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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후한서 군국지 지명 위치/모본왕 2년 태원 침습/계꽃 제비꽃(연)

徼요~변방의 경계, 순찰할 요,

祭제,채~제사 제, 나라 이름 채,

肜융~융제사 융(제사 다음 날의 제사).

招降초항~적을 타일러서 항복하도록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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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군국지
後漢書/卷110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wikisource.org)
後漢書 《志》第二十  郡國二 豫州 冀州

 기주冀州
魏郡 高帝置。雒陽東北七百里。〈魏志曰:「建安十七年,割河內之蕩陰、朝歌、林慮,東郡之衛國、頓丘、東武陽、發干,鉅鹿之廮陶、曲〔周〕、南和、廣平、任,趙國之襄國、邯鄲、易陽,以益魏郡。十八年,分置東西都尉。」〉十五城,戸十二萬九千三百一十,口六十九萬五千六百六。

 

鉅鹿郡,秦置。建武十三年省廣平國,以其縣屬。雒陽北千一百里。
中山國,高祖置。雒陽北一千四百里。

安平國,故信都,高帝置。明帝名樂成,延光元年改。雒陽北二千里。
河間國,文帝置,世祖省屬信都,和帝永元二年復故。雒陽北二千五百里。

清河國,高帝置。桓帝建和二年改為甘陵。雒陽北千二百八十里
趙國,秦邯鄲郡,高帝改名。雒陽北千一百里。

勃海郡,高帝置。雒陽北千六百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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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卷110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wikisource.org)

 

後漢書 《志》第二十
郡國二 豫州 冀州

 

기주冀州

 

魏郡
  魏郡高帝置。雒陽東北七百里。〈魏志曰:「建安十七年,割河內之蕩陰、朝歌、林慮,東郡之衛國、頓丘、東武陽、發干,鉅鹿之廮陶、曲〔周〕、南和、廣平、任,趙國之襄國、邯鄲、易陽,以益魏郡。十八年,分置東西都尉。」〉十五城,戸十二萬九千三百一十,口六十九萬五千六百六。

  鄴,〈帝王世記曰:「縣西南有上司馬,殷太甲常居焉。」魏都賦注曰:「縣西北有鼓山,時時自鳴,鳴則兵。」又交谷水在縣南。案:本傳有西唐山。又鄴北太行山,西北去,亦不知山所極處,亦如東海不知水所窮盡也。〉有故大河。有滏水。〈魏都賦曰:「北臨漳、滏,則冬夏異沼。」注云:「水經鄴西北。滏水熱,故名滏口。」〉有汙水,有汙城。〈史記曰項羽破秦軍汙水上。〉有平陽城。〈史記曰靳歙別下平陽。〉有武城。有九侯城。〈徐廣曰一作「鬼侯」。與文王為紂三公。〉

  繁陽,

  內黃,〈左傳襄十九年會于柯,杜預曰縣東北有柯城。昭九年荀盈卒于戲陽,杜預曰縣北有戲陽城。〉清河水出。有羛陽聚。〈世祖破五校處。〉有黃澤。〈前志曰在縣西。〉

  魏,

  元城,〈左傳成七年會馬陵,杜預曰縣東南有地名馬陵。史記曰龐涓死處。〉五鹿墟,故沙鹿,〈左傳:「沙鹿崩。」穀梁傳曰:「林屬於山曰鹿。沙,山名也。」〉有沙亭。〈左傳定七年盟于沙(亭),杜預曰〔沙亭〕在縣東南。七年盟于瑣,晉地道記曰縣南有瑣陽城。〉

  黎陽,〈左傳定十四年會于牽,杜預曰縣東北有牽城。〉

  陰安,邑

  館陶,

  清淵,

  平恩,

  沙,侯國。〈魏都賦注曰有龍山。〉

  斥丘,有葛。〈杜預曰有乾侯。魯昭公所處。〉

  武安,有鐵。〈即臺孝威隱于縣山。〉

  曲梁,侯國,〈左傳宣十五年敗赤狄于曲梁。〉故屬廣平。有雞澤。〈左傳襄三年諸侯會雞澤,杜預曰在縣西南。〉

  梁期,

鉅鹿郡
  鉅鹿郡,秦置。建武十三年省廣平國,以其縣屬。雒陽北千一百里。十五城,戸十萬九千五百一十七,口六十萬二千九十六。

  陶,有薄落亭。

  鉅鹿,故大鹿,有大陸澤。〈有廣阿澤。呂氏春秋九藪趙之鉅鹿,高誘注云廣阿澤也,山海經曰大陸之水。史記紂盈鉅橋之粟。許慎云:「鉅鹿之大橋也。」鉅鹿南有棘原,章邯所軍處。前書曰沙丘臺在縣東北七十里。〉

  楊氏,

  鄡,

  下曲陽,有鼓聚,故翟鼓子國。〈杜預曰縣西南有肥累城。古肥國,白狄別種。〉有昔陽亭。〈左傳昭十二年晉荀吳入昔陽,杜預曰沾縣東有昔陽城。(取)〔肥〕故都也。〉

  任,

  南和,

  廣平

  斥章,

  廣宗,

  曲周,

  列人,

  廣年,

  平鄉,

  南〈糸言糸〉,

常山國
  常山國,高帝置。建武十三年省眞定國,以其縣屬。十三城,戸九萬七千五百,口六十三萬一千一百八十四。

  元氏,〈晉地道記有石塞、三公塞。〉

  高邑,故鄗,光武更名。刺史治。〈漢官曰去雒陽一千里。〉有千秋亭、五成陌,〈縣南七里。〉光武即位於上此矣。

  都鄉,侯國。有鐵。

  南行唐,有石臼谷。

  房子,贊皇山,〈在縣西南六十里。〉濟水所出。〈晉地道記有礫塞、中谷塞。〉

  平棘,有塞。

  欒城,〈〔在平棘〕縣西北四十里。〉

  九門,〈史記趙武靈王出九門,如野臺以望齊、中山之境。碣石山,戰國策云在縣界。〉

  靈壽,衛水出

  蒲吾,〈史記番吾君。杜預曰晉之蒲邑也。古今注曰:「永平十年,作常山呼沱河蒲吾渠,通漕船也。」〉

  井陘

  眞定,

  上艾,故屬太原

中山國
  中山國,高祖置。雒陽北一千四百里。十三城,戸九萬七千四百一十二,口六十五萬八千一百九十五。

  盧奴,

  北平,有鐵。

  毋極,

  新市,有鮮虞亭,故國,子姓。〈杜預曰白狄別種。〉

  望都,〈左傳晉伐鮮虞及中人,杜預曰縣西北有中人城。晉地道記有馬安關。〉

  唐,有中人亭,〈博物記曰:「堂關在中人西北百里,中人在縣西四十里。」列子曰:「趙襄子使新稚穆子攻翟,取左人、中人。」〉有左人鄉。〈帝王世記曰:「堯封唐。堯山在北,唐水西入河,南有望都山,即堯母慶都所居,相去五十里。都山一名豆山。」博物記曰:「左人,唐西北四十里。」〉

