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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漢나라때 기주冀州의 위치/ 두로공신도비

2021.04.18

요순시대堯舜時代:  요임금과 순임금이 다스리던 태평시대.

요(堯)임금이 천자가 되어 나라 이름을 당(唐)이라 했고,

순(舜)임금이 요임금의 뒤를 이어 천자가 되고 나라 이름을 우(虞)라 했다.

 

우공禹貢

우공 - Daum 백과

중국 9주의 지리와 산물에 관해 기록한 고대의 지리서.

본래는 〈서경 書經〉 하서의 편명이었으나, 전국시대에 분리되어 1권의 책이 되었다. 내용은 9주·도산·도수·오복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9주는 하천, 산맥, 큰 바다 같은 자연 경계에 따라 고대 중국을 기(冀)·연(6)·청·서(徐)·양(揚)·형·예(豫)·양(梁)·옹(雍)의 9개 주로 나누고 각 주의 산천·호수·토양·식물군락 및 논밭의 역할, 특산물, 교통로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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藪수~덤불 수,늪 수.

揚양~오를 양

紆우~굽을 우

 

1.한서지리지

漢書/卷028上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wikisource.org)

 

東北曰幽州:其山曰醫無閭,藪曰豯養,川曰河、泲,浸曰菑、時;其利魚、鹽;民一男三女;畜宜四擾,穀宜三種。

 

河內曰冀州其山曰霍,藪曰揚紆,川曰漳浸曰汾、潞;其利松、柏;民五男三女;畜宜牛、羊,穀宜黍、稷。

하내 지역이 기주다: 산은 곽산이고, 천은 장수이고, 침(강)은 분하와 로하이다.

 

正北曰并州:其山曰恆山,藪曰昭餘祁,川曰虖池、嘔夷,浸曰淶、易;其利布帛;民二男三女;畜宜五擾,穀宜五種。

정북쪽이 병주이다: 산은 항산이있고, 천은 호타하이고, 침(강)은 래수와 역수가 있다.

 

2.후한서 군국지

後漢書/卷110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wikisource.org)

後漢書 《志》第二十  郡國二 豫州 冀州

 

기주冀州

 

魏郡 高帝置。雒陽東北七百里。〈魏志曰:「建安十七年,割河內之蕩陰、朝歌、林慮,東郡之衛國、頓丘、東武陽、發干,鉅鹿之廮陶、曲〔周〕、南和、廣平、任,趙國之襄國、邯鄲、易陽,以益魏郡。十八年,分置東西都尉。」〉十五城,戸十二萬九千三百一十,口六十九萬五千六百六。

 

鉅鹿郡,秦置。建武十三年省廣平國,以其縣屬。雒陽北千一百里。十五城,戸十萬九千五百一十七,口六十萬二千九十六。

 

常山國,高帝置。建武十三年省眞定國,以其縣屬。十三城,戸九萬七千五百,口六十三萬一千一百八十四。

 

中山國,高祖置。雒陽北一千四百里。十三城,戸九萬七千四百一十二,口六十五萬八千一百九十五。

 

安平國,故信都,高帝置。明帝名樂成,延光元年改。雒陽北二千里。十三城,戸九萬一千四百四十,口六十五萬五千一百一十八。

 

河間國,文帝置,世祖省屬信都,和帝永元二年復故。雒陽北二千五百里。十一城,戸九萬三千七百五十四,口六十三萬四千四百二十一。

 

清河國,高帝置。桓帝建和二年改為甘陵。雒陽北千二百八十里。七城,戸十二萬三千九百六十四,口七十六萬四百一十八。

 

趙國,秦邯鄲郡,高帝改名。雒陽北千一百里。五城,戸三萬二千七百一十九,口十八萬八千三百八十一。

 

勃海郡,高帝置。雒陽北千六百里。八城,戸十三萬二千三百八十九,口百一十萬六千五百。

 

 

 

 

 

 

3.위서지형지 권106 상 기주

魏書/卷106上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wikisource.org)

冀州〈後漢治高邑,袁紹、曹操為冀州,治鄴,魏、晉治信都,晉世邵續治厭次,慕容垂治信都。皇始二年平信都,仍置。〉領郡四  縣二十一  戶一十二萬五千六百四十六  口四十六萬六千六百一

기주는 후한때 치소는 고읍이고, 원소와 조조는 기주로 삼았다. 치소는 업이고였고, 위와 진때의 치소는 신도였고,

모용수의 치소는 신도였고, 황시2년 신도를 평정하고 치소를 설치했다.

