는 소산(少山)의 고령(沽嶺)에서 나와서 낙평현(樂平) 북쪽을 지난다고 했다.
또 소산(少山)은 일명 고산(沽山)이라 했다".

 

일단 고수는 산서성 태원 동남쪽 평정주 낙평현 첨산에서 나오는 물줄기로 파악합니다.
첨산=고산=고령=소산少山

근거는 위에 적어 놓은 산서지집요 "평정주 낙평현에 소산少山이 있다. 소산은 현 서남 25리에 있고
일명 고산沽山이라고 한다.
고수沽水는 소산의 고령沽嶺에서 나와 낙평현 북쪽을 지난다"라는 문구입니다.

또 여기에 "청장수가 소산에서 나온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즉 같은 소산(고산)에서 나오는 물줄기 중에 고수는 남쪽으로 흐르고, 청장수는 동쪽으로 흐릅니다.
청장수 물줄기는 모두 다 알고 있으나 고수의 물줄기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물줄기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양, 상곡등의 올바른 위치가 나옵니다.

수경주 청장수편 앞부분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出上黨沾縣西北少山大要谷,南過縣西,又從縣南屈,
청장수는 상당군 첨현 서북 소산 대요곡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첨현 서쪽을 지난다.
또 첨현 남쪽을 가로지른후 꺾인다.

 

出上黨沾縣西北少山大要谷,南過縣西,又從縣南屈,

청장수는 상당군 첨현 서북 소산 대요곡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첨현 서쪽을 지난다.

또 첨현 남쪽을 가로지른후 꺾인다.

 〈《淮南子》曰:清漳出謁戾山。高誘云:山在沾縣。今清漳出沾縣故城東北,俗謂之沾山。

회남자왈 청장수는 알루산에서 나온다.
고유(『회남자주(淮南子注)』를 지은 후한때 사람)가 말하기를 알루산은 첨현에 있다.
지금의 청장수는 첨현 옛성 동북에서 나오는데 세속에서 첨산이라 부른다.

 後漢分沾縣爲樂平郡,治沾縣。水出樂平郡沾縣界。
후한때 첨현을 나누어 낙평군으로 삼고 첨현에 치소를 두었다. 청장수는 낙평군 첨현 경계에서 나온다.

 故《晉太康地記》曰:樂平縣舊名沾縣。漢之故縣矣。
옛 태강지리지왈 낙평현의 옛이름이 첨현이었다. 한의 옛현이다.
 
其山亦曰鹿谷山,水出大要谷,南流逕沾縣故城東,不歷其西也。
첨산은 녹곡산이라고도 부른다. 청장수가 대요곡에서 나온다.

 又南逕昔陽城。《左傳‧昭公十二年》,晉荀吳僞會齊師者,假道于鮮虞,遂入昔陽。
또 청장수는 남쪽으로 흘러 석양성을 지난다.

 

---------------------------------------------------------

미국 국회도서관

Huang chao yi tong yu di quan tu | Library of Congress (loc.gov)

황조일통여지전도 皇朝一統與地全圖

 

-----------------------------------------------

 

https://zh.wikisource.org/wiki/水經注/14

水經注卷十四  濕餘水습여수 沽河고하 鮑丘水포구수 濡水유수 大遼水대요수 小遼水소요수 浿水패수

 

濕餘水 습여수

[수경]

出上谷居庸關東,습여수는 상곡군 거용관 동쪽에서 나온다.

 

[주]

〈關在沮陽城東南六十里居庸界,故關名矣。거용관은 저양성 동남 60리 거용 경계에 있는데,  옛 관명이다.

更始使者入上谷,耿況迎之于居庸關,即是關也。其水導源關山,南流歷故關下。

한漢 경시제(재위 AD23-AD25년)가 사신을 상곡으로 보냈을 때, 경황(상곡태수)이 거용관에서 맞이하였는데,

이곳이 그 관이다.

습여수는 물줄기를 거용관 산에서 받는데, 남쪽으로 흘러 옛 거용관 아래를 지난다.

 

(분석:한 경시제 유현(漢 更始帝 劉玄, ? ~ 25년)은 중국 현한의 황제로, 는 성공(聖公)이며 형주 남양군 채양현 사람이다. 전한 경제의 6대손이자 후한 광무제의 족형이다. 녹림군에서 추대된 황제로, 신나라 멸망 후 정권을 잡았으나 실정으로 인해 적미군이 유분자를 황제로 추대하면서 정권이 붕괴돼 제위에서 물러났다. 적미군에게 살해된 후, 적미군까지 몰아내고 전 중국을 통일한 후한 광무제가 회양왕(淮陽王)으로 추증했다.)

 

溪之東岸有石室三層,其戶牖扇扉,悉石也,蓋故關之候臺矣。

계곡수의 동쪽 언덕에 석실 3층이 있는데, 석실마다 들창문과 사립문이 있으며, 모두 돌이다.

대개 옛 거용관의 망루이다.(牖유~바라지 유, 들창 유, ---扇선~부채 선, 문짝 선,

扉비~사립문 비,---悉실~다 실, 모두 실,---蓋개~덮을 개,)

 

南則絶谷,累石爲關垣,崇墉峻壁,非輕功可舉,山岫層深,側道褊狹,林鄣邃險,路才容軌,曉禽暮獸,寒鳴相和,羈官遊子,聆之者莫不傷思矣。

남쪽으로는 깊은 계곡이 끊어져 있고, 돌을 쌓아 만든 관의 담장이 있다. 높은 성벽과 가파른 절벽은 쉽게 넘을 수 없는 곳이다. 산봉우리는 겹겹이 깊고, 좁은 길은 협소하며, 숲은 깊고 험준하여 길은 겨우 수레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이다. 아침의 새소리와 저녁의 짐승 울음소리가 차가운 소리로 서로 어우러져 있다. 이곳을 지나가는 관료나 나그네들은 그 소리를 들으며 모두 시름에 잠기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其水歷山南逕軍都縣界,又謂之軍都關。

습여수는 산 남쪽을 지나 군도현 경계를 지나는데, 또 이것을 군도관이라고 부른다.

 

《續漢書》曰:尚書盧植隱上谷軍都山是也。其水南流出關,謂之下口,水流潛伏十許里也。〉

속한서(후한서 군국지)에서 말하기를" 상서에 노식이 상곡 군도산에 은거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이다"

습여수는 남쪽으로 흘러 군도관을 나가는데 하구라고 불린다. 

물이 숨어서 10리를 흐른다.(潛伏잠복~겉으로 들어나지 않게 숨움)

 

[수경]

東流過軍都縣南,又東流過薊縣北,동쪽으로 흘러 군도현 남쪽을 지나고, 또 동으로 흘러 계현 북쪽을 지난다.

 

[주]

〈濕餘水故瀆東逕軍都縣故城南,又東,重源潛發,積而爲潭,謂之濕餘潭。又東流,易荊水注之,其水導源西北千蓼泉,亦曰丁蓼水,東南流逕鬱山西,謂之易荊水。公孫瓚之敗于鮑丘也,走保易荊,疑阻此水也。易荊水又東,左合虎眼泉水,出平川,東南流入易荊水。

 

〈습여수(濕餘水) 옛 독(瀆)이 동쪽으로 군도현(軍都縣) 옛 성 남쪽을 지나 다시 동쪽으로 흐른다. 중원(重源)에서 잠시 발원하여 모여서 못을 이루는데, 이를 습여담(濕餘潭)이라고 한다. 다시 동쪽으로 흘러 이형수(易荊水)가 합류한다. 그 물은 서북쪽의 천료천(千蓼泉)에서 발원하여, 또한 정료수(丁蓼水)라고도 하며, 동남쪽으로 흘러 울산(鬱山) 서쪽을 지나는데, 이를 이형수(易荊水)라 부른다. 공손찬(公孫瓚)이 보구(鮑丘)에서 패하여 도망쳐 이형(易荊)을 지키려 했으나, 이 물로 인해 막혀 주저하였다. 이형수는 다시 동쪽으로 흘러 왼쪽에서 호안천수(虎眼泉水)와 합류하는데, 이 물은 평천(平川)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이형수에 합류한다.

 

又東南與孤山之水合,水發川左,導源孤山,東南流入易荊水,謂之塔界水。又東逕薊城,又東逕昌平縣故城南,又謂之昌平水。《魏土地記》曰:薊城東北百四十里有昌平城,城西有昌平河,又東流注濕餘水。濕餘水又東南流,左合芹城水,水出北山,南逕芹城,東南流注濕餘水。濕餘水又東南流逕安樂故城西,更始使謁者韓鴻北徇,承制拜吳漢爲安樂令,即此城也。〉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고산(孤山)의 물과 합류하는데, 이 물은 천좌(川左)에서 발원하여 고산에서 흘러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이형수(易荊水)에 합류하며, 이를 탑계수(塔界水)라 부른다. 다시 동쪽으로 흘러 계성(薊城)을 지나, 다시 동쪽으로 흘러 창평현(昌平縣) 옛 성 남쪽을 지나며, 이를 창평수(昌平水)라고도 한다. 《위토지기(魏土地記)》에 따르면, 계성 동북쪽 140리에 창평성이 있으며, 성 서쪽에 창평하(昌平河)가 있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습여수(濕餘水)에 합류한다고 한다. 습여수는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왼쪽으로 근성수(芹城水)와 합류하는데, 이 물은 북산(北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근성(芹城)을 지나 동남쪽으로 흘러 습여수에 합류한다. 습여수는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안락(安樂) 옛 성 서쪽을 지나는데, 경시제(更始帝)가 한홍(韓鴻)을 사자로 보내 북쪽을 순찰하게 하여, 제수를 받아 오한(吳漢)을 안락령(安樂令)으로 임명한 곳이 바로 이 성이다.

 

[수경]

又北屈東南至狐奴縣西,入于沽河。

북쪽으로 흐르다가 꺾여서 동남으로 흘러 호노현 서쪽에 다다른후 고하로 들어 간다

 

[주]

〈昔彭寵使狐奴令王梁南助光武,起兵自是縣矣。濕餘水于縣西南東入沽河。

故《地理志》曰:濕餘水自軍都縣東,至潞南入沽是也。〉   

  옛날 팽총(彭寵)이 호노현(狐奴縣)의 현령 왕량(王梁)을 남쪽으로 보내 광무제(光武帝)를 도와 군사를 일으킨 곳이 바로 이 현(縣)이다. 습여수(濕餘水)는 현(縣) 서남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고하(沽河)로 들어간다.

옛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습여수가 군도현 동쪽에서 나와,  로현 남쪽에 도달하여 고하로 들어간다.

 

沽河[编辑]

 

[수경]

從塞外來,고하는 새외에서 나온다. 

 

[주]

〈沽河出禦夷鎮西北九十里丹花嶺下,東南流,大谷水注之。水發鎮北大谷溪,西南流,逕獨石北界,石孤生,不因阿而自峙。

고하는 어이진 서북쪽 90리 떨어진 단화령 아래에서 나오는데,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대곡수가 고하로 흘러든다.

대곡수는 어이진 북쪽 대곡계에서 나오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독석 북쪽 경계를 지난다.

