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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讀史方輿紀要-卷三十九 山西一 封域 山川險要

 

 

陘 지레목 , 지레목 경-->1. 지레목 2. 산줄기가 끊어진 곳 3. 비탈 4. 부뚜막의 대(臺) 5. 땅 이름

서형산(西陘山) 〈형(陘)은 '형(硎)'으로 읽음.

 

讀史方輿紀要/卷三十九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wikisource.org)

山西一[编辑]

古曰冀州。舜分置十二州,此爲并州。〈應劭曰:「地在兩谷之間,故曰并州。」亦曰衛水、常水之間也。今衛水、常水,俱見北直真定府。〉《禹貢》仍曰冀州。〈其地險易,帝王所都,亂則冀安,弱則冀強,荒則冀豐,故曰冀州。〉

《周禮•職方》:「正北曰并州。」成王封叔虞於唐,此爲晉地。戰國時爲趙地,亦兼韓、魏之疆。

 

산서성 [편집]
옛날에는 기주(冀州)라고 불렸다. 순(舜)이 열두 주로 나누었는데, 이것이 병주(并州)이다. 응소(應劭)는 "이 땅이 두 골짜기 사이에 있어서 병주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위수(衛水)와 상수(常水) 사이에 있다고도 한다. 현재의 위수와 상수는 모두 북직(北直) 진정부(真定府)에서 볼 수 있다. 《우공(禹貢)》에서도 여전히 기주라고 불렸다. "그 땅의 험준함과 평탄함 때문에 제왕이 도읍을 정하였고, 난리 때에는 기주에서 안전을 도모하고, 약할 때는 기주에서 강함을 도모하고, 황폐할 때는 기주에서 풍요를 도모하였기 때문에 기주라고 불렸다."

《주례(周禮)•직방(職方)》에서는 "정북을 병주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성왕(成王)은 숙우(叔虞)를 당(唐)에 봉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진(晉) 땅이다. 전국 시대에는 조(趙)의 땅이었고, 또한 한(韓)과 위(魏)의 경계를 겸하였다.

 

〈今平陽府故魏地。潞安府遼、澤二州故韓地,後皆入於秦。〉其在天文,昴、畢則趙分野。〈韓、魏分野,見河南沿革。〉秦并天下,置太原、河東、上黨、代、鴈門、雲中等郡。漢武置十三州,此亦爲并州。〈其河東郡則屬於司隸。〉後漢以并州治晉陽,靈帝時羌、胡大擾,定襄、雲中等郡並流徙分散,獻帝時省入冀州。魏黃初中復置并州,自陘嶺以北並棄之。晉亦置并州,惠帝時爲劉淵所殘破。

 

〈지금의 평양부(平陽府)는 옛 위(魏) 나라의 땅이다. 로안부(潞安府)의 요주(遼州)와 택주(澤州)는 옛 한(韓) 나라의 땅이었으나, 후에 모두 진(秦)에 합병되었다.〉 그 지역의 천문으로 보면, 묘수(昴宿)와 필수(畢宿)는 조(趙)의 구역에 해당한다. 〈한(韓)과 위(魏)의 구역에 대해서는 하남(河南)의 연혁을 참고하라.〉 

 

진(秦)이 천하를 통일한 후, 태원(太原), 하동(河東), 상당(上黨), 대(代), 안문(鴈門), 운중(雲中) 등의 군을 설치하였다. 한무제(漢武帝)가 열세 주를 설치했을 때, 이것 또한 병주에 속하였다. 〈그 하동군(河東郡)은 사예(司隸)에 속하였다.〉 후한(後漢) 때 병주의 치소(治所)는 진양(晉陽)에 있었다. 

 

영제(靈帝) 시기에는 강(羌)과 호(胡)의 큰 소란이 있었고, 정양(定襄)과 운중(雲中) 등의 군이 흩어지고 분산되었다. 헌제(獻帝) 때는 기주(冀州)에 속하게 되었다. 위(魏) 황초(黃初) 중기에 다시 병주를 설치했으나, 형령(陘嶺) 이북 지역은 모두 버려졌다. 진(晉) 또한 병주를 설치했으나, 혜제(惠帝) 시기에는 유연(劉淵)에 의해 파괴되었다.

 

其後劉曜徙都長安,平陽以東陷沒於石勒。及苻堅、姚興、赫連勃勃之際,並於河東置并州。姚興時又嘗分河東置并、冀二州。及後魏以後,分析益多,不可得而詳也。隋亦置十三部,而不詳所統。唐貞觀初置河東道,開元中因之,〈移治蒲州。〉天寶初又置河東節度使於并州。

 

그 후 유요(劉曜)가 도읍을 장안(長安)으로 옮기고 평양(平陽) 동쪽 지역은 석륵(石勒)에게 함락되었다. 부견(苻堅), 요흥(姚興), 혁련발발(赫連勃勃) 시대에는 모두 하동(河東)에 병주(并州)를 설치하였다. 

 

요흥 시기에는 하동을 나누어 병주와 기주(冀州) 두 주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후위(後魏) 이후로는 분할이 점점 더 많아져서 자세히 알 수 없다. 수(隋)나라에서도 열세 부를 설치했으나, 그 관할 지역은 자세하지 않다

 

당(唐)나라 정관(貞觀) 초기에 하동도(河東道)를 설치하고, 개원(開元) 중에도 이를 따랐으며, 〈치소를 포주(蒲州)로 옮겼다.〉 천보(天寶) 초기에 다시 병주에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를 설치하였다.

 

及五代時,李克用、石敬瑭、劉知遠代有其地,並建大號。周廣順初,劉崇據其地,宋太平興國四年始克平之,仍置河東路,而鴈門以北則屬於契丹,爲西京路。金人分置河東北路、河東南路及西京路。〈北路治太原,南路治平陽,西京路治大同。

 

오대(五代) 시기에는 이극용(李克用), 석경당(石敬瑭), 유지원(劉知遠)이 차례로 그 땅을 차지하고 모두 큰 나라를 세웠다. 주(周) 광순(廣順) 초기에 유숭(劉崇)이 그 땅을 점거하였고, 송(宋) 태평흥국(太平興國) 4년에 비로소 평정하여 다시 하동로(河東路)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안문(鴈門) 이북 지역은 거란(契丹)에 속하여 서경로(西京路)가 되었다. 금(金)나라 때는 하동북로(河東北路), 하동남로(河東南路), 그리고 서경로를 나누어 설치하였다. 