군이 4개이고 현이 21개이고, 가구는 125,646호이고 인구는 466,601명이다.

 

기주에 속한 4개군

長樂郡〈漢高帝置,為信都郡,景帝二年為廣川國,明帝更名樂成,安帝改曰安平,晉改。

勃海郡〈漢高帝置,世祖初改為滄水郡,太和二十一年復。〉領縣四

武邑郡〈晉武帝置。〉領縣五

安德郡〈太和中置,尋併勃海,中興中復。〉領縣四

 

4. 독사방여기요卷四十 山西二 太原府

祁縣,府南百五十里。東至太谷縣五十里,西南至汾州府介休縣九十里。春秋時晉大夫祁奚邑。

태원부 기현은 태원부 남쪽 150리에 있다. 동쪽으로 태곡현까지 50리이고, 서남쪽으로 분주 개휴현까지 90리이다.

춘추시 진 대부 기해읍이다.

《左傳》昭二十八年:「晉滅祁氏,分爲七縣,魏獻子以賈辛爲祁大夫。」是也。漢置祁縣,屬太原郡,後漢、魏、晉因之。後魏仍屬太原郡。高齊廢。隋復置,唐初屬太州,尋還屬并州。宋因之。金改屬晉州。元屬冀寧路。今編户四十有五里。故祁城,縣東南七里。漢縣治此,後魏徙今治。今曰故縣邨,亦曰祁城村。又東南八里有古祁城,志以爲古祁氏之邑也。○郜城,在縣西七里。志云:《左傳》成十三年「晉侯使呂相絕秦曰焚我箕、郜」,謂此郜城也,恐誤。或謂之鵠城。今其地名高城邨,蓋音訛也。又趙襄子城,志云:在縣西六里。趙襄子所築,今名趙武邨。又沙邨城,在縣西五里。相傳慕容垂所築也。隆舟城,縣東南三十里。或謂之隆州城。五代周初劉崇據河東十二州,隆州其一也。既而劉繼元築城以拒周師。宋太平興國四年伐北漢,命行營都監折御卿分兵攻其岢嵐軍,下之,遂取嵐州。漢人於隆舟依險築城拒守,爲宋軍所拔。王氏曰:「折御卿自府州會兵先克岢嵐,次克嵐州,隆州蓋晉、漢間所置,其地當在岢、嵐間,非即隆舟城也。」又縣東北十五里有禿髮城,或以爲後魏時置。歵山,縣東南六十里,東接大谷縣界,南接武鄉縣界。其相近者又有麓臺山,一名頂山,又名蒙山,亦曰竭方山。南跨平遙,迤邐接武鄉、沁源、靈石三縣界。團柏谷,在縣東南。即隆舟城之地,今曰團柏鎮。唐末石敬瑭及契丹兵圍晉安砦,唐主自河陽遣將康思立進援,赴團柏谷。既而盧龍、魏博諸軍皆屯團柏谷口,去晉安才八里,聲聞不通,及晉安不守,契丹與河東兵進至團柏,唐兵遂潰。周廣順初,北漢主發兵屯團柏。又顯德初,北漢主遣其將李存環自團柏進攻晉州,又自團柏南趨潞州,進屯梁侯驛,昭義帥李筠壁於太平驛,爲北漢兵所敗,遁歸上黨。宋乾德四年昭義節度使李繼勳伐北漢,漢主劉繼恩遣劉繼業等扼團柏,爲繼勳前鋒將何繼筠所敗,遂奪汾河橋,薄太原城下,焚其延夏門,會契丹來救乃還。又開寶三年,北漢主劉繼元置寶興軍於此。《九國志》:「北漢主以僧劉繼邕知國政,繼邕遊華巖,見地有寶氣,乃於團柏谷置銀場,募民鑿山採取,北漢主因置寶興軍是也。」梁侯、太平等驛,俱見潞安府長治縣。隆舟水,在縣東南。志云:本名龍舟水,源出縣東南百六十里胡甲山西,亦名胡甲水,北流出龍舟谷名龍舟水。其支渠東北出爲昌源渠,西南出徑平遙縣界爲長壽渠,皆有灌溉之利。又徑侯邨旁,名侯甲水,至介休縣北張南邨溉田,流入汾水。《水經注》:「侯甲水發源胡甲嶺。」蔡邕曰:「侯甲,邑名,在祁縣。」今沁州武鄉縣西北有胡甲嶺,蓋舊爲祁縣地。胡谷水,在縣東。志云:出太谷縣,流入縣境。或曰即通光水也,出縣東南四十里胡城谷中,亦謂之胡城水,北流溉田,爲利甚溥。昭餘祁藪,縣東七里。其水久涸,元至元十一年浚鑿得細水,溉田及浸隍下樹木。《周•職方》:「并州藪曰昭餘祁。」《水經注》:「侯甲水又西北流徑祁縣故城南,自縣連延,西接鄔澤。是爲祁藪,即《爾雅》所謂昭餘祁矣。」隆州谷關,縣東南九十里。南通沁州,北通徐溝縣,兩壁皆山,道旁有水,即胡甲水也。洪武三年置巡司戍守,亦曰隆州谷北關。盤陀戍。縣東五里。宋靖康初金人敗种師中之兵於榆次,乘勝趨威勝軍,與姚古遇於盤陀山,兵潰,退保隆谷。今爲盤陀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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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서 조선에 대한 사료 연구 「두로공신도비豆盧公神道 - 역사 갤러리 (dcinside.com)