  安國,

  安憙,本安險,章帝更名。

  漢昌,本苦陘,章帝更名。

  蠡吾,侯國,故屬涿。

  上曲陽,故屬常山。恆山在西北。〈有泉水,干吉得神書。晉地道記:「自縣北行四百二十五里,恒多山阪,名飛狐口。」〉

  蒲陰,本曲逆,章帝更名。有陽城。〈晉地道記曰:「有陽安關。陽城。蒲陽山,蒲水出也。」〉

  廣昌,故屬代郡

安平國
  安平國,故信都,高帝置。明帝名樂成,延光元年改。雒陽北二千里。十三城,戸九萬一千四百四十,口六十五萬五千一百一十八。

  信都,有絳水、呼沱河

  阜城,故昌城。

  南宮,

  扶柳,

  下博,

  武邑,

  觀津,〈本清河下縣。決錄注曰:「孝文竇皇后父隱身漁釣,墜淵而卒。景帝立,后為太后,遣使者更填父所墜淵而葬,起大墳于縣城南,民號曰竇氏青山。」〉經西有漳水,津名薄落津。〈史記曰,趙武靈王曰:「吾國東有河、薄落之水。」〉

  堂陽,故屬鉅鹿

  武遂,故屬河間

  饒陽,故名饒,屬涿。有無蔞亭。〈馮異進豆粥光武。案:志有解犢侯,靈帝封。〉

  安平,故屬涿

  南深,澤故屬涿

河間國
  河間國,文帝置,世祖省屬信都,和帝永元二年復故。雒陽北二千五百里。十一城,戸九萬三千七百五十四,口六十三萬四千四百二十一。

  樂成,

  弓高,

  易,故屬涿。

  武垣,故屬涿。

  中水,故屬涿。

  鄚,故屬涿。

  高陽,故屬涿。有葛城。

  文安,故屬勃海

  束州,故屬勃海

  成平,故屬勃海

  東平舒,故屬勃海

清河國
  清河國,高帝置。桓帝建和二年改為甘陵。雒陽北千二百八十里。七城,戸十二萬三千九百六十四,口七十六萬四百一十八。

  甘陵,故厝,安帝更名。

  貝丘,

  東武城,

  鄃,

  靈,和帝永元九年夏。〈地道記曰有鳴犢河。〉

  繹幕,

  廣川,故屬信都。有棘津城。〈太公呂尚困於棘津城,琅邪海曲,非此城也。案:永初元年鄧太后分置廣川王國,後王薨,國除。太后崩,還益清河。〉

趙國
  趙國,秦邯鄲郡,高帝改名。雒陽北千一百里。五城,戸三萬二千七百一十九,口十八萬八千三百八十一。

  邯鄲,〈張華曰:「趙奢冢在邯鄲西山上,謂之馬服山。」〉有叢臺。〈有洪波臺。〉

  易陽,〈魏都賦曰:「溫泉毖涌而自浪。」注曰:「溫泉在易陽,世以治疾,洗百病。」〉
역양(易陽): 「위도부(魏都賦)」에 이르기를, “온천이 끊임없이 솟아올라 스스로 파도친다.”

주석에 이르기를, “온천은 역양에 있으며, 세상 사람들은 이 온천으로 병을 치료하고 모든 병을 씻어낸다.”


  襄國,本邢國,秦為信都,項羽更名。有檀臺。〈史記曰趙成侯,魏獻榮椽,因以為檀臺。〉有蘇人亭。

  柏人,

  中丘,〈晉地道記曰有石門塞、燒梁關。〉

勃海郡
  勃海郡,高帝置。雒陽北千六百里。八城,戸十三萬二千三百八十九,口百一十萬六千五百

  南皮,

  高城,侯國。

  重合,侯國。

  浮陽,侯國

  東光,〈有胡蘇亭。胡蘇河之名見爾雅。〉

  章武,

  陽信,延光元年復。

  脩,故屬信都。

  右冀州刺史部,郡、國九,縣、邑、侯國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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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삼국사기 기록.

 

또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2년( 기원49년)에 '한나라의 우북평,어양, 상곡태원을 침습하였는데,
요동태수 제동이 은의와 신의로써 대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는 기록에서 볼때
이들은 한 지역에 붙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요동군은 공격 루트로 보았을 때 상곡군과 어양군 남쪽이나 서쪽에 위치하였을 것이다.

 

아래는 후한서 후한 광무제 기록.

二十五(AD 49년)春正月,遼東徼外貊人〈貊人,穢貊國人也。貊音陌。〉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遼東太守祭肜招降之。烏桓大人來朝。〈大人謂渠帥也。〉
49년 춘정월, 요동성 경계 밖 맥인이(맥인은 예맥국 사람이다)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략하자

요동태수 채융이 타일러서 항복하도록 하였다.


南單于遣使詣闕貢獻,奉蕃稱臣;又遣其左賢王擊破北匈奴,却地千餘里。

三月,南單于遣子入侍。

남선우(南單于)가 사신을 보내어 조정에 조공을 바치고 번국(藩國)으로서 신하를 자처하였다. 또한 좌현왕(左賢王)을 보내어 북흉노(北匈奴)를 격파하고 천여 리의 땅을 되찾았다.

후한서 기록으로 볼때 춘정월 한달중에 일어난 전쟁 기록인데,
고구려가 현재 요양에서 출발해 태원까지 오려면 현재 고속도로로 1200Km인데, 전쟁을 치루면서
한달 사이에 왔다 갈수가 없다고 봅니다.

 

또 수경주 고하편에 보면 고하가 흐르는 물줄기에 상곡군 여기현(왕망의 기현)이 있고,
산서성 지명인' 온천','로현'등이 있는 것으로 볼때 어양군등은 산서성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이진 서북쪽에서 나오는 고하와, 어이진 북쪽에서 나오는 포구수의 물줄기 흐름이 설명됩니다.

 

漁陽郡, 漁陽, 沽水出塞外, 東南至泉州, 入海. 行七百五十里. 有鐵官. 莽曰得漁.

어양군 어양현, 고수가 새외에서 나와 동남으로 흘러 어양군 천주현에 도달하여 바다(큰강)로 들어간다.

750리를 흐른다. 철관(鐵官)이 있다. 왕망(王莽)은 이를 '득어(得漁)'라고 불렀다.

 

軍都, 溫餘水東至路南入沽.

상곡군 군도현(軍都縣), 온여수(溫餘水)가 동쪽으로 흘러

어양군 로현(路縣)에 이르러 남쪽으로 고수(沽水)로 들어간다.

(주: 상곡군과 어양군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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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루트를 보면 요동지나고 요서지나고 태원까지 가는데.....
왜 마지막에 요동태수가 나타나서 협상을 하는지....
요동군은 태원 어양 상곡 우북평의 남쪽이나 서쪽에 있어야 가능함.

또 고구려가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 모르겠지만 ...
전쟁은 한달정도 이뤄졌습니다. 후한서 기록보면  3월과 그 전에 다른 일들이 일어남.
한달간 왕복 2천킬로되는 거리를 그냥 다녀오기도 힘든데 전쟁하면서 다녀오는건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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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보병이 하루에 15킬로 가는데 한달이면 450킬로 갑니다.
450킬로 왕복이면 900킬로로 2달 걸린다.(싸우지 않았을 경우)

님이 지도상에 표시된 고구려와 태원까지 거리 계산해보면 불가능.

그래서 전쟁이 일어난 태원 요동 어양 상곡등 모두 한군데 즉 산서성에 있어야 가능한 전쟁.
이래서 수경주를 읽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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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성 형수시--->산서성 태원까지 구글 지도 직선거리 363킬로, 2배하면 726킬로, 왕복 1452킬로
하루에 15킬로 걸어가면  97일 걸림.