북로는 태원(太原), 남로는 평양(平陽), 서경로는 대동(大同)에 치소를 두었다.〉 

 

元亦分爲冀寧、晉寧、大同等路,直隸中書省。〈謂之「腹裏」。〉明洪武元年置山西行中書省於太原,九年改爲山西等處承宣布政使司。今領府五、直隸州三、屬州十六、縣七十九,〈總爲里四千四百四十有奇,夏秋二稅約二百三十一萬四千八百石有奇。〉而衛所參列其中。今仍爲山西布政使。

 

원(元)나라 또한 기녕로(冀寧路), 진녕로(晉寧路), 대동로(大同路) 등으로 나누어 중서성(中書省)에 직속시켰다

〈이를 "복리(腹裏)"라고 불렀다.〉 명(明)나라 홍무(洪武) 원년에 산서행중서성(山西行中書省)을 태원에 설치하였고, 

9년째 되던 해에 산서등처승선포정사사(山西等處承宣布政使司)로 개편하였다. 현재 5부, 3개의 직속주, 16개의 속주, 79개의 현을 관할하고 있다. 〈총 4,440여 리이며, 하계와 추계 두 번의 세금은 약 231만 4,800석이다.〉 위소(衛所)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지금도 여전히 산서포정사(山西布政使)로 있다.

 

太原府,〈屬州五,縣二十。〉陽曲縣,〈附郭。〉太原縣,榆次縣,太谷縣,祁縣,徐溝縣,清源縣,交城縣,文水縣,壽陽縣,盂縣,靜樂縣,河曲縣。

태원부는 주가 5개고 현이 20개다.
양곡현(陽曲縣) 〈부속 지역〉
태원현(太原縣),유차현(榆次縣),태곡현(太谷縣),
기현(祁縣),서구현(徐溝縣),청원현(清源縣),
교성현(交城縣),문수현(文水縣),수양현(壽陽縣),
우현(盂縣),정락현(靜樂縣),하곡현(河曲縣)

 

 

平定州〈屬縣一。〉樂平縣。

忻州〈屬縣一。〉定襄縣。

代州,〈屬縣三。〉五臺縣,繁峙縣,崞縣。

岢嵐州,〈屬縣二。〉嵐縣,興縣。

保德州。

평정주(平定州) 〈속현 1개〉- 악평현(樂平縣)
흔주(忻州) 〈속현 1개〉- 정양현(定襄縣)
대주(代州) 〈속현 3개〉- 오대현(五臺縣)- 번시현(繁峙縣)- 곽현(崞縣)
가람주(岢嵐州) 〈속현 2개〉- 남현(嵐縣)- 흥현(興縣)
(주:嵐 남기 람-->1. 남기(嵐氣)2. 산바람3. 폭풍우4. 산 속에 생기는 깨끗하고 수려한 기운)
보덕주(保德州)

 

 

平陽府,〈屬州六,縣二十八。〉臨汾縣,〈附郭。〉襄陵縣,洪洞縣,浮山縣,趙城縣,太平縣,岳陽縣,曲沃縣,翼城縣,汾西縣,蒲縣。

평양부는 주가 6개고 현이 28개다.평양부(平陽府) 〈속주 6개, 현 28개〉

임분현(臨汾縣) 〈부속 지역〉
양릉현(襄陵縣)
홍동현(洪洞縣)
부산현(浮山縣)
조성현(趙城縣)
태평현(太平縣)
악양현(岳陽縣)
곡악현(曲沃縣)
익성현(翼城縣)
분서현(汾西縣)
포현(蒲縣)

 

 

蒲州,〈屬縣五。〉臨晉縣,榮河縣,猗氏縣,萬泉縣,河津縣。

解州,〈屬縣五。〉安邑縣,夏縣,聞喜縣,平陸縣,芮城縣。

絳州,〈屬縣三。〉稷山縣,絳縣,垣曲縣。

霍州,〈屬縣一。〉靈石縣。

吉州,〈屬縣一。〉鄉寧縣。

隰州,〈屬縣二。〉大甯縣,永和縣。

포주(蒲州) 〈속현 5개〉
- 임진현(臨晉縣)
- 영화현(榮河縣)
- 의씨현(猗氏縣)
- 만천현(萬泉縣)
- 하진현(河津縣)

해주(解州) 〈속현 5개〉
- 안읍현(安邑縣)
- 하현(夏縣)
- 문희현(聞喜縣)
- 평륙현(平陸縣)
- 예성현(芮城縣)

강주(絳州) 〈속현 3개〉
- 직산현(稷山縣)
- 강현(絳縣)
- 원곡현(垣曲縣)

혹주(霍州) 〈속현 1개〉- 영석현(靈石縣)
길주(吉州) 〈속현 1개〉- 향녕현(鄉寧縣)
습주(隰州) 〈속현 2개〉- 대녕현(大甯縣)- 영화현(永和縣)

 

汾州府,〈屬州一,縣七。〉汾陽縣,〈附郭。〉孝義縣,平遙縣,介休縣,石樓縣,臨縣。

永寧州,〈屬縣一。〉寧鄉縣。

분주부(汾州府) 〈속주 1개, 현 7개〉

- 분양현(汾陽縣) 〈부속 지역〉
- 효의현(孝義縣)
- 평요현(平遙縣)
- 개휴현(介休縣)
- 석루현(石樓縣)
- 임현(臨縣)
영녕주(永寧州) 〈속현 1개〉
- 영향현(寧鄉縣)

 

潞安府,〈屬縣八。〉長治縣,〈附郭。〉長子縣,屯留縣,襄垣縣,潞城縣,壺關縣,黎城縣,平順縣。

〈直隸〉澤州屬縣四高平縣,陽城縣,陵川縣,沁水縣

〈直隸〉沁州,〈屬縣二。〉沁源縣,武鄉縣。

直隸〉遼州,〈屬縣二。〉榆社縣,和順縣.

로안부(潞安府) 〈속현 8개〉
- 장치현(長治縣) 〈부속 지역〉
- 장자현(長子縣)
- 둔류현(屯留縣)
- 양원현(襄垣縣)
- 로성현(潞城縣)
- 호관현(壺關縣)
- 려성현(黎城縣)
- 평순현(平順縣)

〈직할〉택주(澤州) 속현 4개
- 고평현(高平縣)
- 양성현(陽城縣)
- 능천현(陵川縣)
- 심수현(沁水縣)

〈직할〉심주(沁州) 〈속현 2개〉
- 심원현(沁源縣)
- 무향현(武鄉縣)

〈직할〉요주(遼州) 〈속현 2개〉
- 유사현(榆社縣)
- 화순현(和順縣)

 

大同府,〈屬州四,縣七。〉大同縣,〈附郭。〉懷仁縣。

渾源州。

應州,〈屬縣一。〉山陰縣。

朔州,〈屬縣一。〉馬邑縣。

蔚州,〈屬縣三。〉廣靈縣,廣昌縣,靈丘縣。〈行都司各衛所及屬夷俱附見。〉

대동부(大同府) 〈속주 4개, 현 7개〉
- 대동현(大同縣) 〈부속 지역〉
- 회인현(懷仁縣)

혼원주(渾源州)

응주(應州) 〈속현 1개〉
- 산음현(山陰縣)

삭주(朔州) 〈속현 1개〉
- 마읍현(馬邑縣)

울주(蔚州) 〈속현 3개〉
- 광령현(廣靈縣)
- 광창현(廣昌縣)
- 영구현(靈丘縣)
〈행도사(行都司) 각 위소(衛所) 및 속이(屬夷)는 모두 부록에 실림.〉

 

 

東據太行,太行爲天下之脊,中分河東、河北之境,今自澤、潞以北達於大同之東境,皆太行也。

동쪽으로는 태행산을 접하고, 태행산은 천하의 등뼈로, 하동과 하북의 경계를 나눈다. 지금의 택주(澤州)와 로주(潞州) 이북에서 대동(大同)의 동쪽 경계에 이르는 모두가 태행산이다. 

