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7
日知録卷一崑山顧炎武撰 三易 夫子言包羲氏始畫八卦,不言作易,而曰:易之興也,其於中古乎?又曰:易之興也,其當殷之末世,周之盛德邪?當文王與紂之事邪?是文王所作之辭,始名爲易。而周官大卜掌三易之法,一曰連山,二曰歸藏,三曰周易。連山、歸藏非易也,而云三易者,後人因易之名以名之也。猶之墨子書言周之春秋,燕之春秋,宋之春秋,齊之春秋。周、燕、齊、宋之史,非必皆春秋也,而云春秋者,因魯史之名以名之也。 左傳僖十五年:戰於韓,卜徒父筮之,曰:吉。其卦遇蠱,曰:千乘三去,三去之餘,獲其雄狐。成十六年:戰於鄢陵,公筮之,史曰吉。其卦遇復,曰:南國蹙,射其元王,中厥目。此皆不用周易而别有引據之辭,即所謂三易之法也。卜徒父以卜人而掌此,猶周官之大卜,而傳不言易。
《일지록》 권1
곤산 사람 고염무 지음
삼역(三易)
공자께서는 복희씨(包羲氏)가 처음으로 팔괘를 그렸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가 《역》을 지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역》이 일어난 것은 아마도 중고시대였을 것이다.”
또 말씀하셨다.
“《역》이 일어난 것은 은나라 말기이자 주나라의 덕이 융성하던 때였을 것이다. 아마도 문왕과 주왕의 일이 있던 시기였을 것이다.”
이로 보아 문왕이 지은 괘사와 효사에 이르러 비로소 ‘역(易)’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그런데 《주관(周官)》에서는 대복(大卜)이 ‘삼역의 법’을 관장한다고 하였다.
첫째는 《연산(連山)》이고,
둘째는 《귀장(歸藏)》이며,
셋째는 《주역(周易)》이다.
본래 《연산》과 《귀장》은 ‘역’이라는 이름을 가진 책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를 ‘삼역’이라고 부른 것은 후대 사람들이 《주역》의 ‘역’이라는 명칭을 빌려 두 책에도 붙였기 때문이다.
이는 《묵자》에서 주나라의 《춘추》, 연나라의 《춘추》, 송나라의 《춘추》, 제나라의 《춘추》라고 말한 것과 같다. 주·연·제·송의 역사서가 반드시 모두 원래부터 《춘추》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를 《춘추》라고 부른 것은 노나라 역사서의 명칭인 《춘추》를 빌려 다른 나라의 역사서에도 붙였기 때문이다.
《좌전》 희공 15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원(韓原)에서 전투가 벌어지려 할 때 복도보(卜徒父)가 시초점을 치고 말하였다.
‘길합니다.’
그가 얻은 괘는 고괘(蠱卦)였다. 점사에 이르기를,
‘천 대의 병거가 세 번 달아나고, 세 번 달아난 뒤에 그 우두머리 수여우를 사로잡는다.’
라고 하였다.”
《좌전》 성공 16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언릉(鄢陵)에서 전투가 벌어지려 할 때 진 여공이 시초점을 치게 하였다. 사관이 말하였다.
‘길합니다.’
그가 얻은 괘는 복괘(復卦)였다. 점사에 이르기를,
‘남쪽 나라가 궁지에 몰리고, 그 나라의 우두머리 왕을 활로 쏘아 그의 눈을 맞힌다.’
라고 하였다.”
이 두 사례는 모두 《주역》의 괘사나 효사를 사용하지 않고, 별도의 근거가 되는 점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삼역의 법’이다.
복도보는 점을 담당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이러한 점법을 관장하였다. 이는 《주관》에서 대복이 삼역의 법을 관장한 것과 같다. 그런데 《좌전》에서는 이를 ‘역’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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