 

又南,九源水注之,水導北川,左右翼注,八川共成一水,故有九源之稱。其水南流,至獨石注大谷水。大谷水又南逕獨石西,又南逕禦夷鎮城西,魏太和中,置以捍北狄也。

또한 남쪽으로, 구원수(九源水)가 합류하는데, 이 물은 북천(北川)에서 발원하여 좌우의 여러 물줄기가 함께 흘러들어, 여덟 개의 물줄기가 하나의 물을 이루기 때문에 구원(九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물은 남쪽으로 흘러 독석(獨石)에서 대곡수(大谷水)에 합류한다. 대곡수는 다시 남쪽으로 흘러 독석(獨石) 서쪽을 지나고, 또 남쪽으로 흘러 어이진성(禦夷鎮城) 서쪽을 지난다. 위(魏)나라 태화(太和) 연간에 북적(北狄)을 막기 위해 이 성을 설치하였다.

 

又東南,尖谷水注之,水源出鎮城東北尖溪,西南流逕鎮城東,西南流注大谷水,亂流南注沽水。又南出峽,夾岸有二城,世謂之獨固門。以其藉險憑固,易爲依據,巖壁升聳,疎通若門,故得是名也。

 

또한 동남쪽으로 가면 첨곡수(尖谷水)가 합류하는데, 이 물은 진성(鎮城) 동북쪽 첨계(尖溪)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진성 동쪽을 지나고, 남서쪽으로 흘러 대곡수(大谷水)에 합류한다. 물길이 혼합되어 남쪽으로 흘러 고수(沽水)에 합류한다. 또한 남쪽으로 협곡을 빠져나가는데, 양쪽 기슭에 두 개의 성이 있어, 세상에서는 이를 독고문(獨固門)이라고 부른다. 이는 그 지형이 험준하여 의지하기 쉬운 곳이기 때문이며, 암벽이 솟아오르고 문처럼 통로가 뚫려 있어 이 이름을 얻게 되었다.

 

沽水又南,左合乾溪水,引北川西南逕一故亭東,又西南注沽水。沽水又西南逕赤城東,趙建武年,并州刺史王霸爲燕所敗,退保此城。城在山阜之上,下枕深隍,溪水之名,藉以變稱,故河有赤城之號矣。

 

고수(沽水)는 다시 남쪽으로 흘러, 왼쪽에서 건계수(乾溪水)와 합류한다. 건계수는 북천(北川)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한 옛 정자(亭) 동쪽을 지나, 다시 남서쪽으로 흘러 고수에 합류한다. 고수는 다시 남서쪽으로 흘러 적성(赤城) 동쪽을 지나는데, 조 건무(趙建武) 연간에 병주(并州) 자사(刺史) 왕패(王霸)가 연나라(燕)에게 패하여 퇴각하여 이 성을 지켰다. 성은 산 언덕 위에 위치하여, 아래로는 깊은 구덩이를 끼고 있다. 계곡의 물 이름을 따서 변칭하였기 때문에 강을 적성(赤城)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沽水又東南與鵲谷水合,水有二源,南即陽樂水也,出且居縣。《地理志》曰:水出縣東,南流逕大翮山小翮山北,歷女祁縣故城南。《地理志》曰:東部都尉治,王莽之祁縣也。

고수는 동남으로 흘러 작곡수와 합해진다. 작곡수 수원은 2개인데 남쪽 물줄기가 양락수이고,

(상곡군) 차거현(且居縣)에서 나온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양락수는 차거현의 동쪽에서 나오는데 남쪽으로 흘러 대핵산大翮山과 소핵산小翮山 북쪽을 지나고,  여기현女祁縣 옛 성의 남쪽을 지난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동부도위東部都尉가 다스리고 왕망의 기현祁縣이라 하였다.

 

世謂之橫水,又謂之陽田河。又東南逕一故亭,又東,左與候鹵水合,水出西北山,東南流逕候鹵城北,城在居庸縣西北二百里,故名云候鹵,太和中,更名禦夷鎮。

又東南流注陽樂水。

 

세간에서는 양락수를 횡수横水라 하며 또한 양전하陽田河라고도 한다. 양락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옛 정자 하나를 지나고 또한 동쪽으로 흐르다가 왼쪽에서 후로수候鹵水와 합류한다.

후로수는 서북산에서 나오는데 동남으로 흘러 후로성 북쪽을 지난다. 후로성은 거용현 서북 2백리에 있다.

옛 이름은 후로이고 태화중에 어이진으로 개명했다.

또 동맘으로 흘러 양락수로 들어간다.

 

陽樂水又東南傍狼山南,山石白色特上,亭亭孤立,超出羣山之表

 

又東南逕溫泉東,泉在山曲之中。

양락수는 동남쪽으로 흘러 온천 동쪽을 지난다. 온천은 산골짜기 중에 있다.

 

又逕赤城西,屈逕其城南,東南入赤城河

양락수는 적성 서쪽을 지난후 굴절하여 적성 남쪽을 지난후, 동남으로 흘러 적성하로 들어 간다.

 

河水又東南,右合高峯水,水出高峯戍東南,城在山上,其水西南流,又屈而東南,入沽水。沽水又西南流出山,逕漁陽縣故城西,而南合七度水。水出北山黃頒谷,故亦謂之黃頒水,東南流注于沽水。

 

적성하는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오른쪽에서 고봉수(高峯水)와 합류한다. 고봉수는 고봉수(高峯戍)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성은 산 위에 위치하고, 그 물은 남서쪽으로 흘러 다시 굽어 동남쪽으로 흘러 고수(沽水)에 합류한다. 고수는 다시 남서쪽으로 흘러 산을 빠져나와, 어양현(漁陽縣) 옛 성 서쪽을 지나 남쪽으로 칠도수(七度水)와 합류한다. 칠도수는 북산 황반곡(黃頒谷)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황반수(黃頒水)라고도 하며, 동남쪽으로 흘러 고수에 합류한다.

 

沽水又南,漁水注之,水出縣東南平地泉流,西逕漁陽縣故城南,應劭曰:在漁水之陽也。考諸地說,則無聞;脈水尋川,則有自。今城在斯水之陽,有符應說,漁陽之名當屬此,秦發閭左戍漁陽,即是城也。漁水又西南入沽水

 

고수(沽水)는 다시 남쪽으로 흘러 어수(漁水)와 합류한다. 어수는 현(縣) 동남쪽 평지에서 샘물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어양현(漁陽縣) 옛 성 남쪽을 지난다. 응소(應劭)는 "어수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여러 지리에 관한 설명을 조사해보면 이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물길을 따라 살펴보면 근거가 있다. 지금 성은 이 물의 북쪽에 있으며, 응소의 설명과 일치한다. 어양(漁陽)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가 어양에 있는 성으로 부역민을 보내 수비하게 한 것이 바로 이 성이다. 어수는 다시 남서쪽으로 흘러 고수에 합류한다.

 

沽水又南與螺山之水合,水出漁陽城南小山。《魏土地記》曰:城南五里有螺山,其水西南入沽水。

沽水又南逕安樂縣故城東,《晉書‧地道記》曰:晉封劉禪爲公國。俗謂之西潞水也。〉

고수(沽水)는 다시 남쪽으로 흘러 나산(螺山)의 물과 합류한다. 이 물은 어양성(漁陽城) 남쪽의 작은 산에서 발원한다. 《위토지기(魏土地記)》에 따르면, "성 남쪽 5리에 나산(螺山)이 있으며, 그 물이 남서쪽으로 흘러 고수에 합류한다."고 하였다.
고수는 다시 남쪽으로 흘러 안락현(安樂縣) 옛 성 동쪽을 지난다. 《진서‧지도기(晉書‧地道記)》에 따르면, "진나라가 유선(劉禪)을 봉하여 공국(公國)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속칭으로는 이를 서로수(西潞水)라고도 한다.

 

(분석:유선(劉禪, 207년 ~ 271년)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유선은 촉한의 제2대이자 마지막 황제 )

 

[수경]

南過漁陽狐奴縣北,西南與濕餘水合,爲潞河; 

고하는 남으로 흘러 어양군 호노현 북쪽을 지나는데,

서남으로 흘러 습여수와 합해지는데 로하라고 하였다.

 

[주]

〈沽水西南流逕狐奴山西,又南逕狐奴縣故城西。漁陽太守張堪,于縣開稻田,教民種殖,百姓得以殷富。

고수 서남으로 흘러 호노산 서쪽을 지난다. 또 남쪽으로 흘러 호노현 옛성 서쪽을 지난다.

어양태수(漁陽太守) 장감(張堪)은 현(縣)에서 논을 개간하고, 백성들에게 벼를 심도록 가르쳐, 백성들이 이를 통해 부유해졌다.

 

童謠歌曰:桑無附枝,麥秀兩岐,張君爲政,樂不可支。視事八年,匈奴不敢犯塞。

沽水又南,陽重溝水注之,水出狐奴山,南轉逕狐奴城西,王莽之所謂舉符也。側城南注,右會沽水。

 

동요에 이르길, "뽕나무에 곁가지 없고, 보리는 두 갈래로 무성하네. 장군(張君)이 다스리니 즐거움이 끝이 없네."라 하였다. 장감이 8년 동안 재임하는 동안 흉노가 감히 변방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고수(沽水)는 다시 남쪽으로 흘러, 양중구수(陽重溝水)와 합류한다. 이 물은 호노산(狐奴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돌아 호노성(狐奴城) 서쪽을 지난다. 왕망(王莽)이 이를 거부(舉符)라고 불렀다. 성 남쪽을 지나, 오른쪽에서 고수와 합류한다.

 

沽水又南,濕餘水注之。沽水又南,左會鮑丘水,世所謂東潞也。沽水又南逕潞縣爲潞河。     

고수는 또 남쪽으로 흐른다. 습여수가 고수로 흘러 들어온다. 고수는 또 남쪽으로 흐르는데 왼쪽에서 포구수가 흘러든다. 세속에서 이를 동로수라 부른다. 고수는 또 남쪽으로 흘러  로현을 지나는데 이를  로하라 부른다.

 

《魏土地記》曰:城西三十里有潞河是也。〉 위토지기에서 말하길 로현성 서쪽 30리에 로하가 있다.

 

[수경]

又東南至雍奴縣西,爲笥溝; 또 동남으로 흘러 옹노현 서쪽에 다다르는데  사구라고 한다.

[주]

〈濕水入焉,俗謂之合口也。又東,鮑丘水於縣西北而東出。〉

습수가 사구로 흘러드는데, 세속에서는 합구라고 부른다. 또 동쪽에서 포구수가 호노현 서북에서 동쪽으로 나온다.

 

[수경]

又東南至泉州縣,與清河合,東入于海。清河者,派河尾也。

또 고수는 동남으로 흘러 천주현에 도달하여 청하와 합해져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청하는 갈라진 하천의 꼬리 부분이다.

 

[주]

〈沽河又東南逕泉州縣故城東,王莽之泉調也。

沽水又東南合清河,今無水。清、淇、漳、洹、滱、易、淶、濡、沽、滹沱,同歸于海。故《經》曰派河尾也。〉

고수는 동남으로 흘러 천주현 옛성 동쪽을 지나는데  왕망의 천주이다.

고수는 동남으로 흘러 청하와 합해지는데 지금은 물이 없다.

 

청하, 기수,장수, 원수,滱, 역수,래수,유수,고하,호타하는 모두 모여서 바다로 들어간다.

고로 갈라진 하천의 꼬리라고 했다.

 

鮑丘水[编辑]

[수경]

從塞外來,南過漁陽縣東,포구수는 새외에서 들어와 남으로 흘러 어양현 동쪽을 지난다.

 

[주]

〈鮑丘水出禦夷北塞中,南流逕九莊嶺東,俗謂之大榆河

포구수는 어이진 북쪽 새 가운데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구장령 동쪽을 지나는데,

세간에서는 대유하라고 한다.