 

南通懷、孟,自懷、孟而南,西指洛陽,東指汴梁。懷、孟者,中原之要膂也。

남쪽으로는 회주(懷州)와 맹주(孟州)에 통하며, 회주와 맹주에서 남쪽으로는 서쪽으로는 낙양(洛陽)으로, 동쪽으로는 변량(汴梁)으로 이어진다. 회주와 맹주는 중원의 요충지이다.

 

西薄於河,黃河自塞外東北流,至廢東勝州西北折而南,凡千七百里至蒲州河津縣之龍門山,

又南歷雷首山折而東,河之南即華陰也,

又東至垣曲縣之王屋山南而入河南懷慶府境。

北邊沙漠。自大同以北去沙漠七百餘里,分列戍守,爲防維要地。

 

서쪽으로는 황하(黃河)에 닿아 있다. 황하는 새외(塞外)에서 동북쪽으로 흘러와 폐동승주(廢東勝州) 북서쪽에서 남쪽으로 꺾여, 약 1,700리 정도를 흘러 포주(蒲州) 하진현(河津縣)의 용문산(龍門山)에 이르고,

다시 남쪽으로 뇌수산(雷首山)을 지나 동쪽으로 꺾여 흘러가니, 하(河)의 남쪽이 바로 화음(華陰)이다.

또 동쪽으로 원곡현(垣曲縣)의 왕옥산(王屋山) 남쪽에 이르러 하남(河南) 회경부(懷慶府)의 경계로 들어간다.

북쪽 변방에는 사막이 있다. 대동(大同) 이북으로 사막까지는 약 700여 리로, 곳곳에 수비대를 배치하여 방어의 중요한 요지로 삼고 있다.

 

其名山則有雷首,雷首山,一名中條山,在平陽府蒲州東南十五里,首起蒲州,尾接太行,南跨芮城、平陸,北連解州安邑及臨晉、夏縣、聞喜之境,《禹貢》:「壺口、雷首」,即是山也。《左傳》:「趙宣子田於首山。」《史記》:「衛鞅謂秦孝公:『魏居嶺阨之西,都安邑,與秦界河,而獨擅山東之利。』」

 

그 명산으로는 뇌수산(雷首山)이 있다. 뇌수산은 중조산(中條山)이라고도 하며, 평양부(平陽府) 포주(蒲州) 동남쪽 15리에 위치해 있다. 산의 머리는 포주에서 시작하여, 꼬리는 태행산에 이어지며, 남쪽으로는 예성(芮城)과 평륙(平陸)을 가로지르고, 북쪽으로는 해주(解州) 안읍(安邑) 및 임진(臨晉), 하현(夏縣), 문희(聞喜)의 경계에 연결된다. 《우공(禹貢)》에서 말한 "호구(壺口)와 뇌수(雷首)"가 바로 이 산이다. 《좌전(左傳)》에서는 "조선자(趙宣子)가 수산(首山)에서 사냥을 했다."라고 하였고, 《사기(史記)》에서는 "위(衛) 상(鞅)이 진 효공(秦孝公)에게 '위(魏)는 능애(嶺阨)의 서쪽에 자리잡고 안읍(安邑)에 도읍하여 진(秦)과 황하를 경계로 하고 있으며, 홀로 뇌수산 동쪽의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주:擅 멋대로 할 천-->1. 멋대로 하다2. 차지하다3. 물려 주다4. 마음대로 함

 

司馬貞曰:「大河徑中條之西,自中條以東,連汾、晉之險嶝,謂之嶺阨。」漢武帝置首山宮於此,元封六年詔曰:「朕禮首山,毗田出珍玉,或化爲黃金。」〈應劭曰:「昆田,首山下田。」〉《封禪書》:「自華以西,名山七。一曰薄山,蓋襄山也。」〈亦中條之異名。《穆天子傳》「東巡自河首襄山」。〉即此。

사마정(司馬貞)이 말하기를, "대하(大河)는 중조산(中條山)의 서쪽을 지나가고, 중조산에서 동쪽으로는 분(汾)과 진(晉)의 험한 산등성이와 연결되며, 이를 능애(嶺阨)라 한다." 하였다. 한무제(漢武帝)가 이곳에 수산궁(首山宮)을 설치하였고, 원봉(元封) 6년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짐이 수산(首山)을 예우하니, 비전(毗田)에서 진귀한 옥이 나고, 때로는 황금으로 변하더라."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곤전(昆田)은 수산 아래의 밭이다."〉 《봉선서(封禪書)》에서는 "화(華)에서 서쪽으로는 명산이 일곱이다. 하나는 박산(薄山)으로, 곧 양산(襄山)이다." 〈이 역시 중조산의 다른 이름이다. 《목천자전(穆天子傳)》에서는 "동쪽 순행에서 하수(河首)와 양산(襄山)을 지났다."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이 산이다.

 

《水經注》:「雷首西臨大河,俗亦謂之堯山,上有堯城。」

《括地志》:「雷首山延長數百里,隨州郡而異名。一名中條山,一名首陽山。

 

 《수경주(水經注)》에서는 "뇌수산(雷首山)은 서쪽으로 대하(大河)를 바라보고 있으며, 속칭 요산(堯山)이라고도 하며, 산 위에는 요성(堯城)이 있다."라고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서는 "뇌수산은 수백 리에 걸쳐 뻗어 있으며, 주(州)와 군(郡)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중조산(中條山), 수양산(首陽山)이라고도 한다."