하북성 보정시---> 산서성 태원까지  구글 지도 350킬로 정도 2배하면 700킬로,  왕복 1400킬로
 93일 걸림. 싸우지 않고 가는 거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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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五(AD 49년)春正月,遼東徼外貊人〈貊人,穢貊國人也。貊音陌。〉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遼東太守祭肜招降之。烏桓大人來朝。〈大人謂渠帥也。〉

南單于遣使詣闕貢獻,奉蕃稱臣;又遣其左賢王擊破北匈奴,却地千餘里。三月,南單于遣子入侍。

춘정월에 고구려와 싸움. 춘정월은 음력 2월.

삼국사기 기록은 2월에 정쟁.
3월에는 폭풍우가 불고 4월에는 서리 우박 내림.

고구려 전쟁은 1개월내에 끝난 것으로 볼수있다.
그래서 요동군이 중국이 비정한 위치에 있으면 안되고,
태원군 서쪽이나 남쪽에 있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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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팩트 - 북경은 그들과는 무관한 지역이었다!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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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진나라의 국경, 고대 요동은 어디였을까? - YouTube

 

 

4분30초-->고조선과 진나라의 국경은 고대 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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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동이열전

 

高句驪,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地方二千里,多大山深谷,人隨而為居。少田业,力作不足以自资,故其俗節於飲食,而好修宫室。東夷相傳以為夫餘别種,故言語法則多同,而跪拜曳一脚,行步皆走。凡有五族,有消奴部、絕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本消奴部為王,稍微弱,後桂婁部代之。其置官,有相加、对卢、沛者、古邹大加、主簿、优台、使者、帛衣先人。武帝滅朝鮮,以高句驪為縣,使屬玄菟,賜鼓吹伎人。其俗淫,皆洁净自熹,暮夜輒男女群聚為倡樂。好祠鬼神、社稷、零星,以十月祭天大會,名曰“東盟”。其國東有大穴,號禭神,亦以十月迎而祭之。其公會衣服皆錦绣,金银以自飾。大加、主簿皆著帻,如冠帻而無後;其小加著折風,形如弁。無牢獄,有罪,諸加評议便殺之,没入妻子為奴婢。其昏姻皆就婦家,生子長大,然後將還,便稍营送终之具。金银財币尽於厚葬,积石為封,亦種松柏。其人性凶急,有氣力,习戰斗,好寇鈔,沃沮、東濊皆屬焉。

句驪一名貊,有别種,依小水為居,因名曰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 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조선, 예맥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옥저, 북쪽으로는 부여와 접해 있다. 지역의 크기는 이천 리에 달하며, 많은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있어 사람들이 그에 따라 거주한다. 농업이 적어 열심히 일해도 충분히 자급자족하지 못하므로, 그들의 풍습은 음식에 절약하고 궁실을 짓는 것을 좋아한다. 동이족들은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이라고 전해왔으므로, 언어와 법도가 비슷하며, 한쪽 발을 끌고 무릎을 꿇어 절하고, 걷는 것은 모두 뛰듯이 한다. 다섯 부족이 있는데,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가 있다. 본래 소노부가 왕이 되었으나 점차 약해져서 후에 계루부가 이를 대신하였다. 그들이 세운 관직에는 상가, 대로, 패자, 고추대가, 주부, 우대, 사자, 백의선인 등이 있다.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삼아 현도에 속하게 하였고, 북과 피리를 연주하는 기악인을 하사하였다. 그들의 풍습은 음란하고 모두 청결하게 자족하며, 밤이 되면 남녀가 함께 모여 창악(倡樂)을 즐긴다. 귀신과 사직, 조상의 혼을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며,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큰 모임을 열어 이를 ‘동맹’이라 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는 큰 구멍이 있어 이를 ‘세신(禭神)’이라 부르며, 역시 10월에 맞이하여 제사를 지낸다. 그들의 공회 때 입는 의복은 모두 비단으로 만들며,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대가(大加)와 주부는 모두 택(帻)을 쓰는데, 이는 관택(冠帻)과 비슷하나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이는 변(弁)과 비슷한 형태이다. 감옥이 없으며, 죄가 있으면 여러 가(加)들이 협의하여 바로 처형하고, 아내와 자식은 노비로 만든다. 결혼은 모두 여자의 집에서 이루어지며, 자식을 낳아 크게 되면 비로소 남자의 집으로 돌아오고, 차츰 장례 준비를 한다. 금과 은, 재물을 두텁게 써서 후하게 장례를 치르며,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그 사람들은 성격이 흉포하고 급하며, 기력이 세고 싸움을 잘하며, 침략을 좋아하여 옥저와 동예도 모두 고구려에 속해 있다.

고구려는 또 다른 이름으로 맥(貊)이라고도 하며, 별종이 있어 작은 물가에 거주하므로 소수맥(小水貊)이라 불린다. 좋은 활을 만들어 ‘맥궁(貊弓)’이라고 한다.

 

王莽初,发句驪兵以伐匈奴,其人不欲行,强迫遣之,皆亡出塞為寇盗。遼西大尹田谭追擊,戰死。莽令其將严尤擊之,誘句驪侯驺入塞,斬之,傳首長安。莽大說,更名高句驪王為下句驪侯,於是貊人寇邊愈甚。建武八年,高句驪遣使朝貢,光武復其王號。

 

왕망 초기에, 고구려 병사를 동원하여 흉노를 정벌하려 했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이를 원하지 않았고 강제로 보내자 모두 변방 밖으로 도망가 도적이 되었다. 요서의 대윤(大尹) 전담(田谭)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왕망은 장수 엄우(严尤)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고, 고구려의 후(侯)인 구를 유인하여 변방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그를 참수하고 머리를 장안에 전시하였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며 고구려 왕의 이름을 하구려후(下句驪侯)로 바꾸었다. 이에 맥인(貊人)들이 변방을 더욱 심하게 침략하였다.

건무(建武) 8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자, 광무제(光武帝)는 고구려 왕의 칭호를 회복시켜 주었다.

 

二十三年冬,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内屬。

건무 23년 겨울, 고구려의 잠지락(蠶支落) 대가(大加)인 대승(戴升) 등 만여 명이 낙랑에 내속(內屬)하였다.

 

 

二十五年春,句驪寇右北平、渔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皆復款塞

요동 태수(遼東太守)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그들을 초청하자 모두 다시 변방으로 돌아갔다.

 
(皆 다 개--->1. 다2. 나란하다3. 두루 미치다4. 함께5. 모두

款 정성 관, 항목 관-->1. 정성2. 두드리다3. 사랑하다4. 이르다5. 굽다.