 

又南逕鎮東南九十里西密雲戍西,又南,左合道人溪水,水出北川,南流逕孔山西,又歷密雲戍東,左合孟廣𡶭水

또 남으로 흘러 어이진 동남쪽 90리에 있는 서밀운의 수비성 서쪽을 지난다.

또 남쪽으로 흐르다가 왼쪽에서 도인계수와 합류한다. 도인계수는 북천에서 나온후, 남쪽으로 흘러 공산孔山 서쪽을 지나고 나서, 또 밀운密雲의 수비성 동쪽을 지나는데, 왼쪽(동쪽)에서 맹광형수가 합류한다.

 

水出𡶭下,𡶭甚層峻,峨峨冠衆山之表。其水西逕孔山南,上有洞穴開明,故土俗以孔山流稱。

맹형광수는 형산 아래에서 나오는데, 형산은 심히 험준하고, 높은 산의 표본이다.

맹형광수는 서쪽으로 흘러 공산 남쪽을 지나는데, 공산 정상에는 터널같은 밝은 동굴이 있다.

 

𡶭水又西南至密雲戍東,西注道人水,亂流西南逕密雲戍城南,右會大榆河,有東密雲,故是城言西矣。

형수는 서남으로 흘러 밀운 수비성 동쪽에 도달하고, 서쪽에서 도인수가 흘러든다.

난류가 되어 서남으로 흘러 밀운 수비성 남쪽에 도달한후 오른쪽에서 대유하와 만난다.

 

大榆河又東南流,白楊泉水注之,北發白楊溪,望離,右注大榆河。

대유하는 또 동쪽으로 흐르는데 백양천수가 대유하로 흘러든다. 백양천수는 북쪽 백양계에서 나오는데 오른쪽에서 대유하로 흘러든다.

 

又東南,龍芻溪水自坎注之。大榆河又東南出峽,逕安州舊漁陽郡之滑鹽縣南,左合縣之北溪水,水出縣北廣長塹南,太和中,掘此以防北狄。其水南流逕滑鹽縣故城東,王莽更名匡德也,漢明帝改曰鹽田,右承治,世謂之斛鹽城,西北去禦夷鎮二百里。南注鮑丘水,又南逕傂奚縣故城東,王莽更之曰敦德也。鮑丘水又西南逕獷平縣故城東,王莽之所謂平獷也。又南合三城水,水出臼里山,西逕三城,謂之三城水。又逕香陘山,山上悉生槀本香,世故名焉。又西逕石窟南,窟內寬廣,行者依焉;窟內有水,淵而不流,栖薄者取給焉。又西北逕伏凌山南,與石門水合,水出伏凌山,山高峻,巖鄣寒深,陰崖積雪,凝冰夏結,事同《離騷》峨峨之詠,故世人因以名山也。一水西南流注之,是水有桑谷之名,蓋沿出桑溪故也。又西南逕獷平城東南,而右注鮑丘水。鮑丘水又東南逕漁陽縣故城南,漁陽郡治也。秦始皇二十二年置,王莽更名通潞,縣曰得漁。鮑丘水又西南流,公孫瓚既害劉虞,烏丸思劉氏之德,迎其子和,合衆十萬,破瓚于是水之上,斬首一萬。鮑丘水又西南歷狐奴城東,又西南流注于沽河,亂流而南。〉

 

[수경]

又南過潞縣西,또 포구수는 남쪽으로 흘러 로현 서쪽을 지난다.

 

[주]

〈鮑丘水入潞,通得潞河之稱矣。高梁水注之,水首受㶟水於戾陵堰,水北有梁山,山有燕剌王旦之陵,故以戾陵名堰。

水自堰枝分,東逕梁山南,又東北逕《劉靖碑》北。

 

포구수는 로현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로하라는 명칭을 얻었다. 고량수가 포구수로 들어온다. 

고량수는 물머리를 려릉언에 있는 루수에서 받는데, 고량수 북쪽에 양산이있다.

양산에는 연랄왕 유단의 능이 있는데 려릉(戾陵)을 언(堰)이라 이름하였다.

고량수(水)는 려릉언(堰)에서 나뉘어 동쪽으로 흘러 양산(梁山) 남쪽을 지나고,

또한 동북쪽으로 흘러 류정비(劉靖碑)의 북쪽을 지난다.

(분석:유정 劉靖~동해정왕 유정(東海靖王 劉政, ? ~ 102년)은 후한 중기의 황족·제후왕으로, 동해왕이다.                

광무제의 장남 동해공왕의 아들이다-->이 유정이 아닌것 같음))  

 

其詞云:魏使持節都督河北道諸軍事征北將軍建城鄉侯沛國劉靖,字文恭,

유정비문에서 말하길: 위 사지절도독 하북도 제군사정북장군 건성향후 패국 유정은, 자가 문공인데,

 

登梁山以觀源流,相㶟水以度形勢,嘉武安之通渠,羨秦民之殷富。

양산에 올라 고량수의 근원을 바라보니,

 

㶟水乃使帳下丁鴻,督軍士千人,以嘉平二年,立遏於水,導高梁河,造戾陵遏,開車箱渠。

其《遏表》云:高梁河水者,出自并州,潞河之別源也

그 알표에서 전하기를 "고량하는 병주에서 나오는데 로하의 다른 수원이다"

 

長岸峻固,直截中流,積石籠以爲主遏,高一丈,東西長三十丈,南北廣七十餘步。依北岸立水門,門廣四丈,立水十丈。山水暴發,則乘遏東下;平流守常,則自門北入。灌田歲二千頃。凡所封地,百餘萬畮。至景元三年辛酉,詔書以民食轉廣,陸廢不贍,遣謁者樊晨更制水門,限田千頃,刻地四千三百一十六頃,出給郡縣,改定田五千九百三十頃。水流乘車箱渠,自薊西北逕昌平,東盡漁陽潞縣,凡所潤含,四五百里,所灌田萬有餘頃。高下孔齊,原隰底平,疏之斯溉,決之斯散,導渠口以爲濤門,灑滮池以爲甘澤,施加于當時,敷被于後世。晉元康四年,君少子驍騎將軍平鄉侯弘,受命使持節監幽州諸軍事,領護烏丸校尉寧朔將軍,遏立積三十六載,至五年夏六月,洪水暴出,毀損四分之三,剩北岸七十餘丈,上渠車箱,所在漫溢,追惟前立遏之勳,親臨山川,指授規略,命司馬關內侯逢惲,內外將士二千人,起長岸,立石渠,脩主遏,治水門,門廣四丈,立水五尺,興復載利,通塞之宜,準遵舊制,凡用功四萬有餘焉。諸部王侯,不召而自至,繦負而事者,蓋數千人。《詩》載經始勿亟,《易》稱民忘其勞,斯之謂乎。于是二府文武之士,感秦國思鄭渠之績,魏人置豹祀之義,乃遐慕仁政,追述成功。元康五年十月十一日,刊石立表,以紀勳烈,并記遏制度,永爲後式焉。事見其碑辭。又東南流,逕薊縣北,又東至潞縣,注于鮑丘水。又南逕潞縣故城西,王莽之通潞亭也。漢光武遣吳漢、耿弇等破銅馬、五幡于潞東,謂是縣也。屈而東南流,逕潞城南,世祖拜彭寵爲漁陽太守,治此。寵叛,光武遣游擊將軍鄧隆伐之,軍於是水之南,光武策其必敗,果爲寵所破,遺壁故壘存焉。鮑丘水又東南入夏澤,澤南紆曲渚十餘里,北佩謙澤,眇望無垠也。〉

 

又南至雍奴縣北,屈東入於海。남으로 흘러 옹노현 북쪽에 다다른후, 꺾여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 간다.

 

鮑丘水自雍奴縣故城西北,포구수는 옹노현 옛 성  서북쪽에서 나온다.

 

舊分笥溝水東出,今笥溝水斷,衆川東注,混成一瀆,東逕其縣北,又東與泃河合,

옛날에 나뉘었던 사구수가 동쪽으로 나가는데, 지금 사구수는 끊겼다. 여러 천이 동쪽으로 흘러 합해서 한 도랑을 이루어

동쪽으로 흘러 옹노현 북쪽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흘러 구하와 합해진다.

 

水出右北平無終縣西山白楊谷,西北流逕平谷縣,屈西南流,獨樂水入焉。

구하는 우북평군 무종현 서쪽 산 백양곡에서 나오는데, 서북쪽으로 흘러 평곡현을 지나는데,

꺽여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독락수가 구하로 흘러든다.

 

水出北抱犢固南,逕平谷縣故城東。구하는 북쪽 포독고에서 나와 남쪽으로흘러, 평곡현 옛성 동쪽을 지난다.

(한자:犢독~송아지 독//抱포~안을 포,던질 포 )

後漢建武元年,光武遣十二將,追大槍、五幡及平谷,大破之於是縣也。후한 광무 원년에 12명의 장수를 보내

대창과 오번을 평곡까지 좇아서, 이곳 평곡현에서 크게 무찔렀다.

(분석: 28수(宿) 신명과 광무제 유수 (daesoon.org)

광무제는 전국 평정에 착수하여, 적미(赤眉),13 청독(靑犢)14, 외효(隗囂, ?-33)15, 공손술(公孫述)16 동마(銅馬), 오교(五校), 대동(大彤), 고호(高湖), 중련(重連), 철형(鐵脛), 대창(大槍), 우래(尤來), 상강(上江), 오번(五幡), 단향(檀鄕), 획색(獲索) 등 헤아리기도 힘든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36년 전국을 평정했다.)

 

其水南流入於泃。泃水又左合盤山水,水出山上,其山峻險,人跡罕交,去山三十許里,望山上水,可高二十餘里。

素湍皓然,頹波歷溪,沿流而下,自西北轉注于泃水。泃水又東南逕平谷縣故城,東南與洳河會,水出北山,山在傂奚縣故城東南,東南流逕博陸故城北,又屈逕其城東,世謂之平陸城,非也。

 

漢武帝璽書,封大司馬霍光爲侯國。文穎曰:博大陸平,取其嘉名而無其縣,食邑北海、河東

薛瓚曰:按漁陽有博陸城,謂此也。今城在且居山之陽,處平陸之上,帀帶川流,面據四水,文氏所謂無縣目,嘉美名也。

洳水又東南流逕平谷縣故城西,而東南流注於泃河。泃河又南逕紻城東,而南合五百溝水

水出七山北,東逕平谷縣之紻城南,東入于泃河。泃河又東南逕臨泃城北,屈而歷其城東,側城南出。

 

《竹書紀年》:梁惠成王十六年,齊師及燕戰於泃水,齊師遁,即是水也。

泃水又南入鮑丘水,鮑丘水又東合泉州渠口,故瀆上承滹沱水於泉州縣,故以泉州爲名。

 

北逕泉州縣東,又北逕雍奴縣東,西去雍奴故城百二十里。自滹沱北入其下,歷水澤百八十里,入鮑丘河,謂之泉州口。

 

陳壽《魏志》曰:曹太祖以蹋頓擾邊,將征之,從泃口鑿渠逕雍奴、泉州以通河海者也。今無水。

鮑丘水又東,庚水注之水出右北平徐無縣北塞中,而南流歷徐無山得黑牛谷水,又得沙谷水,竝西出山,東流注庚水。

 

昔田子春避難居之,衆至五千家。《開山圖》曰:山出不灰之木,生火之石。按《注》云:其木色黑似炭而無葉,有石赤色如丹,以二石相磨,則火發,以然無灰之木,可以終身,今則無之。其水又逕徐無縣故城東,王莽之北順亭也。