 

又有蒲山、歷山、薄山、襄山、甘棗山、渠瀦山、獨頭山、陑山、吳山〈亦曰吳坂。〉之名。」

《尚書大傳》:「湯伐桀升自陑。」鄭氏云:「陑在河曲之南是矣。」

山之南阜即首陽山,夷、齊餓死於其下。《六典》:「河東道名山曰雷首,亦曰中條。」

 

또한 포산(蒲山), 역산(歷山), 박산(薄山), 양산(襄山), 감조산(甘棗山), 거저산(渠瀦山), 독두산(獨頭山), 이산(陑山), 오산(吳山) 〈오판(吳坂)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이름이 있다. 《

상서대전(尚書大傳)》에서는 "탕(湯)이 걸(桀)을 정벌하고 이산(陑山)에 올랐다."라고 하였다. 정씨(鄭氏)는 "이산(陑山)은 하곡(河曲)의 남쪽에 있다."라고 설명하였다. 산의 남쪽 언덕이 바로 수양산(首陽山)으로, 백이(夷)와 숙제(齊)가 그 아래에서 굶어 죽었다. 《육전(六典)》에서는 "하동도(河東道)의 명산을 뇌수산(雷首山) 또는 중조산(中條山)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天寶末哥舒翰與賊將崔乾祐戰於靈寶西原,翰軍於河北,登高阜望之,〈胡氏曰:「首山與湖城縣之荊山隔河相望是也。」〉,軍敗翰走,自首山西度河入關。〈或又謂之南山,元至正十八年,汝、潁賊陷晉、冀諸處,察罕帖木兒引軍趨河東,先遣兵屯南山阻隘,自勒重兵屯聞喜,洛陽賊果出南山,爲伏兵所敗,乃進屯澤州。中條在晉、冀之南,與河南岸諸山相接,故曰南山云。〉

 

천보(天寶) 말년에 가서한(哥舒翰)이 적장 최건우(崔乾祐)와 영보(靈寶) 서쪽 들판에서 싸웠다. 가서한의 군대는 하북(河北)에 주둔하여, 높은 언덕에 올라 그들을 바라보았다. 〈호씨(胡氏)가 말하기를, "수산(首山)과 호성현(湖城縣)의 형산(荊山)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라고 하였다.〉 군대가 패하여 가서한은 달아나 수산(首山)에서 서쪽으로 강을 건너 관(關)으로 들어갔다. 〈또한 남산(南山)이라고도 한다. 원(元) 지정(至正) 18년에 여영(汝潁)의 적들이 진(晉)과 기(冀)의 여러 곳을 함락하자, 찰한첩목아(察罕帖木兒)가 군사를 이끌고 하동(河東)으로 나아갔다. 먼저 병력을 남산의 요새에 주둔시켜 길목을 막고, 중병(重兵)을 이끌고 문희(聞喜)에 주둔하였다. 낙양(洛陽)의 적이 과연 남산으로 나와 매복한 병사들에게 패배하였고, 이에 군대를 택주(澤州)로 진격시켰다. 중조산(中條山)은 진(晉)과 기(冀)의 남쪽에 위치하며 하남안(河南岸)의 여러 산들과 연결되어 있어 남산이라고 부른다.〉

 

《名山記》:「中條以中狹不絕而名,上有分雲嶺、天柱峰及桃花、玄女諸洞,谷口、蒼龍等泉。其瀑布水自天柱峰懸流百尺而下,出臨晉縣之王官谷入於大河。而解州東南之白陘嶺通陝州之大陽津,尤爲奇險。」底柱,底柱山,在平陽府解州平陸縣東南五十里,西去河南陝州四十里。

 

《명산기(名山記)》에서는 "중조산(中條山)은 중간이 좁고 끊어지지 않아 그 이름이 붙여졌다. 산 위에는 분운령(分雲嶺), 천주봉(天柱峰) 및 도화(桃花), 현녀(玄女) 등의 동굴과 곡구(谷口), 창룡(蒼龍) 등의 샘이 있다. 그 폭포수는 천주봉에서 백 척 높이로 쏟아져 내려와 임진현(臨晉縣)의 왕관곡(王官谷)을 지나 대하(大河)로 들어간다. 그리고 해주(解州) 동남쪽의 백형령(白陘嶺)은 섬주(陝州)의 대양진(大陽津)으로 통하며, 특히 기이하고 험하다."라고 하였다.

저주(底柱), 저주산(底柱山)은 평양부(平陽府) 해주(解州) 평륙현(平陸縣) 동남쪽 50리에 있으며, 서쪽으로 하남 섬주(河南陝州)에서 40리 떨어져 있다.

 

〈近志:三門山之中峰爲底柱,高不踰數尋,圍不及百尺,特以巋然中流而名。夫底柱控扼河津,其爲險峻也尚矣,志考之未詳也。〉詳見河南名山。太行,太行山,在平陽府絳州絳縣東二十里。〈志云:在澤州南三十里,迤邐而東北,跨陵川、壺關、潞城、黎城、遼州、和順、武鄉諸州縣境。〉此爲太行之西垂,東連懷、澤之境,又東北出彰德、潞安之郊,直抵幽州東北凡數千里。詳見河南名山。

 

〈근지(近志)에서는: 삼문산(三門山)의 중봉(中峰)을 저주(底柱)라 하며, 높이는 몇 길 되지 않고 둘레는 백 척에 미치지 않지만, 중류에 우뚝 솟아 있어 그 이름이 붙여졌다. 저주(底柱)는 하진(河津)을 지키는 요충지로, 그 험준함은 오래되었으나, 기록이 자세하지 않다.〉 자세한 내용은 하남(河南)의 명산을 참조하라. 

태행산(太行山)은 평양부(平陽府) 강주(絳州) 강현(絳縣) 동쪽 20리에 있다. 〈기록에 따르면: 택주(澤州) 남쪽 30리에 위치하며, 동북쪽으로 이어져 능천(陵川), 호관(壺關), 로성(潞城), 여성(黎城), 요주(遼州), 화순(和順), 무향(武鄉) 등의 주현 경계를 가로지른다.〉 이곳은 태행산의 서쪽 끝으로, 동쪽으로는 회(懷)와 택(澤)의 경계와 연결되며, 다시 동북쪽으로 나아가 장덕(彰德)과 로안(潞安)의 교외를 지나, 곧바로 유주(幽州) 동북쪽에 이르기까지 수천 리에 이른다. 자세한 내용은 하남의 명산을 참조하라.

 

恒山,

恒山,在大同府渾源州南二十里,即北岳也。〈志云:石晉以山後諸州歸於契丹,中國乃於曲陽致祭。明弘治中以馬文升請正祀典,因重建北岳廟於渾源州。〉詳見北直名山。

항산(恒山),

항산은 대동부(大同府) 혼원주(渾源州) 남쪽 20리에 있으며, 곧 북악(北岳)이다. 〈기록에 따르면: 석진(石晉) 시기에 산 후의 여러 주가 거란(契丹)에 속하게 되어, 중국에서는 곡양(曲陽)에서 제사를 지냈다. 명(明) 홍치(弘治) 중기에 마문승(馬文升)이 제사 의식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고, 이에 따라 혼원주에 북악묘(北岳廟)를 다시 세웠다.〉 자세한 내용은 북직(北直)의 명산을 참조하라.