塞 변방 새, 막을 색, 막힐 색-->1. 변방2. 막다3. 변경4. 성채(城砦)5.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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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
卷九十·烏桓鮮卑列傳第八十

 

漢初,亦為冒頓所破,遠竄遼東塞外,與烏桓相接,未常通中國焉。光武初,匈奴強盛,率鮮卑與烏桓寇抄北邊,殺略吏人,無有寧歲。建武二十一年,鮮卑與匈奴入遼東,遼東太守祭肜擊破之,斬獲殆盡,事已具〈肜傳〉,由是震怖。及南單于附漢,北虜孤弱,二十五年,鮮卑始通驛使。

 

한 초기에, 또한 모돈(冒頓)에게 패배하여 멀리 요동 변방 밖으로 쫓겨나 오환(烏桓)과 서로 접하게 되었으나, 중국과는 교류가 없었다. 광무제 초기에, 흉노가 강성하여 선비(鮮卑)와 오환을 이끌고 북쪽 변방을 침략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살해하고 약탈하여 편안한 해가 없었다. 건무(建武) 21년, 선비와 흉노가 요동에 침입하였으나, 요동 태수 제융(祭肜)이 이를 격파하여 거의 전부를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 일은 모두 『제융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적들이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후 남흉노(南匈奴)가 한(漢)나라에 귀순하였고, 북쪽 오랑캐가 고립되고 약해져서, 건무 25년에 선비가 비로소 역사를 통해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其後都護偏何等詣祭肜求自效功,因令擊北匈奴左伊育訾部,斬首二千餘級。其後偏何連歲出兵擊北虜,還輒持首級詣遼東受賞賜。

그 후 도호(都護) 편하(偏何) 등이 제융(祭肜)을 찾아가 스스로 공을 세우겠다고 요청하였고, 이에 그를 시켜 북흉노(北匈奴) 좌이육자부(左伊育訾部)를 공격하여 2천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 그 후 편하는 매년 군사를 이끌고 북쪽 오랑캐를 공격하여, 돌아올 때마다 수급을 가지고 요동에 와서 상과 하사품을 받았다.

 

 

三十年,鮮卑大人於仇賁、滿頭等率種人詣闕朝賀,慕義內屬。帝封於仇賁為王,滿頭為侯。

時漁陽赤山烏桓歆志賁等數寇上谷。

건무(建武) 30년, 선비(鮮卑)의 대인(大人) 어구분(於仇賁)과 만두(滿頭) 등이 그들의 부족을 이끌고 조정에 와서 조공을 바치며 한나라의 도리를 사모하여 귀속되었다. 황제는 어구분을 왕으로, 만두를 후(侯)로 봉하였다.

당시 어양(漁陽) 적산(赤山)의 오환(烏桓) 흠지분(歆志賁) 등이 자주 상곡(上谷)을 침략하였다.

 

永平元年,祭肜復賂偏何擊歆志賁,破斬之,於是鮮卑大人皆來歸附,並詣遼東受賞賜,青徐二州給錢歲二億七千萬為常。明章二世,保塞無事。

 

영평(永平) 원년, 제융은 다시 편하를 매수하여 흠지분을 공격하고 이를 격파하여 참수하였다. 이로 인해 선비의 대인들이 모두 귀순하여 요동에 와서 상과 하사품을 받았고, 청주(青州)와 서주(徐州)에서 매년 2억 7천만 전을 지급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명제(明帝)와 장제(章帝) 시기에는 변방이 안정되어 아무런 일이 없었다.

 

和帝永元中,大將軍竇憲遣右校尉耿夔擊破匈奴,北單于逃走,鮮卑因此轉徙據其地。匈奴餘種留者尚有十餘萬落,皆自號鮮卑,鮮卑由此漸盛。

九年,遼東鮮卑攻肥如縣,〔一〕太守祭參坐沮敗,下獄死。

〔一〕 肥如縣,故城在今平州也。

 

화제(和帝) 영원(永元) 중에, 대장군 두헌(竇憲)이 우교위(右校尉) 경기(耿夔)를 보내어 흉노를 격파하였고, 북선우(北單于)는 도망갔다. 이로 인해 선비족은 그 지역으로 옮겨가 자리를 잡았다. 흉노의 남은 부족 중 열여만 가량이 있었으나, 모두 스스로를 선비라 칭하며, 선비족은 이로 인해 점차 강성해졌다.

영원 9년(서기97년), 요동의 선비족이 비여현(肥如縣)을 공격하였다. 태수 제참(祭參)은 패전의 책임으로 투옥되어 죽었다.

비여현(肥如縣)은 옛 성이 지금의 평주(平州)에 있다.

 

十三年,遼東鮮卑寇右北平,因入漁陽,漁陽太守擊破之。

영원 13년(서기101년), 요동의 선비족이 우북평(右北平)을 침략하여 어양(渔陽)으로 들어갔다. 어양 태수는 이를 격파하였다.

 

延平元年,鮮卑復寇漁陽,太守張顯率數百人出塞追之。兵馬掾嚴授諫曰:「前道險阻,賊埶難量,宜且結營,先令輕騎偵視之。」顯意甚銳,怒欲斬之。因復進兵,遇虜伏發,士卒悉走,唯授力戰,身被十創,手殺數人而死。顯中流矢,主簿衛福、功曹徐咸皆自投赴顯,俱歿於陣。鄧太后策書褒歎,賜顯錢六十萬,以家二人為郎;授、福、咸各錢十萬,除一子為郎。

 

연평(延平) 원년(서기106년), 선비족이 다시 어양을 침략하자, 태수 장현(張顯)은 수백 명을 이끌고 변방 밖으로 추격하였다. 병마연(兵馬掾) 엄수(嚴授)가 간언하여 말했다. "앞길은 험난하고 적의 형세를 헤아리기 어려우니, 우선 진영을 구축하고 경무장을 한 기병으로 정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현은 매우 의욕적이었고, 화가 나서 엄수를 참하려 했다. 결국 군사를 진격시키다가, 매복한 적을 만나 병사들이 모두 도망쳤고, 엄수만이 힘껏 싸우며 열 군데 상처를 입고 여러 명을 죽이다가 전사했다. 장현은 화살을 맞았고, 주부(主簿) 위복(衛福)과 공조(功曹) 서함(徐咸)은 모두 장현에게 달려가 함께 전사하였다. 등 태후(鄧太后)는 조서를 내려 이들을 칭찬하고, 장현에게 60만 전을 하사하고 그의 집안 사람 두 명을 낭(郎)으로 임명하였다. 엄수, 위복, 서함에게는 각각 10만 전을 하사하고 그들의 아들 한 명을 낭으로 임명하였다.

 

安帝永初中,鮮卑大人燕荔陽詣闕朝賀,鄧太后賜燕荔陽王印綬,赤車參駕,令止烏桓校尉所居甯城下,通胡市,因築南北兩部質館。〔一〕鮮卑邑落百二十部,各遣入質。是後或降或畔,與匈奴、烏桓更相攻擊。

 

안제(安帝) 영초(永初) 중에, 선비족의 대인(大人)인 연이양(燕荔陽)이 조정에 와서 조회하였다. 등태후(鄧太后)는 연이양에게 왕의 인수(印綬)와 붉은 수레와 삼마차(三馬車)를 하사하고, 오환교위(烏桓校尉)가 거주하는 녕성(寧城) 아래에 머물도록 하며, 호시(胡市, 변방 시장)를 통하게 하였다. 그리고 남북 두 부에 질관(質館, 인질을 위한 숙소)을 세우도록 하였다. 선비족의 120부(部) 각 읍락(邑落)에서 인질을 보냈다. 그 후 어떤 이들은 항복하고, 어떤 이들은 배반하여 흉노, 오환과 서로 공격하였다.