《魏土地記》曰:右北平城東北百一十里有徐無城。其水又西南與周盧溪水合,水出徐無山,東南流注庚水。庚水又西南流,灅水注之,水出右北平俊靡縣,王莽之俊麻也。東南流,世謂之車軬水。又東南流與溫泉水合,水出北山溫溪,即溫源也。養疾者不能澡其炎漂,以其過灼故也。《魏土地記》曰:徐無城東有溫湯。即此也。其水南流百步,便伏流入于地下,水盛則通注。灅又東南逕石門峽,山高嶄絶,壁立洞開,俗謂之石門口。漢中平四年,漁陽張純反,殺右北平太守劉政、遼東太守陽紘。中平五年,遣中郎將孟益率公孫瓚討純,戰于石門,大破之。灅水又東南流,謂之北黃水,又屈而爲南黃水。又西南逕無終山,即帛仲理所合神丹處也,又于是山作金五千斤以救百姓。山有陽翁伯玉田,在縣西北有陽公壇社,即陽公之故居也。《搜神記》曰:雍伯,洛陽人,至性篤孝,父母終殁,葬之於無終山,山高八十里,而上無水,雍伯置飲焉,有人就飲,與石一斗,令種之,玉生其田。北平徐氏有女,雍伯求之,要以白璧一雙,媒者致命,伯至玉田求得五雙,徐氏妻之,遂即家焉。《陽氏譜叙》言:翁伯是周景王之孫,食采陽樊,春秋之末,爰宅無終,因陽樊而易氏焉。愛人博施,天祚玉田,其《碑文》云:居於縣北六十里翁同之山,後潞徙于西山之下,陽公又遷居焉,而受玉田之賜,情不好寶,玉田自去,今猶謂之爲玉田陽。干寶曰:於種石處,四角作大石柱,各一丈,中央一頃之地,名曰玉田,至今相傳云。玉田之揭,起于此矣,而今不知所在,同於《譜叙》自去文矣。藍水注之,水出北山,東流屈而南,逕無終縣故城東,故城,無終子國也。《春秋‧襄公四年》,無終子嘉父使孟樂如晉,因魏絳納虎豹之皮,請和諸戎是也,故燕地矣。秦始皇二十二年滅燕,置右北平郡,治此,王莽之所謂北順也。漢世李廣爲郡,出遇伏石,謂虎也,射之飲羽,即此處矣。《魏土地記》曰:右北平城西北百三十里有無終城。其水又南入灅水,灅水又西南入于庚水。《地理志》曰:灅水出俊靡縣南,至無終東入庚水。庚水,世亦謂之爲柘水也。南逕燕山下,懸巖之側,有石鼓,去地百餘丈,望若數百石囷,有石梁貫之。鼓之東南,有石援桴,狀同擊勢。耆舊言,燕山石鼓,鳴則土有兵。庚水又南逕北平城西,而南入鮑丘水,謂之柘口。鮑丘水又東逕右北平郡故城南,《魏土地記》曰:薊城東北三百里有右北平城。鮑丘水又東,巨梁水注之,水出土垠縣北陳宮山,西南流逕觀雞山,謂之觀雞水。水東有觀雞寺,寺內起大堂,甚高廣,可容千僧,下悉結石爲之,上加塗塈,基內疎通,枝經脈散,基側室外,四出爨火,炎勢內流,一堂盡溫。蓋以此土寒嚴,霜氣肅猛,出家沙門,率皆貧薄,施主慮闕道業,故崇斯構,是以志道者多栖託焉。其水又西南流,右合區落水,水出縣北山,東南流入巨梁水。巨梁水又南逕土垠縣故城西,左會寒渡水,水出縣東北,西南流至縣,右注梁河。梁河又南,澗于水注之,水出東北山,西南流逕土垠縣故城東,西南流入巨梁水。巨梁水又東南,右合五里水,水發北平城東北五里山,故世以五里名溝,一名田繼泉。西流南屈,逕北平城東,東南流注巨梁河,亂流入于鮑丘水。自是水之南,南極滹沱,西至泉州、雍奴,東極於海,謂之雍奴藪。其澤野有九十九淀,枝流條分,往往逕通,非惟梁河、鮑丘歸海者也。〉

--------------------------------------------

 夾협~낄 협, 좌우에 배치하다

汙 더러울 오, 씻을 오, 굽힐 우, 땅팔 와, 구부릴 우,   汚와 同字

濡水[编辑]

從塞外來,東南過遼西令支縣北,  유수는 새외에서 나와 동남으로 흘러 요서군 영지현 북쪽을 지난다.

又東南過海陽縣西,南入于海。 동남으로 흘러 해양현 서쪽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간다.

수경에 나온 것은 2구절.

---------------------------------

從塞外來,東南過遼西令支縣北, 유수는 새외에서 나와 동남으로 흘러 요서군 영지현 북쪽을 지난다.

 

〈濡水出禦夷鎮東南,其水二源雙引,夾山西北流,出山,合成一川。

유수는 어이진 동남에서 나오는데, 유수는 수원이 두개인데 ,

산을 끼고 서북쪽으로 흐른 것과 산을 나오는 것이 합하여 하나의 천이 된다.

 

又西北逕禦夷故城東,鎮北百四十里北流,左則連淵水注之,水出故城東,西北流逕故城南,又西北逕緑水池南,池水淵而不流。其水又西屈而北流,又東逕故城北,連結兩沼,謂之連淵浦。

유수는 서북쪽으로 흘러 어이진 옛성 동쪽을 지나고, 어이진 북쪽 140리 북쪽을 흐른다.

왼쪽에서 연연수가 흘러드는데 연연수는 어이진 예성 동쪽에서 나와서 서북쪽으로 흘러 옛성 남쪽을 지난다.

 

又東北注難河,難河右則汙水入焉。水出東塢南,西北流逕沙野南,北人名之曰沙野。鎮東北二百三十里,西北入難河,濡、難聲相近,狄俗語訛耳。

또한 동북쪽으로 흘러 난하로 들어가고, 난하의 오른쪽에서 오수가 합류한다. 물은 동쪽 오남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사야 남쪽을 지나가는데, 북쪽 사람들은 이를 사야라 부른다. 사야는 어이진 동북쪽으로 230리 떨어져 있고, 서북쪽으로 난하로 들어간다. 유수와 난하의 발음이 비슷하여 적속의 방언에서 잘못된 것이다.

 

濡水又北逕沙野西,又北逕箕安山東,屈而東北流,逕沙野北,東北流逕林山北,水北有池,潭而不流。

濡水又東北流逕孤山南,東北流,呂泉水注之,

水出呂泉塢西,東南流,屈而東,逕塢南東北流,三泉水注之。

유수는 또한 북쪽으로 사야 서쪽을 지나가고, 다시 북쪽으로 기안산 동쪽을 지나가며 동북쪽으로 꺾여 흐르고 사야 북쪽을 지나 동북쪽으로 임산 북쪽을 지나간다. 물의 북쪽에는 연못이 있어 고여 흐르지 않는다.

유수는 다시 동북쪽으로 흐르며 고산 남쪽을 지나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여천수와 합류한다.

여천수는 여천오 서쪽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꺾여 오 남쪽을 지나 동북쪽으로 흐르고,

삼천수와 합류한다.

 

其源三泉雁次,合爲一水,鎮東北四百里,東南注呂泉水。呂泉水又東逕孤山北,又東北,逆流水注之,水出東南,導泉西流,右屈而東北注,木林山水會之。水出山南,東注逆水,亂流東北注濡河。

그 근원은 삼천의 기러기처럼 줄지어 하나의 물이 되어 어이진 동북쪽으로 400리 떨어진 곳에서 동남쪽으로 여천수에 합류한다. 여천수는 또한 동쪽으로 고산 북쪽을 지나고, 다시 동북쪽으로 역류수가 합류한다. 물은 동남쪽에서 나와 천을 따라 서쪽으로 흐르다가 동북쪽으로 꺾여 유입되고 목림산의 물이 합류한다. 물은 산 남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역류수에 유입되어 혼합되어 동북쪽으로 유하로 들어간다.

 

濡河又東,盤泉入焉,水自西北、東南流,注濡河。

濡河又東南,水流迴曲,謂之曲河。鎮東北三百里,又東出峽入安州界,東南流逕漁陽白檀縣故城。

유하(濡河)는 동쪽으로 흐르다가 반천(盤泉)이 유하로 들어간다.
반천수(水)는 서북쪽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유하로 들어간다.

유하(濡河)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물길이 돌아구부러지는데(迴曲) 소위 곡하(曲河)라 한다.

어이진(鎮) 동북쪽 300리를 (거쳐서),  동쪽으로 골짜기(峽)를 나와 안주(安州)의 경계로 들어가며,

동남쪽으로 흘러 어양군(漁陽郡) 백단현(白檀縣) 옛 성을 지난다.

 

《地理志》曰:濡水出縣北蠻中。漢景帝詔李廣曰:將軍其帥師東轅,弭節白檀者也。又東南流,右與要水合,水出塞外,三川竝導,謂之大要水也。東南流逕要陽縣故城東,本都尉治,王莽更之曰要術矣。要水又東南流,逕白檀縣而東南流,入于濡。濡水又東南,索頭水注之,水北出索頭川,南流逕廣陽僑郡西,魏分右北平,置今安州治。又南流,注于濡。濡水又東南流,武列水入焉,其水三川派合,西源右爲溪水,亦曰西藏水,東南流出溪,與蟠泉水合。泉發州東十五里,東流九十里,東注西藏水。西藏水又西南流,東藏水注之,水出東溪,一曰東藏水。西南流出谷,與中藏水合。水導中溪,南流出谷,南注東藏水。故目其川曰三藏川,水曰三藏水。東藏水又南,右入西藏水,亂流右會龍泉水,水出東山下,淵深不測,其水西南流,注于三藏水。三藏水又東南流,與龍芻水合,西出于龍芻之溪,東流入三藏水。又東南流逕武列溪,謂之武列水。東南歷石挺下,挺在層巒之上,孤石雲舉,臨崖危峻,可高百餘仞。牧守所經,命選練之士,彎張弧矢,無能屆其崇標者。其水東合流入濡。濡水又東南,五渡水注之,水北出安樂縣丁原山,南流逕其縣故城西,本三會城也。其水南入五渡塘,于其川也,流紆曲,溯涉者頻濟,故川塘取名矣。又南流注于濡。濡水又與高石水合,水東出安樂縣東山,西流歷三會城南,西入五渡川,下注濡水。濡水又東南逕盧龍塞,塞道自無終縣東出渡濡水,向林蘭陘,東至清陘。盧龍之險,峻阪縈折,故有九䋫之名矣。燕景昭元璽二年,遣將軍步渾治盧龍塞道,焚山刊石,令通方軌,刻石嶺上,以記事功,其銘尚存。而庚杲之注《揚都賦》言,盧龍山在平岡城北,殊爲孟浪,遠失事實。余按盧龍東越清陘,至凡城二百許里。自凡城東北出,趣平岡故城可百八十里,向黃龍則五百里。故陳壽《魏志》:田疇引軍出盧龍塞,塹山堙谷,五百餘里逕白檀,歷平岡,登白狼,望柳城。平岡在盧龍東北遠矣。而仲初言在南,非也。

濡水又東南逕盧龍故城東,漢建安十二年,魏武征蹋頓所築也。濡水又南,黃洛水注之,水北出盧龍山,南流入于濡。濡水又東南,洛水合焉,水出盧龍塞西,南流注濡水。濡水又屈而流,左得去潤水,又合敖水,二水竝自盧龍西注濡水。濡水又東南流逕令支縣故城東,王莽之令氏亭也。秦始皇二十二年分燕置,遼西郡令支隸焉。