 

霍山,

霍山,在平陽府霍州東南三十里。亦曰太岳,亦曰霍太山。《禹貢》:「既脩太原,至於岳陽。」〈謂太岳之陽。〉又曰:「壺口、雷首,至於太岳。」《周禮•職方》:「冀州鎮曰霍山。」

 

《爾雅》:「西方之美者有霍山,多珠玉。」《史記》:「周武王伐紂,飛廉先爲紂使北方,還無所報,乃爲壇於霍太山而致命焉。」山下有觀堆,高二里,周十里,趙襄子滅智氏,祠霍太山於此,曰觀堆祠。

 

곽산(霍山),
곽산은 평양부(平陽府) 곽주霍州 동남쪽 30리에 있다. 또한 太岳 또는 霍太山이라고도 불린다. 《우공(禹貢)》에서는 "이미 태원을 닦고, 岳陽에 이르렀다." 〈이는 太岳의 남쪽을 말한다.〉 또한 "호구(壺口)와 뇌수(雷首)를 지나 太岳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주례(周禮)•직방(職方)》에서는 "冀州의 진산(鎮山)을 霍山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아(爾雅)》에서는 "서쪽의 아름다운 산 중에 霍山이 있으며, 많은 진주와 옥이 있다."라고 하였다. 《사기(史記)》에서는 "주무왕(周武王)이 주(紂)를 정벌할 때, 비렴(飛廉)이 먼저 주왕(紂王)의 사자로 북쪽에 갔으나, 돌아와서 보고할 것이 없자 霍太山에 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라고 하였다. 산 아래에는 관퇴(觀堆)라는 곳이 있는데, 높이는 2리, 둘레는 10리이며, 조향자(趙襄子)가 지씨(智氏)를 멸망시키고 霍太山에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이를 관퇴사(觀堆祠)라고 한다.

 

後周建德五年,周主自將攻晉州,軍於汾曲,分遣宇文純守千里徑。志云:徑極高險,每大軍往來甚苦之,後魏平陽太守封子繪嘗請別開一路,旬日而就,蓋自霍山北出汾州,徑指太原,之道。〈杜佑曰:「汾州界北接太原,當千里徑。」〉隋開皇十四年詔以霍山爲冀州鎮。

 

후주(後周) 건덕(建德) 5년에 주주(周主)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주(晉州)를 공격하였으며, 군대를 분곡(汾曲)에 주둔시키고 우문순(宇文純)을 나누어 천리경(千里徑)을 지키게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천리경은 매우 높고 험준하여 대군이 오갈 때마다 매우 고생하였다. 후위(後魏) 평양태수(平陽太守) 봉자회(封子繪)가 일찍이 다른 길을 열 것을 요청하였고, 열흘 만에 완성되었는데, 이는 곧 霍山 북쪽에서 분주(汾州)로 나와 태원(太原)으로 가는 길이었다. 〈두우(杜佑)가 말하기를: "분주(汾州) 경계가 북쪽으로 태원과 맞닿아 있어 천리경을 담당하였다."라고 하였다.〉 수(隋) 개황(開皇) 14년(수 문제:서기594년)에 조서를 내려 霍山을 기주(冀州)의 진산(鎮山)으로 삼았다.

 

仁壽末楊素擊漢王諒,諒遣將屯高壁〈見霍州靈石縣。〉以拒之。

素令諸將引兵臨之,而自引奇兵深入霍山,緣崖谷而進,遂敗諒軍。

大業十三年李淵建義師至霍邑,隋將宋老生屯兵據險,師不得前,乃傍山取徑,去城十餘里,老生逆戰敗死。

蓋即千里徑也。

 

인수(仁壽) 말년에 양소(楊素)가 한왕(漢王) 량(諒)을 공격하자, 량은 장수를 보내 고벽(高壁) 〈곽주(霍州) 영석현(靈石縣)에 있다.〉에 주둔시키고 이를 막게 하였다.

양소는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병력을 이끌고 고벽에 이르게 하고, 자신은 기병을 이끌고 곽산(霍山) 깊숙이 들어가 벼랑과 골짜기를 따라 전진하여 마침내 량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대업(大業) 13년(617년) 이연(李淵)이 의병을 일으켜 곽읍(霍邑)에 이르렀다. 수나라 장수 송노생(宋老生)이 병력을 이끌고 험지를 지켜 군대가 전진할 수 없게 하였다. 이연의 군대는 산을 따라 길을 찾아 성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서 송노생을 맞아 싸워 그를 패사시켰다. 이는 곧 천리경(千里徑)이다.

 

 

霍山亦謂之西山,以自山而北接綿山、介山達於晉陽之西南也。唐天復元年周德威逼晉、絳,爲汴軍所敗,汴軍長驅圍晉陽,德威收餘衆依西山還晉陽。又五代周廣順初北漢主劉崇攻晉州,不克引還,周兵追之及霍邑,霍邑道險,漢兵墮崖谷死者甚衆,周兵追者不力,乃得度。

 

 

 

또한 霍山은 서산(西山)이라고도 불리는데, 산에서 북쪽으로 이어져 면산(綿山), 개산(介山)에 닿아 진양(晉陽) 서남쪽에 이르기 때문이다. 당(唐) 천복(天復) 원년(901년) 주덕위(周德威)가 진(晉)과 강(絳)을 압박하다가 변군(汴軍)에게 패배하였다. 변군은 진양을 향해 길게 몰아가 포위하였고, 덕위는 남은 병력을 모아 서산(西山)에 의지하여 진양으로 돌아갔다.

 또 오대(五代) 주(周) 광순(廣順) 초기에 북한(北漢) 주(主) 유숭(劉崇)이 진주(晉州)를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주군(周軍)은 그를 추격하여 霍邑에 이르렀다. 霍邑의 길은 험하여 한군(漢軍)이 벼랑과 골짜기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주군의 추격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蓋霍山崎嶇險峻,介并、晉二州之間,實控扼之要矣。《唐六典》:「河東道名山曰霍山,《祀典》謂之中鎮明。」〈洪武中建中岳廟,祀霍山。〉

 

이는 霍山이 험준하여 진(晉)과 병(并) 두 주의 사이에서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육전(唐六典)》에서는 "하동도(河東道)의 명산을 霍山이라 하고, 제사 의식에서 중진명(中鎮明)이라 불렀다." 

〈홍무(洪武) 연간에 중악묘(中岳廟)를 세워 霍山을 제사지냈다.〉

 

勾注,〈鴈門關附。〉

勾注山,在太原府代州西北二十五里,一名西陘山,〈陘讀硎。〉亦曰鴈門。《爾雅》:「北陵,西踰,鴈門。」《山海經》:「鴈門,飛鴈出於其門。」郭璞曰:「西隃即鴈門」。

 

구주(勾注) 〈안문관(鴈門關)에 속함.〉

구주산(勾注山)은 태원부(太原府) 대주(代州) 서북쪽 25리에 있으며, 일명 서형산(西陘山) 〈형(陘)은 '형(硎)'으로 읽음.〉이라고도 하고, 또한 안문(鴈門)이라고도 한다. 《이아(爾雅)》에서는 "북릉(北陵)과 서유(西踰)는 안문(鴈門)을 넘는다."라고 하였고, 《산해경(山海經)》에서는 "안문(鴈門)은 기러기가 그 문에서 날아 나온다."라고 하였다. 곽박(郭璞)은 "서유(西隃)가 곧 안문(鴈門)이다."라고 하였다.