두로공신도비豆盧公神道碑」에는 "조선이 건국하고 고죽을 임금으로 삼았다."라고 적혀있다.

 

비문을 인용해 보면, “군의 휘는 영은이요 자는 모이다 창려 도하 사람이다. 본 성은 모용이다. 

연 문명제 황의 후손이다. 

조선 미(기)자가 고죽에 책봉되었는데 백이의 나라이다.

한나라 때엔 4개의 성(낙랑성 현토성 진번성 임둔성)이었고 그 이전 진나라(진시황) 땐 한 제후(조선 제후)였다.

.... 조선이 건국하자 고죽을 임금으로 삼았다.

 

君諱永恩字某, 昌黎徒河人, 本姓慕容, 燕文明帝之後也. 朝鮮箕子之封

孤竹伯夷之國, 漢有四城秦為一候 … 乃為銘曰 朝鮮建國, 孤竹為君"    라고 나온다.

 

두로공신도비는 전연 모용황의 후손 두로영은의 비석으로 566년에 비문을 새겼으며

현재 섬서성 함양 박물관에 보관 되어있는데 그 비문에

" (모용황이 활동한 지역이) 고조선때 기자가 봉해진 곳이고. 고죽국 백이의 나라이고, 한나라때 4개성이 있던 곳"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즉 기자조선의 위치가 밝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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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공신도비와 고조선의 위치 문제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두로공신도비와 고조선의 위치 문제

두로공신도비와 고조선의 위치 문제 두로공은 누구인가? 두로공신도비豆盧公神道碑의 주인공 두로공豆盧公...

blog.naver.com

오늘의유머 - '두로 영은비'-요서에서 고조선이 건국을 하였다는 사실 (todayhumor.co.kr)

두로공신도비’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농우총관부장사를 역임하고 태자소보에 증직된 두로영은공의 신도비다.

비문은 566년에 새겼다(각자되었다).

 

豆盧公神道碑

두로영은의 원래 성은 모용이고 창려 도하사람이다. 전연항제 모용황의 후손이다.

(모용황이 활동한 지역은) 조선기자지봉 고죽 백이지국.