 

元初二年秋,遼東鮮卑圍無慮縣,〔一〕州郡合兵固保清野,鮮卑無所得。〔二〕復攻扶黎營,殺長吏。〔三〕四年,遼西鮮卑連休等遂燒塞門,寇百姓。烏桓大人於秩居等與連休有宿怨,共郡兵奔擊,大破之,斬首千三百級,悉獲其生口牛馬財物。五年秋,代郡鮮卑萬餘騎遂穿塞入寇,分攻城邑,燒官寺,殺長吏而去。乃發緣邊甲卒、黎陽營兵,屯上谷以備之。冬,鮮卑入上谷,攻居庸關,復發緣邊諸郡、黎陽營兵、積射士步騎二萬人,屯列衝要。六年秋,鮮卑入馬城塞,殺長吏,〔四〕度遼將軍鄧遵發積射士三千人,及中郎將馬續率南單于,與遼西、右北平兵馬會,出塞追擊鮮卑,大破之,獲生口及牛羊財物甚眾。又發積射士三千人,馬三千匹,詣度遼營屯守。

  〔一〕 無慮縣屬遼東郡。

  〔二〕 清野謂收斂積聚,不令寇得之也。

  〔三〕 扶黎,縣,屬遼東屬國,故城在今營州東〔南〕。

  〔四〕 馬城,縣名,屬代郡也。

 

원초 2년(서기 115년) 가을, 요동의 선비족이 무려현(無慮縣)을 포위하였으나, 주군(州郡)에서 병력을 모아 청야책(清野策)으로 철저히 방어하였기 때문에 선비족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다. 이후 선비족은 다시 부려영(扶黎營)을 공격하여 장관을 죽였다. 원초 4년, 요서(遼西)의 선비족 련휴(連休) 등이 성문을 불태우고 백성들을 침략하였다. 오환(烏桓)의 대인(大人) 어질거(於秩居) 등은 련휴와 원한이 있어서 군 병력과 합세하여 공격하여, 크게 이기고 적의 수급 1300여 개를 베고, 포로와 소, 말, 재물을 모두 획득하였다.
(黎 검을 려, 검을 여-->1. 검다2. 많다3. 녘4. 가지런하다5. 나라 이름)

 

원초 5년 가을, 대군(代郡)의 선비족 만여 기병이 성을 뚫고 침입하여 성읍을 나누어 공격하고 관청을 불태우며 장관을 죽이고 떠났다. 이에 변방의 갑졸(甲卒)과 여양(黎陽)의 병력을 동원하여 상곡(上谷)에 주둔하여 대비하였다. 겨울에 선비족이 상곡에 침입하여 거용관(居庸關)을 공격하자 다시 변방의 여러 군과 여양의 병력 및 적사(積射士) 2만 명의 보병과 기병을 동원하여 요충지에 주둔시켰다.

원초 6년 가을, 선비족이 마성(馬城) 성을 뚫고 들어와 장관을 죽였다. 도료장군(度遼將軍) 등준(鄧遵)은 적사 3000명을 동원하고 중랑장(中郎將) 마속(馬續)은 남선우(南單于)와 요서(遼西), 우북평(右北平)의 병마와 합세하여, 변방을 나가 선비족을 추격하여 크게 이기고, 포로와 소, 양, 재물을 많이 획득하였다. 또한 적사 3000명과 말 3000필을 동원하여 도료영(度遼營)에서 수비를 맡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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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무려현(無慮縣)은 요동군(遼東郡)에 속한 현이다.
2. 청야(清野)란 적에게 식량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식량을 모아들여 없애는 것을 말한다.
3. 부려(扶黎)는 현으로, 요동 속국에 속했으며, 옛 성은 지금의 영주(營州) 동남쪽에 있다.
4. 마성(馬城)은 대군(代郡)에 속한 현 이름이다.

 

 永寧元年,遼西鮮卑大人烏倫、其至鞬率眾詣鄧遵降,奉貢獻。詔封烏倫為率眾王,其至鞬為率眾侯,賜綵繒各有差。

 

영녕(永寧) 원년, 요서(遼西)의 선비족 대인 오륜(烏倫)과 기지건(其至鞬)이 무리를 이끌고 등준(鄧遵)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쳤다. 황제는 오륜을 솔중왕(率眾王)으로, 기지건을 솔중후(率眾侯)로 봉하고, 각각 채색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建光元年秋,其至鞬復畔,寇居庸,雲中太守成嚴擊之,兵敗,功曹楊穆以身捍嚴,與俱戰歿。鮮卑於是圍烏桓校尉徐常於馬城。度遼將軍耿夔與幽州刺史龐參發廣陽、漁陽、涿郡甲卒,分為兩道救之;常夜得潛出,與夔等并力並進,攻賊圍,解之。鮮卑既累殺郡守,膽意轉盛,控弦數萬騎。延光元年冬,復寇鴈門、定襄,遂攻太原,掠殺百姓。二年冬,其至鞬自將萬餘騎入東領候,分為數道,攻南匈奴於曼柏,〔一〕薁鞬日逐王戰死,殺千餘人。三年秋,復寇高柳,擊破南匈奴,殺漸將王。

  〔一〕 縣名,屬五原郡也。


건광(建光) 원년 가을, 기지건이 다시 배반하여 거용(居庸)을 침략하였다. 운중(雲中) 태수 성엄(成嚴)이 이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공조(功曹) 양목(楊穆)이 몸으로 성엄을 지키며 함께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에 선비족은 마성(馬城)에서 오환교위(烏桓校尉) 서상(徐常)을 포위하였다. 도료장군(度遼將軍) 경기(耿夔)는 유주자사(幽州刺史) 방참(龐參)과 함께 광양(廣陽), 어양(漁陽), 탁군(涿郡)의 갑졸(甲卒)을 동원하여 두 갈래로 나누어 구원에 나섰다. 서상은 밤에 몰래 빠져나와 경기 등과 합세하여 적의 포위를 공격하여 풀어주었다. 선비족은 여러 번 군수를 죽이며 기세가 점점 등등해졌고, 수만 기병을 보유하게 되었다.

연광(延光) 원년 겨울, 다시 안문(鴈門)과 정양(定襄)을 침략하고, 태원(太原)을 공격하여 백성들을 약탈하고 살해하였다. 연광 2년 겨울, 기지건이 직접 만여 기병을 이끌고 동령후(東領候)에 들어가 여러 갈래로 나누어 남흉노(南匈奴)를 만백(曼柏)에서 공격하였다. 육건일축왕(薁鞬日逐王)이 전사하고 천여 명을 살해하였다. 연광 3년 가을, 다시 고류(高柳)를 침략하여 남흉노를 격파하고 잠장왕(漸將王)을 죽였다.

주석:
1. 만백(曼柏)은 오원군(五原郡)에 속한 현 이름이다.

 

順帝永建元年秋,鮮卑其至鞬寇代郡,太守李超戰死。明年春,中郎將張國遣從事將南單于兵步騎萬餘人出塞,擊破之,獲其資重二千餘種。時遼東鮮卑六千餘騎亦寇遼東玄菟,烏桓校尉耿曄發緣邊諸郡兵及烏桓率眾王出塞擊之,斬首數百級,大獲其生口牛馬什物,鮮卑乃率種眾三萬人詣遼東乞降。三年,四年,鮮卑頻寇漁陽、朔方。六年秋,耿曄遣司馬將胡兵數千人,出塞擊破之。冬,漁陽太守又遣烏桓兵擊之,斬首八百級,獲牛馬生口。烏桓豪人扶漱官勇健,〔一〕每與鮮卑戰,輒陷敵,詔賜號「率眾君」。

  〔一〕 漱音所救反。

 

순제(順帝) 영건(永建) 원년(126년) 가을, 선비족의 기지건(其至鞬)이 대군(代郡)을 침략하였고, 태수 이초(李超)가 전사하였다. 이듬해 봄, 중랑장(中郎將) 장국(張國)이 종사(從事)를 보내어 남흉노(南匈奴)의 병사 만여 명을 이끌고 변방 밖으로 나가 선비족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그들의 재물 2000여 종을 획득하였다. 이때 요동(遼東)의 선비족 6000여 기병이 요동현도(遼東玄菟)를 침략하였으나, 오환교위(烏桓校尉) 경엽(耿曄)이 변방의 여러 군 병사들과 오환의 솔중왕(率眾王)을 이끌고 변방 밖으로 나가 그들을 공격하여, 수백 명의 수급을 베고 많은 포로와 소, 말, 물품을 획득하였다. 이에 선비족은 부족 3만 명을 이끌고 요동에 와서 항복을 요청하였다.