 

 

《呂氏春秋》:「天下九塞,勾注其一。」《戰國策》:「張儀說燕王:『趙王欲并代,與代王遇於勾注之塞。』」又蘇厲爲齊謂趙惠王:「秦反巠分,先俞於趙。」孔氏曰:「巠分即陘山,先俞即西隃,字與音之訛也。」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는 "천하의 아홉 요새 중 구주(勾注)가 그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전국책(戰國策)》에서는 "장의(張儀)가 연왕(燕王)에게 말하기를, '조왕(趙王)이 대(代)를 병합하려고 하여, 대왕(代王)과 구주(勾注)의 요새에서 만났다.'라고 하였다." 또한 소려(蘇厲)가 제나라를 위해 조혜왕(趙惠王)에게 말하기를, "진(秦)은 형분(巠分)을 반대하고, 먼저 유(俞)를 조나라에 넘겨주었다."라고 하였다. 공씨(孔氏)가 말하기를, "형분(巠分)은 즉 형산(陘山)이고, 선유(先俞)는 즉 서유(西隃)로, 글자와 음이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史記》:「趙襄子踰勾注而破并、代。」又《趙世家》:「趙有代勾注之北。」漢六年匈奴圍韓王信於馬邑,信降匈奴,匈奴遂引兵南踰勾注。〈又《漢書•婁敬傳》:「漢兵已踰勾注。」〉又文帝後六年,匈奴入上郡、雲中,以蘇意爲將軍,屯勾注。武帝元光五年,詔發卒治鴈門阻險。

 

《사기(史記)》에서는 "조향자(趙襄子)가 구주(勾注)를 넘어 병(并)과 대(代)를 격파하였다."라고 하였다. 

(주:구주는 병주와 대주 아래에 있다)

 

또 《조세가(趙世家)》에서는 "조나라(趙)는 대(代)와 구주(勾注)의 북쪽을 소유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한(漢) 고조(高祖) 6년에 흉노(匈奴)가 한왕신(韓王信)을 마읍(馬邑)에서 포위하였고, 신(信)이 흉노에 항복하자 흉노는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구주(勾注)를 넘었다. 〈또 《한서(漢書)•누경전(婁敬傳)》에서는 "한(漢) 병사들이 이미 구주(勾注)를 넘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문제(文帝) 후 6년에 흉노가 상군(上郡)과 운중(雲中)에 침입하자, 소의(蘇意)를 장군으로 삼아 구주(勾注)에 주둔시켰다. 무제(武帝) 원광(元光) 5년에 조서를 내려 병사를 보내 안문(鴈門)의 험지를 정비하게 하였다.

 

〈劉氏曰:「將伐匈奴,通道令平易也。」〉

《晉地道記》:「北方之險有盧龍、飛狐、勾注爲之首,天下之阻,所以分別內外也。」

《河東記》:〈五代李璋撰。〉「勾注以山形勾轉水勢流注而名。」亦曰陘嶺,自鴈門以南謂之陘南,以北謂之陘北。自漢中平以後,羌胡大擾,陘北之地皆爲荒外,魏、晉時並以勾注爲塞。曹魏青龍元年鮮卑軻比能誘保塞鮮卑步度根,〈時步度根保太原鴈門塞。〉與結和親,自勒萬騎迎其累重於陘北。并州刺史畢軌請出師拒遏,魏主詔曰:「慎勿越塞過勾注也。」時軌軍已先進,果敗。

 

〈유씨(劉氏)가 말하기를: "흉노를 정벌하려면 길을 평탄하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진지도기(晉地道記)》에서는 "북방의 험준한 곳 중에 노룡(盧龍), 비호(飛狐), 구주(勾注)가 으뜸이며, 이는 천하의 장애물로, 내외를 구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동기(河東記)》에서는 〈오대(五代) 이장(李璋)이 지음〉 "구주(勾注)는 산의 형세가 굽어져 물이 흐르는 모양 때문에 이름 붙여졌다."라고 하였다. 또한 형령(陘嶺)이라고도 하는데, 안문(鴈門)에서 남쪽을 형남(陘南), 북쪽을 형북(陘北)이라고 한다. 한나라 중평(中平) 이후로, 강(羌)과 호(胡)가 크게 소란을 일으켜 형북(陘北)의 땅은 모두 황폐한 외지(外地)가 되었다. 위(魏)와 진(晉) 시대에는 모두 구주(勾注)를 요새로 삼았다. 조위(曹魏) 청룡(青龍) 원년(233년)에 선비(鮮卑) 가비능(軻比能)이 요새를 지키던 선비 보도근(步度根)을 유인하여, 〈당시 보도근은 태원(太原) 안문(鴈門)의 요새를 지키고 있었다.〉 혼인으로 결합하고, 만 기병을 이끌고 형북(陘北)에서 그의 짐을 맞이하였다. 병주자사(并州刺史) 필궤(畢軌)가 출병하여 저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위주(魏主)는 "신중히 요새를 넘어 구주(勾注)를 지나지 말라."라고 명하였다. 당시 필궤의 군대는 이미 먼저 진격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였다.

 

晉永嘉四年鮮卑拓跋猗盧帥部落自雲中入鴈門,從并州刺史劉琨求陘北地,琨徙樓煩、馬邑、陰館、繁峙、崞五縣民於陘南,以其地與之。

〈曹魏時五縣俱已遷陘南,遺民猶在陘北也。〉咸和三年後趙將石虎擊代王紇那於勾注陘北,紇那兵敗,徙都大甯以避之。〈大甯,見北直隸保安州廢廣寧縣。〉太元二十一年拓跋珪大舉伐燕,南出馬邑,踰勾注。

 

진(晉) 영가(永嘉) 4년(310년)에 선비(鮮卑) 탁발의로(拓跋猗盧)가 부락을 이끌고 운중(雲中)에서 안문(鴈門)으로 들어와 병주자사(并州刺史) 유곤(劉琨)에게 형북(陘北)의 땅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유곤은 누번(樓煩), 마읍(馬邑), 음관(陰館), 번시(繁峙), 곽(崞) 다섯 현의 주민들을 형남(陘南)으로 옮기고, 그 땅을 탁발의로에게 주었다

〈조위(曹魏) 시기에도 다섯 현은 모두 형남으로 옮겨졌으나, 유민들은 여전히 형북에 있었다.〉 함화(咸和) 3년(328년)에 후조(後趙) 장수 석호(石虎)가 대왕(代王) 흘나(紇那)를 구주(勾注) 형북(陘北)에서 공격하였고, 흘나의 병력이 패하여 도읍을 대녕(大甯)으로 옮겨 이를 피하였다. 〈대녕(大甯)은 북직례(北直隸) 보안주(保安州) 폐광녕현(廢廣寧縣)에서 볼 수 있다.〉 태원(太元) 21년(396년)에 탁발규(拓跋珪)가 대대적으로 연(燕)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마읍(馬邑)을 거쳐 구주(勾注)를 넘었다.