고조선시대 기자가 봉해진 지역이고 고죽국 백이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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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6

[기획연재③] 민족의 뿌리를 찾아서…고조선 알린 결정적 사료 ‘두로영은비’ - 의회신문 (icouncil.kr)

의회신문

 

【의회신문=심백강 박사】퇴계전서, 율곡전서, 조선왕조실록 등 한국의 주요 고전들을 번역한 국내 굴지의 한학자이자 한·중고대사를 전공하고 중국에서 역사학박사 학위를 받은 역사학자인 저자 심백강 선생은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포함되지 않은 고조선의 비자료, 사대 식민주의자들이 밝히기를 꺼린 채 감추어 왔던 ‘고조선의 숨은 자료’들을 새롭게 밝힌다. 본지에서는 영원히 잃어버린 줄 알았던 위대한 고조선의 역사와 의미, 그리고 남은 과제에 대해 5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주>


왜 고조선을 되찾았다고 말하는가

‘조선성’과 고조선

한국인 가운데 중국 하북성에 있는 노룡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하북성 진황도시에 소속되어 있다. 그런데 이곳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다”는 기록이 송나라 때 낙사라는 학자가 편찬한 지리총서인 ≪태평환우기≫에 실려 있다.

 

≪태평환우기≫는 노룡현 조항에서 고죽성, 요서성과 함께 조선성을 소개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죽성 다음에 조선성, 조선성 다음에 요서성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고죽성 부근에 조선성이 있고 조선성 인근에 요서성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첫 국가 고조선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조선성이 왜 송나라의 하북도 평주 노룡현 지역에 고죽성, 요서성과 함께 폐성으로 남아있었던 것일까.
≪태평환우기≫의 저자 낙사는 노룡현에 있는 조선성을 소개하면서 “조선성은 바로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다.

지금 황폐한 성이 남아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태평환우기≫의 설명은 그 당시 기자가 찾아갔던 조선은 오늘의 대동강 유역 평양에 있었던 한반도 조선이 아니라,

하북성 동쪽 조하 유역 노룡현에 있던 요서조선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이 기록 하나만 놓고 보면 얼른 수긍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북해(발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한다”라고 한 ≪산해경≫, “중국 남쪽 송나라에서 북방 요나라 서울 영성으로 갈 때 하북성 고북구 부근에 있는 조선하를 건너서 갔다”라고 한 ≪무경총요≫와 ≪왕기공행정록≫, “선비족 모용외가 조선 땅을 기반으로 발전했고 모용황이 조선공에 봉해졌다”라고 한 ≪진서≫와 “갈석산 부근에 조선국이 있었다”라고 한 ≪회남자≫의 기록 등과 대조해 보면, 기자가 찾아갔던 그 조선은 대동강 유역 평양이 아닌 하북성 조하 유역 평주 노령현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신으로 다가오게 된다.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조선성 유적이 있다는 ≪태평환우기≫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이씨조선에 앞서 압록강 서쪽의 발해만 부근에 있었던 요서조선의 실체를 오늘에 확실히 다시 찾게 된 것이다.

‘조선공’과 고조선

≪진서≫ 109권 재기(載紀) ‘모용황전’에는 요서에서 활동하던 창려 사람 선비족 모용황이 전쟁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운 공로로 325년 조선공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모용황은 선비족 모용외의 아들로 태어나 요서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던 인물이다. 당시 그의 행동반경은 선비족의 근거지인 오늘의 시라무렌강 상류 일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에게 어떻게 조선공을 봉할 수 있었을까.

진나라 시대의 기록인 ≪진서≫에는 당시 낙랑군이 평주에 설치되어 있고 낙랑군 25개 현 중의 첫째 현으로서 조선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모용황은 진나라 때 사람이니 그가 봉해진 조선은 바로 이 당시 평주의 조선현일 것이다. 그를 조선공으로 봉한 것은 그가 조선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어서였을 가능성이 많다.

낙랑군 조선현은 모용황이 활동하던 지역인 시라무렌강 유역 부근 요서에 있었고, 선비족의 조상들은 조선의 옛 땅을 근거지로 발전했으며, 조선은 역사·문화적으로 모용씨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그에게 조선공을 봉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활동하며 전공을 세운 모용황에게 아무런 연고나 관련도 없는 수천 리 떨어진 대동강 유역의 조선현을 떼어서 그에게 봉지로 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진서≫의 기록은 고조선과 한사군의 낙랑군 조선현이 대동강 유역이 아닌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밝혀주는 결정적 단서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 중국 섬서성 함양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두로 영은비' 중의 조선국 기록 부분.