 

《魏土地記》曰:肥如城西十里有濡水,南流逕孤竹城西,右合玄水,世謂之小濡水,非也。水出肥如縣東北玄溪,西南流逕其縣東,東屈南轉,西迴逕肥如縣故城南,俗又謂之肥如水。故城,肥子國。應劭曰:晉滅肥,肥子奔燕,燕封于此,故曰肥如也。漢高帝六年,封蔡寅爲侯國。西南流,右會盧水,水出縣東北沮溪,南流謂之大沮水,又南,左合陽樂水,水出東北陽樂縣溪。

 

《地理風俗記》曰:陽樂,故燕地,遼西郡治,秦始皇二十二年置。《魏土地記》曰:海陽城西南有陽樂城。其水又西南入于沮水,謂之陽口。沮水又西南,小沮水注之,水發冷溪,世謂之冷池。又南得溫泉水口,水出東北溫溪,自溪西南流,入于小沮水。小沮水又南流與大沮水合,而爲盧水也。桑欽說,盧子之書言:晉既滅肥,遷其族于盧水。盧水有二渠,號小沮、大沮,合而入于玄水。又南與溫水合,水出肥如城北,西流注於玄水。《地理志》曰:盧水南入玄,玄水又西南逕孤竹城北,西入濡水。故《地理志》曰:玄水東入濡,蓋自東而注也。《地理志》曰:令支有孤竹城,故孤竹國也。《史記》曰:孤竹君之二子伯夷、叔齊,讓國於此,而餓死於首陽。漢靈帝時,遼西太守廉翻夢人謂己曰:余,孤竹君之子,伯夷之弟,遼海漂吾棺槨,聞君仁善,願見藏覆。明日視之,水上有浮棺,吏嗤笑者皆無疾而死,於是改葬之。《晉書·地道志》曰:遼西人見遼水有浮棺,欲破之,語曰:我孤竹君也,汝破我何爲?因爲立祠焉。祠在山上,城在山側,肥如縣南十二里,水之會也。〉

 

又東南過海陽縣西,南入于海。 동남으로 흘러 해양현 서쪽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간다.

 

〈濡水自孤竹城東南逕西鄉北,瓠溝水注之,水出城東南,東流注濡水。濡水又逕故城南,分爲二水,北水枝出,世謂之小濡水也。東逕樂安亭北,東南入海。濡水東南流,逕樂安亭南,東與新河故瀆合,瀆自雍奴縣承鮑丘水東出,謂之鹽關口。魏太祖征蹋頓,與泃口俱導也。世謂之新河矣。

 

〈유수(濡水)는 고죽성(孤竹城) 동남쪽에서 시작하여 서향(西鄉) 북쪽을 지나고, 호구수(瓠溝水)가 유수에 합류한다. 물은 성 동남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유수에 합류한다. 유수는 다시 옛 성 남쪽을 지나며, 두 갈래로 나뉘어 북쪽 물줄기는 소유수(小濡水)라고 불린다. 동쪽으로는 낙안정(樂安亭) 북쪽을 지나 동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유수는 동남쪽으로 흘러 낙안정 남쪽을 지나고, 동쪽에서 신하(新河) 옛 독(瀆)과 합류한다. 

독(瀆)은 옹노현(雍奴縣)에서 포구수(鮑丘水)를 받아 동쪽으로 흘러 나가는데, 이를 염관구(鹽關口)라고 부른다. 위 태조(魏太祖)가 답돈(蹋頓)을 정벌할 때, 구구(泃口)와 함께 인도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를 신하(新河)라고 부른다.

 

陳壽《魏志》云:以通海也。新河又東北絶庚水,又東北出,逕右北平,絶泃渠之水,又東北逕昌城縣故城北,王莽之淑武也。新河又東分爲二水,枝瀆東南入海。新河自枝渠東出合封大水,謂之交流口。水出新安平縣,西南流逕新安平縣故城西,《地理志》:遼西之屬縣也。

 

진수(陳壽)의 《위지(魏志)》에 따르면, "바다로 통한다."라고 하였다. 신하(新河)는 다시 동북쪽으로 가서 경수(庚水)를 건너고, 다시 동북쪽으로 나와 우북평(右北平)을 지나며, 구거(泃渠)의 물을 건너고, 다시 동북쪽으로 창성현(昌城縣) 옛 성 북쪽을 지난다. 이곳은 왕망(王莽) 때의 숙무(淑武)이다. 신하는 다시 동쪽으로 가서 두 갈래로 나뉘어, 가지 독(枝瀆)은 동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신하는 가지 수로가 동쪽으로 나와 봉대수(封大水)와 합류하는데, 이를 교류구(交流口)라고 부른다. 물은 신안평현(新安平縣)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신안평현 옛 성 서쪽을 지난다.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이곳은 요서(遼西)에 속한 현이다.

 

又東南流,龍鮮水注之,水出縣西北,世謂之馬頭水。二源俱導,南合一川,東流注封大水。《地理志》曰:龍鮮水,東入封大水者也。亂流南會新河,南注于海。《地理志》曰:封大水于海陽縣南入海。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가면 용선수(龍鮮水)가 유입되는데, 물은 현 서북쪽에서 나와 세상에서는 이를 마두수(馬頭水)라고 부른다. 두 원류가 모두 인도되어 남쪽에서 한 하천으로 합쳐져 동쪽으로 흘러 봉대수(封大水)로 들어간다.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용선수(龍鮮水)는 동쪽으로 봉대수(封大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물줄기가 남쪽으로 흘러 신하(新河)와 합쳐져 남쪽으로 바다로 유입된다.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봉대수(封大水)는 해양현(海陽縣) 남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新河又東出海陽縣與緩虛水會,水出新平縣東北,世謂之大籠川,東南流逕令支城西,西南流與新河合,南流注于海。《地理志》曰:緩虛水與封大水皆南入海。新河又東與素河會,謂之白水口。

 

신하(新河)는 다시 동쪽으로 나가 해양현(海陽縣)에서 완허수(緩虛水)와 합류한다. 물은 신평현(新平縣) 동북쪽에서 발원하며, 세상에서는 이를 대롱천(大籠川)이라 부른다. 동남쪽으로 흘러 영지성(令支城) 서쪽을 지나고, 서남쪽으로 흘러 신하(新河)와 합류하며,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된다.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완허수(緩虛水)와 봉대수(封大水)는 모두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신하는 다시 동쪽으로 가서 소하(素河)와 합류하는데, 이를 백수구(白水口)라고 부른다.

 

水出令支縣之藍山,南合新河,又東南入海。新河又東至九濄口,枝分南注海。新河又東逕海陽縣故城南,漢高祖六年,封搖母餘爲侯國。《魏土地記》曰:令支城南六十里有海陽城者也。新河又東與清水會,水出海陽縣,東南流逕海陽城東,又南合新河,又南流十許里,西入九濄注海。

 

물은 령지현(令支縣)의 남산(藍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신하(新河)와 합류하고,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신하는 다시 동쪽으로 가서 구과구(九濄口)에 이르러, 가지가 나뉘어 남쪽으로 바다에 유입된다. 신하는 다시 동쪽으로 가서 해양현(海陽縣) 옛 성 남쪽을 지난다. 한 고조(漢高祖) 6년에 요모여(搖母餘)를 봉하여 후국(侯國)으로 삼았다. 《위토지기(魏土地記)》에 따르면, "령지성(令支城) 남쪽 60리에 해양성(海陽城)이 있다."라고 하였다. 신하는 다시 동쪽으로 가서 청수(清水)와 합류하는데, 물은 해양현(海陽縣)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해양성 동쪽을 지나고, 다시 남쪽으로 신하와 합류하여 남쪽으로 10여 리를 흘러 서쪽으로 구과(九濄)로 들어가 바다로 유입된다.

 

新河東絶清水,又東,木究水出焉,南入海。新河又東,左迆爲北陽孤淀,淀水右絶新河,南注海。新河又東會於濡。濡水又東南至絫縣碣石山,文穎曰:碣石在遼西絫縣,王莽之選武也。絫縣並屬臨渝,王莽更臨渝爲馮德。《地理志》曰:大碣石山在右北平驪成縣西南,王莽改曰揭石也。

 

신하(新河)는 동쪽으로 청수(清水)를 건너고, 다시 동쪽으로 가면 목구수(木究水)가 나와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신하는 다시 동쪽으로 가며, 왼쪽으로 굽어 북양고전(北陽孤淀)을 이루고, 전수(淀水)는 오른쪽으로 신하(新河)를 건너 남쪽으로 바다에 유입된다. 신하는 다시 동쪽으로 가서 유수(濡水)와 합류한다. 

 

유수는 다시 동남쪽으로 가서 누현(絫縣)의 갈석산(碣石山)에 이른다. 문영(文穎)은 말하기를, "갈석산은 요서(遼西) 누현(絫縣)에 있으며, 왕망(王莽) 때의 선무(選武)이다."라고 하였다. 누현은 임유(臨渝)에 속하였으며, 왕망은 임유를 다시 풍덕(馮德)으로 개명하였다.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대갈석산(大碣石山)은 우북평(右北平) 여성현(驪成縣) 서남쪽에 있으며, 왕망이 이를 개명하여 게석(揭石)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漢武帝亦嘗登之以望巨海,而勒其石於此。今枕海有石如甬道數十里,當山頂有大石如柱形,往往而見,立於巨海之中,潮水大至則隱,及潮波退,不動不没,不知深淺,世名之天橋柱也。狀若人造,要亦非人力所就,韋昭亦指此以爲碣石也。

한 무제(漢武帝)도 일찍이 이곳에 올라 큰 바다를 바라보았으며, 그 돌에 새겨놓았다. 지금 바다에 면해 있는 돌은 용도(甬道)처럼 수십 리에 걸쳐 있으며, 산 꼭대기에는 기둥 모양의 큰 돌이 여기저기 서 있다. 이 돌들은 큰 바다 한가운데 서 있으며, 밀물이 들어오면 잠기고, 썰물이 빠지면 드러나는데, 깊이를 알 수 없다. 세상에서는 이를 '천교주(天橋柱)'라고 부른다. 모양은 사람이 만든 것처럼 생겼으나, 역시 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위소(韋昭) 또한 이를 가리켜 갈석(碣石)이라고 하였다.

 

《三齊略記》曰:始皇於海中作石橋,海神爲之豎柱。始皇求與相見,神曰:我形醜,莫圖我形,當與帝相見。乃入海四十里,見海神,左右莫動手,工人潛以腳畫其狀。神怒曰:帝負約,速去。始皇轉馬還,前腳猶立,後腳隨崩,僅得登岸,畫者溺死于海,衆山之石皆傾注,今猶岌岌東趣,疑即是也。

 

《삼제략기(三齊略記)》에 따르면, 시황(始皇)이 바다 가운데에 돌다리를 만들었는데, 바다의 신이 그를 위해 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시황이 바다의 신과 만나기를 청하자, 신이 말하길, "내 모습이 흉하니 내 모습을 그리지 말라. 곧 황제와 만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시황은 바다로 40리를 들어가 바다의 신을 만나게 되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 장인이 몰래 발로 그 모습을 그렸다. 신은 노하여 말하길, "황제가 약속을 어겼으니, 빨리 떠나라."고 하였다. 시황이 말을 돌려 돌아가려 하자, 앞발은 여전히 서 있었으나 뒷발은 무너지며, 겨우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 장인은 바다에 빠져 죽었으며, 산의 모든 돌들이 다 기울어져 쏟아졌다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아슬아슬하게 동쪽을 향하고 있어, 아마도 그것인 듯하다.