 

後魏太和十八年,太子恂將遷洛陽,不欲行。其黨元隆等密謀留恂,因舉兵斷關,規據陘北,不果。關即東陘、西陘二關也。後周主邕保定二年,遣楊忠會突厥自北道伐齊,拔齊二十餘城。

 

齊人守陘嶺之隘,忠擊破之,至晉陽而還。隋大業二年,漢王諒舉兵并州,遣其將喬鐘葵圍代州。朔州刺史楊義臣奉詔往救,夜出西陘,鐘葵敗走。

 

후위(後魏) 태화(太和) 18년(494년), 태자 순(恂)이 낙양(洛陽)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당원인 원롱(元隆) 등이 몰래 순을 남기려는 음모를 꾸미며 군사를 일으켜 관문을 차단하고, 형북(陘北)을 점령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관문은 곧 동형(東陘)과 서형(西陘)의 두 관문이다. 후주(後周) 주(主) 옹(邕) 보정(保定) 2년(562년), 양충(楊忠)을 보내어 북도로부터 돌궐과 함께 제(齊)를 정벌하게 하였으며, 제나라의 20여 성을 함락시켰다. 

 

제나라 사람들은 형령(陘嶺)의 요새를 지키고 있었으나, 양충이 이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진양(晉陽)까지 진격한 후 돌아갔다. 수(隋) 대업(大業) 2년(606년), 한왕(漢王) 양량(諒)이 병주(并州)에서 군사를 일으켜 장수 교종규(喬鐘葵)를 보내 대주(代州)를 포위하게 하였다. 삭주자사(朔州刺史) 양의신(楊義臣)이 조서를 받들어 구원하러 가서, 밤에 서형(西陘)으로 나가 교종규를 패주하게 하였다.

(주: 이 기록은 산서성에 있는 기록이다, 그런데 제나라가 나온다.제나라가 형령을 지킨다고 나온다.

제나라는 산서성에 있었다.)

 

《唐志》:「西陘,關名也,在鴈門山上,東西山巖峭拔,中有路盤旋崎嶇,絕頂置關,謂之西陘關,亦曰鴈門關。西北去朔州馬邑縣七十里,南去代州三十里。」〈今鴈門關因故址改置。〉武德二年劉武周引突厥入勾注,寇太原。五年突厥頡利入鴈門,寇并州。永隆二年裴行儉討突厥餘黨伏念,壁代州之陘口,即西陘也。又有東陘關,在代州南三十里。

 

《당지(唐志)》에서는 "서형(西陘)은 관문의 이름으로, 안문산(鴈門山) 위에 있다. 동서로 산의 절벽이 가파르게 솟아 있으며, 가운데에 길이 구불구불하게 나 있다. 절정에 관문을 설치하여 이를 서형관(西陘關) 또는 안문관(鴈門關)이라고 한다. 서북쪽으로 삭주(朔州) 마읍현(馬邑縣)에서 70리 떨어져 있고, 남쪽으로 대주(代州)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지금의 안문관은 옛 터에 따라 다시 설치되었다.〉 무덕(武德) 2년(619년)에 유무주(劉武周)가 돌궐을 끌어들여 구주(勾注)로 들어가 태원(太原)을 침략하였다. 5년(622년)에는 돌궐의 힐리(頡利)가 안문(鴈門)으로 들어와 병주(并州)를 침략하였다. 영隆(永隆) 2년(681년)에 배행검(裴行儉)이 돌궐의 잔당인 복념(伏念)을 토벌하였고, 대주(代州) 형구(陘口)에 주둔하였다. 즉, 서형(西陘)이다. 또 동형관(東陘關)이 있는데, 대주(代州) 남쪽 30리에 있다.

 

天寶十四載禄山將高秀巖據大同、河東、太原,閉關拒守,朔方節度使郭子儀敗賊兵,圍雲中,拔馬邑,遂開東陘關。杜佑曰:「東陘關甚險固,與西陘關並爲勾注之險。」會昌二年回鶻犯塞,詔河東節度使劉沔進屯鴈門關,虜寇雲州,沔擊卻之。廣明初沙陀入鴈門關寇忻、代,逼晉陽,陷太谷。

 

천보(天寶) 14년(755년)에 안록산(禄山)의 장수 고수암(高秀巖)이 대동(大同), 하동(河東), 태원(太原)을 점령하고 관문을 닫고 지키며 저항하였다.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 곽자안(郭子儀)이 적군을 물리치고, 운중(雲中)을 포위하고, 마읍(馬邑)을 함락시킨 후 동형관(東陘關)을 열었다. 두우(杜佑)가 말하기를: "동형관(東陘關)은 매우 험하고 견고하여 서형관(西陘關)과 함께 구주(勾注)의 험준한 곳이 된다."라고 하였다. 회창(會昌) 2년(842년)에 회골(回鶻)이 변방을 침범하자,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유면(劉沔)에게 명하여 안문관(鴈門關)에 진군하도록 하였다. 회골이 운주(雲州)를 침략하였으나, 유면이 이를 물리쳤다. 광명(廣明) 초기에 사타(沙陀)가 안문관에 들어와 흔주(忻州)와 대주(代州)를 침략하고, 진양(晉陽)을 위협하여 태곡(太谷)을 함락시켰다.

 

五代唐清泰三年契丹救河東,謂石敬瑭曰:「吾自北來,唐若斷鴈門諸路,伏兵險要,則吾不得進矣。使人覘視皆無之,吾是以知必勝也〈胡氏曰:「鴈門有東陘、西陘之險,崞縣有揚武、石門之隘。」〉石晉天福九年,契丹南寇,入鴈門關。宋太平興國五年,楊業刺代州,契丹來寇,業自西陘出,至鴈門北口,南向擊之,契丹大敗。雍熙三年楊業等自西陘追破契丹兵於寰州。

 

오대(五代) 당(唐) 청태(清泰) 3년(936년)에 거란(契丹)이 하동(河東)을 구원하러 오면서 석경당(石敬瑭)에게 말하기를, "내가 북쪽에서 왔는데, 당나라가 만약 안문(鴈門)의 여러 길을 차단하고 병력을 험한 곳에 매복시켰다면, 나는 진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을 시켜 정찰하게 하였으나 그런 것이 없었으므로, 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호씨(胡氏)가 말하기를: "안문(鴈門)에는 동형(東陘)과 서형(西陘)의 험지가 있으며, 곽현(崞縣)에는 양무(揚武)와 석문(石門)의 요새가 있다."라고 하였다.〉

석진(石晉) 천복(天福) 9년(944년)에 거란(契丹)이 남쪽으로 쳐들어와 안문관(鴈門關)에 들어왔다. 송(宋) 태평흥국(太平興國) 5년(980년)에 양업(楊業)이 대주(代州)를 공격하였는데, 거란이 쳐들어왔다. 양업은 서형(西陘)으로 나가 안문 북쪽 입구에 이르러 남쪽을 향해 그들을 공격하여 거란을 크게 패배시켰다. 옹희(雍熙) 3년(986년)에 양업 등이 서형(西陘)에서 거란 병력을 추격하여 환주(寰州)에서 격파하였다.