영건 3년(128년)과 4년(129년), 선비족이 어양(漁陽)과 삭방(朔方)을 자주 침략하였다. 영건 6년(131년) 가을, 경엽은 사마(司馬)를 보내어 호병(胡兵) 수천 명을 이끌고 변방 밖으로 나가 선비족을 격파하였다. 겨울에는 어양 태수가 다시 오환 병사들을 보내어 선비족을 공격하여 800명의 수급을 베고, 소와 말, 포로를 획득하였다. 오환의 호인(豪人) 부수관(扶漱官)은 용맹하고 강건하여, 매번 선비족과 싸울 때마다 적진을 돌파하였다. 이에 조정은 그에게 "솔중군(率眾君)"이라는 칭호를 하사하였다.

주석:
1. "漱"의 음은 '수'로 읽는다.

(漱 양치질할 수-->1. 양치질하다2. 씻다3. 개먹다4. 물이 언덕에 부딪쳐 흐름5. 빨래하다)

('漱音所救反'에서 '反'은 '반절법'의 줄인 말로, 이는 어떤 글자를 읽을 때의 발음 방법을 나타냅니다. '漱'를 '수'로 읽기 위해, '所'의 자음인 'ㅅ'을 취하고, '救'의 모음과 종성인 'ㅜ'을 취합니다. 따라서 '漱'는 '수'로 발음됩니다.)

(解慕漱해모수-->북부여의 시조)

 

 

廆 버릇 외, 버릇 회, 산 이름 외, 산 이름 괴, 사람 이름 외, 담 회

 

陽嘉元年冬,耿曄遣烏桓親漢都尉戎朱廆率眾王侯咄歸等,出塞抄擊鮮卑,大斬獲而還,賜咄歸等已下為率眾王、侯、長,賜綵繒各有差。鮮卑後寇遼東屬國,於是耿曄乃移屯遼東無慮城拒之

양가(陽嘉) 원년(서기 132년) 겨울, 경엽(耿曄)은 오환 친한도위(親漢都尉) 융주휴(戎朱廆)를 보내어 여러 왕후(王侯)와 돌귀(咄歸) 등을 이끌고 변방 밖으로 나가 선비족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 돌귀 등은 솔중왕(率眾王), 후(侯), 장(長)으로 봉해졌으며, 각각 채색 비단을 하사받았다. 이후 선비족이 요동 속국(遼東屬國)을 침략하자, 경엽은 요동의 무려성(無慮城)으로 주둔지를 옮겨 이를 막았다.

 

二年春,匈奴中郎將趙稠遣從事將南匈奴骨都侯夫沈等,出塞擊鮮卑,破之,斬獲甚眾,詔賜夫沈金印紫綬及縑綵各有差。秋,鮮卑穿塞入馬城,代郡太守擊之,不能克。後其至鞬死,鮮卑抄盜差稀。   

양가 2년(서기 133년) 봄, 흉노 중랑장(匈奴中郎將) 조주(趙稠)는 종사를 보내 남흉노 골도후(骨都侯) 부심(夫沈) 등을 이끌고 변방 밖으로 나가 선비족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이에 황제는 부심에게 금인(金印)과 자수(紫綬), 그리고 견채(縑綵)를 하사하였다. 가을에는 선비족이 변방을 뚫고 마성(馬城)으로 들어왔고, 대군 태수(代郡太守)가 이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기지건(其至鞬)이 사망하자, 선비족의 침략이 다소 줄어들었다.

 

桓帝時,鮮卑檀石槐者,其父投鹿侯、初從匈奴軍三年,其妻在家生子。投鹿侯歸,怪欲殺之。妻言嘗晝行聞雷震,仰天視而雹入其口,因吞之,遂妊身,十月而產,此子必有奇異,且宜長視。投鹿侯不聽,遂棄之。妻私語家令收養焉,名檀石槐。年十四五,勇健有智略。異部大人抄取其外家牛羊,檀石槐單騎追擊之,所向無前,悉還得所亡者,由是部落畏服。乃施法禁,平曲直,無敢犯者,遂推以為大人。檀石槐乃立庭於彈汗山歠仇水上,〔一〕去高柳北三百餘里,兵馬甚盛,東西部大人皆歸焉。因南抄緣邊,北拒丁零,東卻夫餘,西擊烏孫,盡據匈奴故地,東西萬四千餘里,南北七千餘里,網羅山川水澤鹽池。   〔一〕 歠音昌悅反。



환제(桓帝) 때, 선비족의 단석괴(檀石槐)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 투록후(投鹿侯)는 처음에 흉노 군대에서 3년 동안 복무하였고, 그의 아내는 집에 있으면서 아들을 낳았다. 투록후가 돌아와 이상하게 여겨 아들을 죽이려 하자, 아내는 낮에 천둥소리를 들었고 하늘을 보니 우박이 입에 들어와 삼켰더니 임신하게 되어 10개월 만에 아들을 낳았다고 말하며, 이 아이는 반드시 기이한 인물이니 길러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투록후는 이를 듣지 않고 아이를 버렸다. 아내는 몰래 집안의 하인에게 아이를 거두어 기르게 하였고, 이름을 단석괴라 지었다. 단석괴는 14-15세가 되자 용맹하고 지략이 있었다. 다른 부족의 대인이 외가의 소와 양을 약탈해 가자, 단석괴는 혼자 말을 타고 추격하여 모두 되찾아 왔다. 이로 인해 부족이 그를 두려워하고 복종하게 되었다. 그는 법을 시행하고, 시비를 가려 아무도 감히 그를 어기지 못하게 하여, 결국 대인으로 추대되었다.

단석괴는 탄한산(彈汗山) 설구수(歠仇水) 위에 거처를 정하였다. 이곳은 고류(高柳) 북쪽 300여 리 떨어진 곳으로, 병마가 매우 많았다. 동서부의 대인들이 모두 그에게 귀속되었다. 그는 남쪽으로는 변방을 침략하고, 북쪽으로는 정령(丁零)을 막았으며, 동쪽으로는 부여(夫餘)를 물리치고, 서쪽으로는 오손(烏孫)을 공격하였다. 흉노의 옛 땅을 모두 점령하여 동서로 14,000여 리, 남북으로 7,000여 리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였고, 산천과 수역, 염지를 모두 차지하였다.

주석:
1. '歠'의 발음은 '창열반(昌悅反)'입니다.