 

濡水於此南入海,而不逕海陽縣西也,蓋《經》誤證耳。又按《管子》:齊桓公二十年,征孤竹,未至卑耳之溪十里,闟然止,瞠然視,援弓將射,引而未發,謂左右曰:見前乎?左右對曰:不見。

 

유수(濡水)는 이곳에서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며, 해양현(海陽縣) 서쪽을 지나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경(經)》에 잘못 기록된 것이다. 또한 《관자(管子)》에 따르면, 제 환공(齊桓公) 20년, 고죽(孤竹)을 정벌할 때, 비이(卑耳)의 계곡에 이르기 10리 전에 홀연히 멈추어 서서,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며 활을 잡아 당겨 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발사하지 않고,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하길, "앞에 보이는가?"라고 하였다. 좌우의 사람들이 대답하길,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公曰:寡人見長尺而人物具焉,冠,右祛衣,走馬前,豈有人若此乎?管仲對曰:臣聞豈山之神有偷兒,長尺人物具,霸王之君興,則豈山之神見。且走馬前,走,導也;祛衣,示前有水;右祛衣,示從右方涉也。至卑耳之溪,有贊水者,從左方涉,其深及冠;右方涉,其深至膝。已涉大濟,桓公拜曰:仲父之聖至此,寡人之抵罪也久矣。今自孤竹南出,則巨海矣,而滄海之中,山望多矣,然卑耳之川若贊溪者,亦不知所在也。昔在漢世,海水波襄,吞食地廣,當同碣石,苞淪洪波也。〉

 

공이 말하길, "과인이 키가 한 자 되는 사람을 보았는데,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갖추어져 있었고, 관을 쓰고 오른쪽으로 옷을 걷어 올린 채 말을 타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더라. 어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관중이 대답하길, "신이 듣기로, 기산(豈山)의 신에게 도둑이 있다고 하였는데, 키가 한 자 되는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갖추어져 있으며, 패왕의 군주가 일어날 때 기산의 신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또한 말을 타고 앞서 달려가는 것은 길을 인도하는 것이며, 옷을 걷어 올린 것은 앞에 물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른쪽으로 옷을 걷어 올린 것은 오른쪽으로 건너야 함을 나타냅니다. 비이(卑耳)의 계곡에 이르렀을 때 찬수(贊水)를 만나 왼쪽으로 건너면 물이 깊어서 관(冠)에 이르고, 오른쪽으로 건너면 깊이가 무릎까지 이릅니다. 무사히 큰 강을 건넌 후, 환공이 절하며 말하길, '중부(仲父)의 성스러움이 이와 같으니, 과인이 잘못을 저지른 지 오래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고죽(孤竹)에서 남쪽으로 나가면 큰 바다에 이르게 되는데, 큰 바다 가운데 산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비이의 강이나 찬수와 같은 곳은 그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옛날 한나라 시대에 바닷물이 일어나 넓은 땅을 삼켰는데, 이는 갈석(碣石)과 같으며, 큰 물결에 잠긴 것입니다."

 

大遼水[编辑]

 

出塞外衛白平山,東南入塞,過遼東襄平縣西。

새 외위(塞外衛) 백평산(白平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새(塞) 안으로 들어가 요동(遼東) 양평현(襄平縣) 서쪽을 지난다.

 

〈遼水亦言出砥石山,自塞外東流,直遼東之望平縣西,王莽之長說也。屈而西南流,逕襄平縣故城西,秦始皇二十二年,滅燕置遼東郡,治此。漢高帝八年,封紀通爲侯國,王莽之昌平也,故平州治。又南逕遼隊縣故城西,王莽更名之曰順睦也。公孫淵遣將軍畢衍拒司馬懿于遼隊,即是處也。〉


〈요수(遼水)는 또한 지석산(砥石山)에서 나와, 새 외에서 동쪽으로 흘러 요동(遼東) 망평현(望平縣) 서쪽에 이른다고 한다. 왕망(王莽) 때의 장설(長說)이다. 굽어서 서남쪽으로 흘러 양평현(襄平縣) 옛 성 서쪽을 지난다. 진시황(秦始皇) 22년에 연(燕)을 멸망시키고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여 이곳을 다스렸다. 한 고제(漢高帝) 8년에 기통(紀通)을 봉하여 후국(侯國)으로 삼았으며, 왕망 때의 창평(昌平)이다옛 평주(平州)의 치소가 이곳에 있었다. 또한 남쪽으로 요대현(遼隊縣) 옛 성 서쪽을 지나는데, 왕망이 이름을 순목(順睦)으로 바꾸었다. 공손연(公孫淵)이 장군 필연(畢衍)을 보내 사마의(司馬懿)를 요대에서 막게 하였는데, 바로 이곳이다.〉

 

 

又東南過房縣西,

또한 동남쪽으로 가서 방현(房縣) 서쪽을 지난다

 

〈《地理志》:房,故遼東之屬縣也。遼水右會白狼水,水出右北平白狼縣東南,北流西北屈,逕廣成縣故城南,王莽之平虜也,俗謂之廣都城。又西北,石城川水注之,水出西南石城山,東流逕石城縣故城南,《地理志》:右北平有石城縣,北屈逕白鹿山西,即白狼山也。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방(房)은 옛 요동(遼東)에 속한 현이다. 요수(遼水)는 오른쪽에서 백랑수(白狼水)와 합류하는데, 물은 우북평(右北平) 백랑현(白狼縣) 동남쪽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르다 서북쪽으로 굽어 광성현(廣成縣) 옛 성 남쪽을 지난다. 왕망(王莽) 때는 평로(平虜)라 불렸으며, 속칭으로는 광도성(廣都城)이라 한다. 또한 서북쪽으로 가면 석성천수(石城川水)가 유입되는데, 물은 서남쪽 석성산(石城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석성현(石城縣) 옛 성 남쪽을 지난다. 《지리지》에 따르면, 우북평(右北平)에 석성현(石城縣)이 있으며, 북쪽으로 굽어 백록산(白鹿山) 서쪽을 지나는데, 이는 곧 백랑산(白狼山)이다.

 

魏書·國志》曰:遼西單于蹋頓尤强,爲袁氏所厚,故袁尚歸之。數入爲害。公出盧龍,塹山堙谷五百餘里,未至柳城二百里,尚與蹋頓將數萬騎逆戰,公登白狼山望柳城,卒與虜遇,乘其不整,縱兵擊之,虜衆大崩,斬蹋頓,胡、漢降者二十萬口。《英雄記》曰:曹操于是擊馬鞌,於馬上作十片,即于此也。

 

《위서(魏書)·국지(國志)》에 따르면, "요서(遼西)의 선우(單于) 답돈(蹋頓)은 매우 강성하여 원씨(袁氏)의 두터운 대우를 받았으므로, 원상(袁尚)이 그에게 귀의하였다. 여러 번 침입하여 해를 끼쳤다. 공(曹操)이 노룡(盧龍)으로 나아가 산을 파고 골짜기를 메우기를 500여 리에 이르렀는데, 유성(柳城)에 도착하기 200리 전에 원상과 답돈이 수만 기병을 이끌고 와서 맞서 싸웠다. 공이 백랑산(白狼山)에 올라 유성을 바라보니, 마침 오랑캐와 조우하여 그들이 정돈되지 않은 틈을 타 병사를 풀어 공격하니, 오랑캐의 무리가 크게 무너져 답돈을 참수하고, 항복한 호인(胡人)과 한인(漢人)이 20만 명에 달했다." 《영웅기(英雄記)》에 따르면, "조조가 이때 마안(馬鞍)을 치고, 말 위에서 십편(十片)을 작곡했는데, 바로 이곳에서였다."

 

博物志》曰:魏武于馬上逢獅子,使格之,殺傷甚衆,王乃自率常從健兒數百人擊之,獅子吼呼奮越,左右咸驚。王忽見一物從林中出,如貍,超上王車軛上,獅子將至,此獸便跳上獅子頭上,獅子即伏不敢起。于是遂殺之,得獅子而還。未至洛陽四十里,洛中雞狗皆無鳴吠者也。

 

《박물지(博物志)》에 따르면, "위무제(魏武帝)가 말 위에서 사자와 마주쳤다. 사람들을 시켜 사자와 맞서게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 왕이 직접 상종(常從)의 용맹한 병사 수백 명을 이끌고 사자를 공격했다. 사자가 울부짖으며 날뛰자,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왕이 갑자기 숲 속에서 여우 같은 한 마리 동물이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동물이 뛰어 올라 왕의 수레의 멍에 위에 올랐다. 사자가 가까이 오자, 이 동물이 곧바로 사자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갔다. 사자는 즉시 엎드려 감히 일어나지 못했다. 이에 사자를 죽이고 사자를 얻어 돌아왔다. 낙양(洛陽)에서 40리쯤 떨어진 곳에 도착했을 때, 낙양의 닭과 개들이 모두 울지도 짖지도 않았다."

 

其水又東北入廣成縣。東注白狼水。白狼水北逕白狼縣故城東,王莽更名伏狄。白狼水又東,方城川水注之,水發源西南山下,東流北屈,逕一故城西,世謂之雀目城。東屈逕方城北,東入白狼水。白狼水又東北逕昌黎縣故城西,《地理志》曰:交黎也,東部都尉治,王莽之禽虜也。

 

그 물은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 광성현(廣成縣)에 들어간다. 동쪽으로 흘러 백랑수(白狼水)에 합류한다. 백랑수는 북쪽으로 흘러 백랑현(白狼縣) 옛 성 동쪽을 지나는데, 왕망(王莽)이 이름을 복적(伏狄)으로 바꾸었다. 백랑수는 다시 동쪽으로 흘러 방성천수(方城川水)와 합류한다. 방성천수는 서남쪽 산 아래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다 북쪽으로 굽어 한 옛 성 서쪽을 지나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작목성(雀目城)이라 부른다. 동쪽으로 굽어 방성(方城) 북쪽을 지나 동쪽으로 백랑수에 합류한다. 백랑수는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 창려현(昌黎縣) 옛 성 서쪽을 지나는데,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교려(交黎)라 하며, 동부도위(東部都尉)의 치소이고, 왕망이 이를 금로(禽虜)라 하였다.

 

應劭曰:今昌黎也。高平川水注之,水出西北平川,東流逕倭城北,蓋倭地人徙之。又東南逕乳樓城北,蓋逕戎鄉,邑兼夷稱也。又東南注白狼水。白狼水又東北,自魯水注之,水導西北遠山,東南注白狼水。

 

응소(應劭)가 말하길, "지금의 창려(昌黎)이다." 고평천수(高平川水)가 그곳에 합류하는데, 이 물은 서북쪽 평천(平川)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왜성(倭城) 북쪽을 지난다. 이는 왜(倭) 지역 사람들이 이주해 온 것이다.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유루성(乳樓城) 북쪽을 지나는데, 이는 융향(戎鄉)을 지나는 것으로, 읍(邑)이 이민족과 함께 불리는 것이다.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백랑수(白狼水)에 합류한다. 백랑수는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 노수(魯水)에서 유입되는 물과 합류한다. 이 물은 서북쪽 먼 산에서 흘러와 동남쪽으로 백랑수에 합류한다.