‘조선국’과 고조선

상고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금석문만큼 중요한 사료는 없다. 금석문은 한번 글자를 새겨 넣은 다음에는 위조나 변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로공신도비’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농우총관부장사를 역임하고 태자소보에 증직된 두로영은공의 신도비다. 그의 본래 성은 모용이고 두로은으로도 불려 ‘두로은비’, ‘모용은비’로 불리기도 한다. 이 비는 지금까지 보존되어 중국 섬서성의 함양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1500년 전 요서에서 활동한 선비족 두로영은의 신도비문을 주목하는 까닭은 요서에 있었던 고조선국의 실체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내용이 이 비문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로공신도 비문에 나오는 명문의 첫 구절은 “조선건국(朝鮮建國) 고죽위군(孤竹爲君)”이다. 요서에 있던 조선국과 고죽국은 모용씨가 세운 연나라의 건국과 통치의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조선건국 고죽위군” 이라고 요약한 것이다.

모용선비의 주요 활동지역은 진한시대의 요서와 요동, 그리고 하북성 서북과 중부 지역까지를 포괄했다. 이 지역은 이른바 고조선이 건국을 했고 고죽국이 통치를 했으며 한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했던 곳이다. 그래서 모용선비의 역사를 이야기 하며 “조선건국 고죽위군”이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두로영은의 신도비문에 나오는 이 짧은 문장은 요서에서 고조선이 건국을 하였다는 사실을 그 어떤 자료보다 확실하게 대변해주고 있다.

이 문구가 일찍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인용이 안 된 것은 천추에 한스러운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베일을 벗고 우리 앞에 정체를 드러낸 것은 한국사의 재정립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한편으론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의회신문(http://www.icounc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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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수양산이 감숙성에 있다고 주장하는 글.

 

붉은 까마귀 | 伯夷와 叔齊가 굶어 죽은 곳이 首陽山이다. - Daum 카페

 

伯夷 叔齊이 굶어 죽었다 라는 首陽山은 甘肅 隴西縣인 것입니다.

《水經注》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渭水出隴西首陽縣渭首亭南鳥鼠山.』

즉, 首陽山은 隴西 首陽縣의 발원지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孤竹國 위치가 산서성 서남부의 首陽山이 있는 곳일 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伯夷와 叔齊이 굶어 죽었다 라는 首陽山은 渭水​가 발원하는 곳이 존재 한다 라는 의미 입니다.

首陽山 孤竹國에 있는 산이며 商나라의 왕족이였던 伯夷와 叔齊 형제가

周武王의 통치를 거부하고 들어가서 굶어 죽었다는 산 입니다.

따라서 渭水가 발원하는 곳인 首陽山이 있는 곳이 孤竹國이 있었다 라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箕子朝鮮과 고구리가 있었던 곳이 《구당서》와 《신당서》 기록의 裵矩列傳에

“高麗는 본시 孤竹國 인데 周가 箕子를 봉하고 조선이라 하였으며

漢이 3郡으로 나누었으니, 玄菟, 樂浪, 帶方이다.”라고 하는 기록에 따르면

箕子朝鮮과 고구리의 위치가 渭水가 발원하는 곳에 존재 한다라는 것이 되지요.

그러나 고구리의 위치는 절대로 渭水가 발원하는 곳에 존재 할 수 없으며

고구리의 위치는 지금의 산서성 서남부 일대입니다.

기원전 108년 한무제는 낙랑조선을 滅하고 13州를 다시 재편 햇던 것이며

이 때 隴西에 존재 했던 河東, 平陽, 晉陽, 太原, 恆山, 太行山, 汾水, 靑水, 首陽山

등의 이름들을 모조리 산서성 서남쪽으로 이동 시킨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마치 孤竹國과 箕子朝鮮이 산서성 서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