 

 

  • 永壽二年秋,檀石槐遂將三四千騎寇雲中。延熹元年,鮮卑寇北邊。冬,使匈奴中郎將張奐率南單于出塞擊之,斬首二百級。二年,復入鴈門,殺數百人,大抄掠而去。六年夏,千餘騎寇遼東屬國。九年夏,遂分騎數萬人入緣邊九郡,並殺掠吏人,於是復遣張奐擊之,鮮卑乃出塞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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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수(永壽) 2년(서기 156년) 가을, 단석괴(檀石槐)는 3~4천 기병을 이끌고 운중(雲中)을 침략하였다. 연희(延熹) 원년(서기 158년), 선비족이 북쪽 변방을 침략하였다. 겨울에 흉노 중랑장(匈奴中郎將) 장환(張奐)을 보내 남흉노(南匈奴)와 함께 변방 밖으로 나가 선비족을 공격하여, 200명의 수급을 베었다. 연희 2년(서기 159년), 다시 안문(鴈門)에 침입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크게 약탈하고 떠났다. 연희 6년(서기 163년) 여름, 천여 기병이 요동 속국(遼東屬國)을 침략하였다. 연희 9년(서기 166년) 여름, 수만 기병으로 나누어 변방의 아홉 군을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살해하고 약탈하였다. 이에 다시 장환을 보내어 그들을 공격하게 하니, 선비족은 변방 밖으로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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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朝廷積患之,而不能制,遂遣使持印綬封檀石槐為王,欲與和親。檀石槐不肯受,而寇抄滋甚。
  • 乃自分其地為三部,從右北平以東至遼東,接夫餘、濊貊二十餘邑為東部,從右北平以西至上谷十餘邑為中部,從上谷以西至敦煌、烏孫二十餘邑為西部,各置大人主領之,皆屬檀石槐。


조정은 이 문제를 오랫동안 겪었으나 제어하지 못하여, 사신을 보내어 인수(印綬)를 가지고 단석괴를 왕으로 봉하여 화친을 맺고자 하였다. 그러나 단석괴는 이를 받지 않았고, 침략은 더욱 심해졌다. 

단석괴는 스스로 그 지역을 세 부로 나누었다. 우북평(右北平)에서 동쪽으로 요동(遼東)까지 부여(夫餘)와 예맥(濊貊)의 20여 읍을 동부로 삼고, 우북평에서 서쪽으로 상곡(上谷)까지의 10여 읍을 중부로 삼으며, 상곡에서 서쪽으로 돈황(敦煌)과 오손(烏孫)의 20여 읍을 서부로 삼았다. 각 부에는 대인(大人)을 두어 주관하게 하고, 모두 단석괴에게 속하게 하였다.

(從 좇을 종, 시중들 종, 높고클 총)

 

靈帝立,幽、并、涼三州緣邊諸郡無歲不被鮮卑寇抄,殺略不可勝數。熹平三年冬,鮮卑入北地,太守夏育率休著屠各追擊破之。遷育為護烏桓校尉。

 

五年,鮮卑寇幽州。六年夏,鮮卑寇三邊。秋,夏育上言:「鮮卑寇邊,自春以來,三十餘發,請徵幽州諸郡兵出塞擊之,一冬二春,必能禽滅。」朝廷未許。先是護羌校尉田晏坐事論刑被原,欲立功自效,乃請中常侍王甫求得為將,甫因此議遣兵與育并力討賊。帝乃拜晏為破鮮卑中郎將。大臣多有不同,乃召百官議朝堂。議郎蔡邕議曰:

 

 

  書戒猾夏,易伐鬼方,〔一〕周有獫狁、蠻荊之師,〔二〕漢有闐顏、瀚海之事。〔三〕征討殊類,所由尚矣。然而時有同異,埶有可否,故謀有得失,事有成敗,不可齊也。

  〔一〕 尚書舜典曰:「蠻夷猾夏,寇賊姦宄。」猾,亂也。既濟九三爻辭曰:「高宗伐鬼方,三年而克之。」前書淮南王安曰:「鬼方,小蠻夷也。」音義曰:「鬼方,遠方也。」

  〔二〕 詩小雅曰:「顯允方叔,征伐獫狁,蠻荊來威。」

  〔三〕 武帝使大將軍衛青擊匈奴,至闐顏山,斬首萬餘級。使霍去病擊匈奴,封狼居胥山,登臨瀚海也。

 

영제(靈帝)가 즉위한 후, 유주(幽州), 병주(并州), 양주(凉州)의 변방 여러 군은 해마다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살육과 약탈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희평(熹平) 3년(서기 174년) 겨울, 선비족이 북지(北地)를 침입하자 태수 하육(夏育)이 휴저도각(休著屠各)을 이끌고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하육은 오환교위(烏桓校尉)로 승진하였다. 

 

희평 5년(서기 176년), 선비족이 유주를 침략하였다. 희평 6년(서기 177년) 여름, 선비족이 삼변(三邊)을 침략하였다. 가을에 하육이 상주하여 말하였다. "선비족이 변방을 침략한 것이 봄 이래로 서른 번이 넘으니, 유주 여러 군의 병사를 징집하여 변방 밖으로 나가 그들을 공격하게 해주십시오. 한 겨울과 두 봄을 거치면 반드시 그들을 사로잡고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전에 호강교위(護羌校尉) 전안(田晏)은 사건에 연루되어 형벌을 논하였으나 사면되어 공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는 중상시(中常侍) 왕보(王甫)에게 청탁하여 장군이 되기를 원하였고, 왕보는 이를 계기로 병력을 보내어 하육과 힘을 합쳐 적을 토벌할 것을 건의하였다. 황제는 이에 전안을 파선비중랑장(破鮮卑中郎將)으로 임명하였다. 대신들 중 다수가 이에 반대하여, 백관들을 소집하여 조정에서 논의하였다. 의랑(議郎) 채옹(蔡邕)이 다음과 같이 의견을 제시하였다.

"서경(書經)에서는 화하(華夏)를 어지럽히는 것을 경계하고, 주역(周易)에서는 귀방(鬼方)을 토벌한 것을 말합니다. 주(周)나라는 선윤(獫狁)과 만경(蠻荊)을 정벌하였고, 한나라는 천안(闐顏)과 한해(瀚海)에서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이들을 정벌한 사례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 상황이 다르고, 형세에 따라 가능 여부가 다르기 때문에, 모략의 성패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주석:
1. 서경 순전(舜典)에 "만이(蠻夷)가 화하를 어지럽히고, 도적과 반역이 일어난다"고 경고한다. "교활한"은 혼란을 뜻한다. 주역 기제(既濟)의 구삼효사(九三爻辭)에 "고종(高宗)이 귀방을 토벌하여, 3년에 이를 정복했다"고 한다. 전서(前書)에서는 "귀방은 작은 만이(蠻夷)이다"라고 하며, 음의(音義)에서는 "귀방은 먼 곳이다"라고 한다.
2. 시경 소아(詩小雅)에 "훌륭한 방숙(方叔)이 선윤(獫狁)을 정벌하니, 만경(蠻荊)이 위세를 떨쳤다"고 한다.
3. 한 무제가 대장군 위청(衛青)을 보내어 흉노를 공격하게 하여 천안산(闐顏山)에 이르러, 만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 곽거병(霍去病)을 보내어 흉노를 공격하여 낭거서산(狼居胥山)에 올라 한해(瀚海)를 바라보게 하였다.

 

 

武帝情存遠略,志闢四方,南誅百越,北討強胡,西伐大宛,東并朝鮮。因文、景之蓄,藉天下之饒,數十年閒,官民俱匱。乃興鹽鐵酒榷之利,設告緡重稅之令,〔一〕民不堪命,起為盜賊,關東紛擾,道路不通。〔二〕繡衣直指之使,奮鈇鉞而並出。〔三〕既而覺悟,乃息兵罷役,〔封〕丞相為富人侯。〔四〕故主父偃曰:「夫務戰勝,窮武事,未有不悔者也。」〔五〕夫以世宗神武,將相良猛,財賦充實,所拓廣遠,猶有悔焉。況今人財並乏,事劣昔時乎!