 

白狼水又東北逕龍山西,燕慕容皝以柳城之北、龍山之南,福地也,使陽裕築龍城,改柳城爲龍城縣,十二年,黑龍、白龍見于龍山,皝親觀龍,去二百步,祭以太牢,二龍交首嬉翔,解角而去。皝悅,大赦,號新宮曰和龍宮,立龍翔祠于山上。

 

백랑수(白狼水)는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 용산(龍山) 서쪽을 지난다. 연나라(燕) 모용황(慕容皝)이 유성(柳城) 북쪽과 용산 남쪽을 복지(福地)라 여겨, 양유(陽裕)에게 용성(龍城)을 쌓게 하고, 유성을 용성현(龍城縣)으로 개명하였다. 12년, 흑룡과 백룡이 용산에 나타났고, 모용황은 용을 직접 관찰하였다. 200보 정도 떨어진 곳에서 태뢰(太牢)로 제사를 지내자,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맞대고 놀며 날아다니다가 뿔을 풀고 떠났다. 모용황은 기뻐하며 대사면을 선포하고, 새로운 궁궐을 화룡궁(和龍宮)이라 이름 지었으며, 산 위에 용상사(龍翔祠)를 세웠다.

 

白狼水又北逕黃龍城東,《十三州志》曰:遼東屬國都尉治昌遼道有黃龍亭者也。魏營州刺史治。《魏土地記》曰:黃龍城西南有白狼河,東北流,附城東北下,即是也。又東北,濫真水出西北塞外,東南歷重山,東南入白狼水。白狼水又東北出,東流分爲二水,右水疑即渝水也。

 

《地理志》曰:渝水首受白狼水,西南循山,逕一故城西,世以爲河連城,疑是臨渝縣之故城,王莽曰馮德者矣。渝水南流東屈,與一水會,世名之曰㯼倫水,蓋戎方之變名耳,疑即《地理志》所謂侯水北入渝者也。《十三州志》曰:侯水南入渝。《地理志》蓋言自北而南也。又西南流注于渝。渝水又東南逕一故城東,俗曰女羅城。又南逕營丘城西,營丘在齊而名之於遼、燕之間者,蓋燕齊遼迥,僑分所在。其水東南入海。《地理志》曰:渝水自塞外南入海。一水東北出塞爲白狼水,又東南流至房縣注于遼。《魏土地記》曰:白狼水下入遼也。〉

 

又東過安市縣西,南入於海。

 

〈《十三州志》曰:大遼水自塞外,西南至安市入于海。〉

 

又玄菟高句麗縣有遼山,小遼水所出,

 

〈縣,故高句麗,胡之國也。漢武帝元封二年,平右渠,置玄菟郡于此,王莽之下句麗。水出遼山,西南流逕遼陽縣與大梁水會,水出北塞外,西南流至遼陽入小遼水。故《地理志》曰: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郡國志》曰:縣,故屬遼東,後入玄菟。其水西南流,故謂之爲梁水也。小遼水又西南逕襄平縣爲淡淵,晉永嘉三年涸。小遼水又逕遼隊縣入大遼水。司馬宣王之平遼東也,斬公孫淵于斯水之上者也。〉

 

西南至遼隊縣,入於大遼水也。

 

浿水[编辑]

(위서에서 회주(하남성 황하 북부)에 심수,태행산, 패수가 있다"는 기록 .

또 "금사지리지에 회주(하남성 황하북부)에 심수,태행산,황하, 패수가 있다"는 기록)

 

出樂浪鏤方縣,東南過臨浿縣,東入于海。

 

〈許慎云:浿水出鏤方,東入海。一曰出浿水縣。《十三州志》曰:浿水縣在樂浪東北,鏤方縣在郡東。蓋出其縣南逕鏤方也。昔燕人衛滿自浿水西至朝鮮。朝鮮,故箕子國也。箕子教民以義,田織信厚,約以八法,而不知禁,遂成禮俗。戰國時,滿乃王之,都王險城,地方數千里,至其孫右渠,漢武帝元封二年,遣樓船將軍楊僕、左將軍荀彘討右渠,破渠于浿水,遂滅之。若浿水東流,無渡浿之理,其地今高句麗之國治,余訪番使,言城在浿水之陽。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漢武帝置,而西北流。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又漢興,以朝鮮爲遠,循遼東故塞至浿水爲界。考之今古,於事差謬,蓋《經》誤證也。

 

----------------------------------------------

상서 우공 禹貢 (한서지리지)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cf.한서지리지

 

안사고 왈: 샘물(泉)이 왕옥산(王屋山)을 나오는 것을 沇(연)이라 불렀고 물이 흘러가서는 제수(泲水)가 되었다

沇은 弋과 臠의 반절음.

 

河東郡...垣, 禹貢王屋山在東北, 沇水所出, 東南至武德入河, 軼出滎陽北地中, 又東至琅槐入海, 過郡九, 行千八百四十里.

하동군 원. 우공의 왕옥산(王屋山)이 동북쪽에 있는데 연수(沇水)가 나오는 곳이다. 동남쪽으로 흐르다 

[하내군] 무덕(武德)에서 하수로 들어갔다가 흘러넘쳐 [하남군] 형양(滎陽)의 북쪽 땅을 나오고

또한 동쪽으로 흘러 [천승군千乘郡] 낭회(琅槐)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9개 郡을 지나며 1,840리를 흐른다.

 

안사고 왈: 軼(일)은 溢(일)과 같다. 제수(濟水)가 하수로 들어가 나란히 흐르다 남쪽으로 하수를 끊고 나와 또한 나란히 흐르다 강물이 넘치면 형택(滎澤)이 되었다. 일설에는 軼(일)은 過(과)라 한다. 음은 逸이다.

 

(*본문의 軼을 상서에서는 溢로 표기)

(*제수가 하수로 유입하는 지점에서 조금 지난 뒤에 하수에서 한 줄기가 갈라져 나와 동쪽으로 흘렀는데 이걸 고대인들은 제수가 황하를 끊고 나와 계속 이어진 것으로 인식한 것임)

 

안사고 왈: 도구(陶丘)는 구(丘,언덕)가 두 겹(再重)인 경우이다. 제음(濟陰) 정도(定陶)의 서남쪽에 있었다.

 

cf.한서지리지

濟陰郡...定陶...禹貢陶丘在西南.

제음군 정도. 우공의 도구(陶丘)가 서남쪽에 있다.

 

[二四]안사고 왈: 곧 가택(荷澤)이다.

 

cf.한서지리지

濟陰郡...禹貢荷澤在定陶東.

제음군(정도국)...우공의 가택(荷澤)이 정도(定陶)의 동쪽에 있다.

 

[二五]안사고 왈: 제수(濟水)가 문수(汶水)와 합쳐진 것이다.

 

[二六]안사고 왈: 북쪽으로 흐르다 꺾여서 동쪽으로 흘렀다.

---------------------------------------------------------------------

중국 한서지리지에 기술된 내용.

漢書/卷028下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wikisource.org)

上谷郡,戶三萬六千八,口十一萬七千七百六十二。縣十五:沮陽,泉上,潘,軍都,居庸,雊瞀,夷輿,寧,昌平,廣寧,涿鹿,且居,茹,女祈,下落。

 

漁陽郡,戶六萬八千八百二,口二十六萬四千一百一十六。縣十二漁陽狐奴,雍奴,泉州,平谷,安樂,厗奚,獷平,要陽,白檀,滑鹽。

 

右北平郡,戶六萬六千六百八十九,口三十二萬七百八十。縣十六:平剛,無終石成,廷陵,俊靡,薋,徐無,字,

土垠白狼,夕陽,昌城,驪成,廣成,聚陽,平明。

 

遼西郡,戶七萬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萬二千三百二十五。縣十四:且慮,海陽,新安平,柳城,令支,肥如,賓從,交黎,陽樂,狐蘇,徒河,文成,臨渝,絫。

 

遼東郡,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縣十八:襄平,新昌,無慮,望平,房,候城,遼隊,遼陽,險瀆,居就,高顯,安市,武次,平郭,西安平,文,番汗,沓氏。

 

玄菟郡,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上殷台,西蓋馬。

 

樂浪郡,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縣二十五:朝鮮,俨邯,浿水,含資,黏蟬,遂成,增地,帶方,駟望,海冥,列口,長岑,屯有,昭明,鏤方,提奚,渾彌,吞列,東傥,不而,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

----------------------------------------------------------------

抪퍼질 포

 

 

上谷郡  秦置。莽曰朔調。屬幽州。戶三萬六千八,口十一萬七千七百六十二。縣十五:沮陽,莽曰沮陰。泉上,莽曰塞泉。潘,莽曰樹武。軍都,溫餘水東至路,南入沽。居庸,有關。雊瞀,夷輿,莽曰朔調亭。寧,西部都尉治。莽曰博康。昌平,莽曰長昌。廣寧,莽曰廣康。涿鹿,莽曰抪陸。且居,陽樂水出東,南入沽。莽曰久居。茹,莽曰穀武。女祁,東部都尉治。莽曰祁。下落。莽曰下忠。

 

상곡군(上谷郡)은 진(秦)나라 때 설치되었다. 왕망(王莽) 때는 삭조(朔調)라 불렸다. 유주(幽州)에 속했다. 호구 수는 36,008호, 인구는 117,762명이었다. 15개의 현(縣)이 있었다: 

- 저양(沮陽), 왕망 때는 저음(沮陰)이라 불렸다.
- 천상(泉上), 왕망 때는 새천(塞泉)이라 불렸다.
- 반(潘), 왕망 때는 수무(樹武)라 불렸다.
군도(軍都), 온여수(溫馀水)가 동쪽으로 흘러 로(路)에 이르러 남쪽으로 고(沽)로 들어간다.

(영종: 온여수는 습여수/ 로는 로현/고는 고하를 말한다)
거용(居庸), 관이 있었다.
- 구모(雊瞀), 
- 이여(夷輿), 왕망 때는 삭조정(朔調亭)이라 불렸다.
- 영(寧), 서부도위(西部都尉)가 다스렸다. 왕망 때는 박강(博康)이라 불렸다.
- 창평(昌平), 왕망 때는 장창(長昌)이라 불렸다.
- 광녕(廣寧), 왕망 때는 광강(廣康)이라 불렸다.
- 탁록(涿鹿), 왕망 때는 부륙(抪陸)이라 불렸다.
- 차거(且居), 양락수(陽樂水)가 동쪽으로 흘러 남쪽으로 고(沽)로 들어갔다. 왕망 때는 구거(久居)라 불렸다.
- 여(茹), 왕망 때는 곡무(穀武)라 불렸다.
녀기(女祁), 동부도위(東部都尉)가 다스렸다. 왕망 때는 기(祁)라 불렸다.
- 하락(下落), 왕망 때는 하충(下忠)이라 불렸다.

 

漁陽郡  秦置。莽曰通路。屬幽州。戶六萬八千八百二,口二十六萬四千一百一十六。縣十二:漁陽,沽水出塞外。東南至泉州入海,行七百五十里。有鐵官。莽曰得漁。狐奴,莽曰舉符。路,莽曰通路亭。雍奴,泉州,有鹽官。莽曰泉調。平谷,安樂,厗奚,莽曰敦德。犷平,莽曰平犷。要陽,都尉治。莽曰要術。白檀,洫水出北蠻夷。滑鹽。莽曰匡德。

 

어양군(漁陽郡)은 진(秦)나라 때 설치되었다. 왕망(王莽)은 이를 통로(通路)라 불렀다. 유주(幽州)에 속했다. 호구 수는 68,802호, 인구는 264,116명이었다. 12개의 현이 있었다:

- 어양(漁陽): 고수(沽水)가 새 외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천주(泉州)까지 흘러 바다에 들어가며, 거리 750리이다. 철관(鐵官)이 있다. 왕망은 이를 득어(得漁)라 불렀다.
- 호노(狐奴): 왕망은 이를 거부(舉符)라 불렀다.
- 로(路): 왕망은 이를 통로정(通路亭)이라 불렀다.
옹노(雍奴): 천주(泉州)에 있으며, 염관(鹽官)이 있다. 왕망은 이를 천조(泉調)라 불렀다.
- 평곡(平谷)
- 안락(安樂)
- 저혜(厗奚): 왕망은 이를 돈덕(敦德)이라 불렀다.
- 광평(犷平): 왕망은 이를 평광(平犷)이라 불렀다.
- 요양(要陽): 도위(都尉)가 다스렸다. 왕망은 이를 요술(要術)이라 불렀다.
- 백단(白檀): 혁수(洫水)가 북만이(北蠻夷)에서 발원하였다.
- 골염(滑鹽): 왕망은 이를 광덕(匡德)이라 불렀다.