  〔一〕 武帝使東郭咸陽等領天下鹽鐵,敢私鑄錢賣鹽者釱左趾。榷,專也。官自賣酒,人不得賣也。又筭緡錢,率緡錢二千而筭一,令各以其物自占。占不悉,聽人告緡,以半與之。音義曰:「緡,絲也。用以貫錢,故曰緡錢。一筭百二十也。」

  〔二〕 武帝天漢二年,泰山、琅邪群賊徐勃等阻山攻城,道路不通。

  〔三〕 武帝使直指使者暴勝之等衣繡仗斧,分部逐捕也。

  〔四〕 封丞相車千秋為富人侯,以明休息,思富養人。

  〔五〕 武帝時,齊相主父偃諫伐匈奴之辭。

 

한 무제(武帝)는 먼 곳까지 정복하려는 뜻을 품고, 사방을 개척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백월(百越)을 정벌하고, 북쪽으로는 강한 흉노(匈奴)를 토벌하며, 서쪽으로는 대완(大宛)을 정벌하고, 동쪽으로는 조선(朝鮮)을 병합하였다. 이는 문경(文景) 시대의 축적된 자원과 천하의 풍요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으나, 수십 년 동안 관민(官民) 모두가 곤궁해졌다. 이에 소금과 철, 술의 전매 이익을 일으키고, 고발 및 과중한 세금 부과의 명령을 내렸다. 백성들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도적이 되어, 관동(關東)이 혼란에 빠지고 길이 끊겼다. 

이에 자수복을 입은 관리들이 도끼와 도검을 들고 나섰다. 그러나 무제는 이를 깨닫고 병력을 쉬게 하고, 전쟁을 멈추고, 승상을 부인후(富人侯)로 봉하였다. 주부언(主父偃)이 말하기를, "전쟁 승리에만 치중하고 무력을 다하는 것은 반드시 후회하게 마련입니다."라 하였다. 

세종(世宗) 무제는 신무(神武)하고 장수와 재상이 모두 훌륭하고 용맹했으며, 재정과 세금이 충실하여 개척한 땅이 광대하였으나, 후회가 있었다. 하물며 지금은 인재와 재정이 모두 부족하고, 일의 질도 예전만 못하니 어찌 더 말할 수 있겠는가!

주석:
1. 무제는 동곽함양(東郭咸陽) 등을 시켜 천하의 소금과 철을 관리하게 하였고, 사적으로 돈을 주조하거나 소금을 파는 자는 왼발을 잘라내게 하였다. 전매(榷)는 독점의 뜻이다. 관에서 직접 술을 팔고, 사람들은 팔지 못하게 하였다. 또 민전을 계산하여 2000 민전에 1산을 부과하고, 각자 그 물품을 점검하게 하였다. 점검이 철저하지 않으면 고발을 허용하여 그 절반을 고발자에게 주었다. 음의(音義)에서는 "민(緡)은 실로, 돈을 꿰는데 사용되므로 민전(緡錢)이라 한다. 1산은 120이다."라고 한다.


2. 무제 천한(天漢) 2년, 태산(泰山)과 낭야(琅邪)의 여러 도적이 산을 의지하여 성을 공격하니, 길이 끊겼다.
3. 무제는 직지사(直指使) 사자를 보내어 복승지(暴勝之) 등에게 자수복을 입히고 도끼를 잡게 하여,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 도적을 쫓게 하였다.
4. 승상 차천추(車千秋)를 부인후(富人侯)로 봉하여, 휴식을 취하고 백성을 부양하는 뜻을 밝혔다.
5. 무제 시기, 제상(齊相) 주부언(主父偃)이 흉노 정벌을 간언한 말이다.

 

 自匈奴遁逃,鮮卑強盛,據其故地,稱兵十萬,才力勁健,意智益生。加以關塞不嚴,禁網多漏,精金良鐵,皆為賊有;漢人逋逃,為之謀主,兵利馬疾,過於匈奴。昔段熲良將,習兵善戰,有事西羌,猶十餘年。今育、晏才策,未必過熲,鮮卑種眾,不弱于曩時。而虛計二載,自許有成,若禍結兵連,豈得中休?當復徵發眾人,轉運無已,是為耗竭諸夏,并力蠻夷。夫邊垂之患,手足之蚧搔;中國之困,胸背之瘭疽。〔一〕方今郡縣盜賊尚不能禁,況此醜虜而可伏乎!

  〔一〕 蚧音介。搔音新到反。埤蒼曰:「瘭音必燒反。」杜預注左傳曰:「疽,惡創也。」

  昔高祖忍平城之恥,呂后棄慢書之詬,〔一〕方之於今,何者為甚?

  〔一〕 詬,恥也,音許豆反。

 

흉노가 도망가고 나서, 선비족이 강성해져 그들의 옛 땅을 차지하고 병력을 10만 명으로 늘렸으며, 재능과 힘이 강건하고 지혜와 지략이 더욱 생겼다. 게다가 변방의 방비가 허술하고 금지망이 많이 뚫려서, 정제된 금과 좋은 철이 모두 도적의 것이 되었다. 한나라 사람들 중 도망쳐온 자들이 그들의 책략을 주도하고 있어, 병기는 날카롭고 말은 빠르며, 흉노보다 뛰어났다. 예전에 단경(段熲)은 훌륭한 장수로서 군사를 익히고 전투를 잘하였으며, 서강(西羌)과의 전쟁에서도 10여 년이나 걸렸다. 지금 하육(夏育)과 전안(田晏)의 재능과 계책이 단경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고, 선비족의 인구와 병력도 옛날에 비해 약하지 않은데, 두 해 동안의 허황된 계획으로 스스로 성공을 기대하고 있으니, 만약 재앙이 병력으로 연결된다면 중간에 멈출 수 있겠는가? 결국 다시 많은 사람을 징발하고, 물자를 운송하게 될 것이니, 이는 제하(諸夏)의 힘을 소모시키고 만이(蠻夷)와 힘을 합치는 꼴이 될 것이다. 변방의 근심은 손발의 부스럼을 긁는 것과 같고, 중원의 곤란은 가슴과 등에 생긴 종기와 같다.

지금 군현의 도적들도 아직 막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 흉악한 오랑캐를 어떻게 굴복시킬 수 있겠는가?

옛날 고조(高祖)는 평성(平城)에서의 치욕을 참았고, 여후(呂后)는 만서(慢書)의 치욕을 버렸다. 이를 지금과 비교해보면, 무엇이 더 심각한가?

주석:
1. '蚧'의 음은 '개(介)'이고, '搔'의 음은 '신도반(新到反)'이다. 《비창(埤蒼)》에 "瘭(표)의 음은 '필소반(必燒反)'"이라 한다. 두예(杜預)의 《좌전(左傳)》 주석에 "疽(저)는 악창(惡創)"이라고 한다.
2. '詬'는 치욕을 뜻하며, 음은 '허두반(許豆反)'이다.(詬 꾸짖을 후, 꾸짖을 구,수치심 후
1. 꾸짖다2. 욕보이다3. 부끄러움4. 욕을 하며 책망함5. 망신시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