 

중국 고대 지명 대사전에 기술된 내용.

潞县 古潞子国,汉置潞县,故城在今山西潞城县东北四十里,后魏改刈陵,移治漳水北,城遂废。汉置路县,后汉改曰潞,以潞水为名,《水经注》 鲍丘水迳潞县故城西,《寰宇记》 潞县在幽州东六十里,本汉旧县,《通鉴》 “契丹既强,寇气势汹汹诸州皆偏,幽州东十里之外,人不敢樵牧,越德钧为节度使,于州东五十里,城潞县而戍之,民始得耕稼。” 今北京通县东八里甘棠乡,有古城,盖隋唐时潞县治,五代唐移今能源县治,明废。辽置,今阙,当在热河巴林境。

(潞水) 亦作潞川,即今浊洋水,《周礼职方氏》 翼州,川曰漳,浸曰汾潞,《后汉书郡国志》 注 《上党记》 曰 潞,浊漳也。《水经注》 “沽水俗谓之西潞水,鲍丘水世谓之东潞水,会流南戏潞县为潞河。” 今尚称北运河为潞河,潞县后汉置,明废,故城在今北京通县东。在山西潞城县北,源出县东北二十里微子城,西北流入漳水,此水以在潞地,遂蒙潞名,非职方冀浸之潞也。

--------------------------------------

抪퍼질 포

洫 봇도랑 혁, 넘칠 일       1. 봇도랑 2. 넘치다 3. 논 사이의 물을 통하게 하는 도랑 4. 가득 차서 넘침 5. 해자(垓字)

翼 날개 익        1. 날개 2. 돕다 3. 이루다 4. 천거(薦擧)하다 5. 받들다

 

중국 한서지리지 내용

번체로 번역

 

上谷郡 秦置。莽曰朔調。屬幽州。戶三萬六千八,口十一萬七千七百六十二。縣十五:沮陽,莽曰沮陰。泉上,莽曰塞泉。潘,莽曰樹武。軍都,溫馀水東至路,南入沽。居庸,有關。雊瞀,夷輿,莽曰朔調亭。寧,西部都尉治。莽曰博康。昌平,莽曰長昌。廣寧,莽曰廣康。涿鹿,莽曰抪陸。且居,陽樂水出東,南入沽。莽曰久居。茹,莽曰穀武。女祁,東部都尉治。莽曰祁。下落。莽曰下忠。

상곡군(上谷郡)은 진(秦)나라 때 설치되었다. 왕망(王莽) 때는 삭조(朔調)라 불렸다. 유주(幽州)에 속했다. 호구 수는 36,008호, 인구는 117,762명이었다. 15개의 현(縣)이 있었다: 

- 저양(沮陽), 왕망 때는 저음(沮陰)이라 불렸다.
- 천상(泉上), 왕망 때는 새천(塞泉)이라 불렸다.
- 반(潘), 왕망 때는 수무(樹武)라 불렸다.
군도(軍都), 온여수(溫馀水)가 동쪽으로 흘러 로(路)에 이르러 남쪽으로 고(沽)로 들어간다.

(영종: 온여수는 습여수/ 로는 로현/고는 고하를 말한다)
거용(居庸), 관이 있었다.
- 구모(雊瞀), 
- 이여(夷輿), 왕망 때는 삭조정(朔調亭)이라 불렸다.
- 영(寧), 서부도위(西部都尉)가 다스렸다. 왕망 때는 박강(博康)이라 불렸다.
- 창평(昌平), 왕망 때는 장창(長昌)이라 불렸다.
- 광녕(廣寧), 왕망 때는 광강(廣康)이라 불렸다.
- 탁록(涿鹿), 왕망 때는 부륙(抪陸)이라 불렸다.
- 차거(且居), 양락수(陽樂水)가 동쪽으로 흘러 남쪽으로 고(沽)로 들어갔다. 왕망 때는 구거(久居)라 불렸다.
- 여(茹), 왕망 때는 곡무(穀武)라 불렸다.
- 녀기(女祁), 동부도위(東部都尉)가 다스렸다. 왕망 때는 기(祁)라 불렸다.
- 하락(下落), 왕망 때는 하충(下忠)이라 불렸다.

 

漁陽郡 秦置。莽曰通路。屬幽州。戶六萬八千八百二,口二十六萬四千一百一十六。縣十二:漁陽,沽水出塞外。東南至泉州入海,行七百五十里。有鐵官。莽曰得漁。狐奴,莽曰舉符。路,莽曰通路亭。雍奴,泉州,有鹽官。莽曰泉調。平谷,安樂,厗奚,莽曰敦德。獷平,莽曰平獷。要陽,都尉治。莽曰要術。白檀,洫水出北蠻夷。滑鹽。莽曰匡德。

 

어양군(漁陽郡)은 진(秦)나라 때 설치되었다. 왕망(王莽) 때는 통로(通路)라 불렸다. 유주(幽州)에 속했다. 호구 수는 68,802호, 인구는 264,116명이었다. 12개의 현(縣)이 있었다:

- 어양(漁陽), 고수(沽水)가 변방 밖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천주(泉州)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며, 길이는 750리이다. 철관(鐵官)이 있다. 왕망 때는 득어(得漁)라 불렸다.
- 호노(狐奴), 왕망 때는 거부(舉符)라 불렸다.
- 노(路), 왕망 때는 통로정(通路亭)이라 불렸다.
- 옹노(雍奴), 천주(泉州)에 있으며 염관(鹽官)이 있다. 왕망 때는 천조(泉調)라 불렸다.
- 평곡(平谷)
- 안락(安樂)
- 저혜(厗奚), 왕망 때는 돈덕(敦德)이라 불렸다.
- 광평(獷平), 왕망 때는 평광(平獷)이라 불렸다.
- 요양(要陽), 도위(都尉)가 다스렸다. 왕망 때는 요술(要術)이라 불렸다.
- 백단(白檀), 휴수(洫水)가 북쪽 만이(北蠻夷)에서 발원하였다.
- 활염(滑鹽), 왕망 때는 광덕(匡德)이라 불렸다.

 

중국 고대 지명 대사전에 기술된 내용.

潞縣 古潞子國,漢置潞縣,故城在今山西潞城縣東北四十里,後魏改刈陵,移治漳水北,城遂廢。

漢置路縣,後漢改曰潞,以潞水為名,《水經註》 鮑丘水迳潞縣故城西,《寰宇記》 潞縣在幽州東六十里,本漢舊縣,

《通鑑》 “契丹既強,寇氣勢洶洶諸州皆偏,幽州東十里之外,人不敢樵牧,越德鈞為節度使,於州東五十里,城潞縣而戍之,民始得耕稼。”

今北京通縣東八里甘棠鄉,有古城,蓋隋唐時潞縣治,五代唐移今能源縣治,明廢。遼置,今闕,當在熱河巴林境。 ​

 

노현(潞縣)은 옛 노자국(潞子國)으로, 한(漢)나라 때 노현이 설치되었다. 옛 성은 지금의 산서(山西) 노성현(潞城縣) 동북쪽 40리에 있었다. 후위(後魏) 때 예릉(刈陵)으로 개명되었고, 치소를 장수(漳水) 북쪽으로 옮기면서 성이 폐허가 되었다. 

 

한나라 때 노현(路縣)이 설치되었고, 후한(後漢) 때 노(潞)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이는 노수(潞水)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수경주(水經註)》에는 포구수(鮑丘水)가 노현의 옛 성 서쪽을 경유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환우기(寰宇記)》에는 노현이 유주(幽州) 동쪽 60리에 위치하며, 본래 한나라의 옛 현이었다고 한다. 

 

《통감(通鑑)》에는 "거란(契丹)이 강해진 후, 도적들이 기세등등하여 여러 주를 침범했으며, 유주(幽州) 동쪽 10리 밖에서는 사람들이 땔감을 하거나 방목을 감히 하지 못했다. 월덕균(越德鈞)이 절도사로 임명되어, 주의 동쪽 50리에 노현을 쌓고 수비하니 백성들이 비로소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베이징(北京) 통현(通縣) 동쪽 8리 감당향(甘棠鄉)에 옛 성이 있는데, 이는 수당(隋唐) 시기 노현의 치소였으며, 오대(五代) 당나라 때 지금의 원현(能源縣)으로 치소가 옮겨졌고, 명(明)나라 때 폐지되었다. 요나라 때 설치되었으나, 현재는 사라졌다. 이는 아마도 열하(熱河) 바린(巴林) 경내에 있었을 것이다.

 

(潞水) 亦作潞川,即今濁洋水,《周禮職方氏》 翼州,川曰漳,浸曰汾潞,《後漢書郡國志》 注《上黨記》 曰潞,濁漳也。 《水經註》 “沽水俗謂之西潞水,鮑丘水世謂之東潞水,會流南戲潞縣為潞河。”

今尚稱北運河為潞河,潞縣後漢置,明廢,故城在今北京通縣東。

在山西潞城縣北,源出縣東北二十里微子城,西北流入漳水,此水以在潞地,遂蒙潞名,非職方冀浸之潞也。

 

(노수, 潞水)는 또한 노천(潞川)이라고도 불리며, 지금의 탁양수(濁洋水)이다. 《주례 직방씨(周禮職方氏)》에는 익주(翼州)의 강은 장수(漳水)이고, 침수(浸水)는 분노(汾潞)라고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 군국지(後漢書郡國志)》 주석 《상당기(上黨記)》에는 노수는 탁장(濁漳)이라고 되어 있다. 

 

《수경주(水經註)》에는 "고수(沽水)는 속칭 서노수(西潞水)라 하고, 포구수(鮑丘水)는 세상에서 동노수(東潞水)라 한다. 이들이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노현(潞縣)을 지나 노하(潞河)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도 북운하(北運河)를 노하(潞河)라고 부른다. 노현은 후한 때 설치되었고, 명나라 때 폐지되었다. 옛 성은 지금의 베이징 통현(通縣) 동쪽에 있다. 

이 물은 산서 노성현(潞城縣) 북쪽, 현 동북쪽 20리의 미자성(微子城)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흘러 장수(漳水)로 들어간다. 이 물은 노지(潞地)에 있어 노수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직방씨(職方氏)의 기침(冀浸) 노수는 아니다.

-------------------------------

한서지리지(61) 지리지상(上)(61) 제2장 군현(郡縣) 위치(43) 巨鹿郡(거록군) (tistory.com)

 安定(안정) 侯國(후국)

   안정현(安定縣)은, 제후국(諸侯國)이었다.

   [연랄왕(燕剌王)의 아들 안정여후(安定戾侯) 유현(劉賢)이

   본시 원년에 봉해지면서 연(燕)에서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