 

《元豐志》:「鴈門山有太和巖,亦曰太和嶺。」靖康二年金人劫欽宗帝后離青城,自鄭州而北至代,度太和嶺至雲中。明初傅友德克大同,引兵巡太和嶺,西北至宣德府。〈今宣府鎮。〉天順二年蒙古孛來等寇大同,直抵鴈門、忻、代,遣都督顏彪、馮宗率兵屯紫荊、倒馬二關爲聲援,寇益肆,敕二關兵出鴈門,寇乃卻。

 

《원풍지(元豐志)》에서는 "안문산(鴈門山)에 태화암(太和巖)이 있으며, 또한 태화령(太和嶺)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정강(靖康) 2년(1127년)에 금인(金人)이 흠종(欽宗) 황제와 황후를 청성(青城)에서 납치하여, 정주(鄭州)에서 북쪽으로 대(代)에 이르고, 태화령(太和嶺)을 넘어 운중(雲中)으로 갔다. 명(明) 초기에 부우덕(傅友德)이 대동(大同)을 함락시키고 병력을 이끌고 태화령을 순찰하여 서북쪽으로 선덕부(宣德府)에 이르렀다. 〈지금의 선부진(宣府鎮)이다.〉

천순(天順) 2년(1458년)에 몽골의 보래(孛來) 등이 대동을 침략하여 곧바로 안문(鴈門), 흔주(忻州), 대주(代州)에 이르렀다. 도독(都督) 안표(顏彪)와 풍종(馮宗)을 보내어 병력을 이끌고 자형관(紫荊關)과 도마관(倒馬關) 두 관문에 주둔시켜 지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이 더욱 기승을 부리자, 두 관문의 병력에게 안문(鴈門)으로 나가도록 하여 적을 물리쳤다.

 

嘉靖十九年吉囊由白泉口〈在河曲縣。〉長驅至寧武關、太和嶺,敗我兵,南掠至平遙。

俺答亦越太原至石州,而東掠平定、壽陽關。隆慶元年叛人趙全導寇入山西塞,陷石州。

 

가정(嘉靖) 19년(1540년)에 길낭(吉囊)이 백천구(白泉口) 〈하곡현(河曲縣)에 있음〉에서부터 곧바로 영무관(寧武關)과 태화령(太和嶺)에 이르러 우리 군대를 패배시키고, 남쪽으로 평요(平遙)까지 약탈하였다. 

안답(俺答)도 태원을 넘어 석주(石州)에 이르렀고, 동쪽으로 평정(平定)과 수양관(壽陽關)을 약탈하였다. 융경(隆慶) 원년(1567년)에 반란자 조전(趙全)이 산서(山西)의 요새로 적을 인도하여 석주(石州)를 함락시켰다. 

 

全曰:「自此塞鴈門,扼居庸,據雲中、上谷,效石晉故事,南北之形成矣。」今鴈門關在州北四十里,爲戍守重地,與寧武、偏頭爲山西三關。〈所謂外三關也。〉關城周二里有奇,傍山就險,屹爲巨防。

 

조전이 말하기를, "이 요새로부터 안문(鴈門)을 막고, 거용(居庸)을 점거하며, 운중(雲中)과 상곡(上谷)을 장악하면, 석진(石晉)의 옛 일을 본받아 남북의 형세를 이루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재의 안문관(鴈門關)은 주(州) 북쪽 40리에 있으며, 수비의 중요한 요지로, 영무(寧武)와 편두(偏頭)와 함께 산서의 삼관(三關)이다. 〈소위 외삼관(外三關)이라고 한다.〉 

관성(關城)의 둘레는 2리 남짓하며, 산을 따라 험지에 위치해 있어 굳건한 방어 요새가 되고 있다.

 

五臺。

五臺山,在太原府代州五臺縣東北百四十里,北距大同府蔚州三十里。《舊經》云:「山頂去代州城百餘里。其山左鄰恒山,右接天池,南屬五臺縣,北至繁峙縣,環臺所至五百餘里。」《名山志》:「五臺山五峰聳立,高出雲表,山頂無林木,有如壘土之臺,故曰五臺。中臺高四十里,頂平廣,周六里。西北有太華池;正東左畔去臺五里有雨花池;前三十里有飯仙山,即中臺案也;東南有鷲峰;西側有甘露池。東臺高二十八里,頂周三里。東畔有那羅延洞;又東有樓觀谷,內有習觀巖;西北去臺十五里有華巖嶺、仙人洞;東南嶺畔二十里有明月池;西南有青峰,一名南羅頂,南連望聖臺,臺下有東谷池,又東有溫湯池。西臺高三十五里,周二里。北有秘魔巖,臺西北有八功德水,東北嶺下爲文殊洗缽池。南臺高三十里,周二里。南去七十里巖畔有聖僧巖,又名滴水巖;西南二十里有三賢巖,又名七佛巖;東三十里交口下有聖鐘山,狀如覆鐘;西北十五里有清涼嶺及清涼泉,〈志云:清涼寺在清涼嶺,亦名華巖嶺。嶺畔有雪浪亭,俗名七里亭,爲登山之徑。《一統志》:「清涼嶺在五臺縣東北百里。其東有竹林嶺,東南有南臺嶺,西有清涼石,清涼泉,清涼洞。」〉上有羅漢洞;東北有竹嶺,東南十里有金閣嶺。北臺高三十里,周三里,名掖斗峰,頂南畔有羅睺臺,臺頂有黑龍池,即天井也;南下二十里有白水池,與天井連,其水經繁峙縣峨谷口入滹沱,其麓有七佛池;南又有飲牛池;東北有寶陀峰,又名寶山。〈產銀及石碌。〉東、北二臺麓有金剛窟,又名金剛洞,去二臺各二十里。」《靈山記》:「五臺山有四埵,去臺各百二十里。據古經所載,今北臺即是中臺,中臺即是南臺,大黃尖即是北臺,栲栳山即是西臺,漫天石即是東臺。四埵者,東埵爲無卹臺,即恒山頂也;西埵爲瞢登 山,即管涔山也;南埵爲繫舟山;〈見太原陽曲縣。〉北埵爲覆宿堆,即夏屋山也。又東臺去中臺四十二里,臺上遙見滄、瀛諸州,日出時下視大海,猶陂澤焉。西臺去中臺四里,危磴干霄,喬林拂日。南臺去中臺八十里,最幽寂。北臺去中臺十三里。」《地里志》:「五臺,河東道之名山。」〈也道家謂之紫府,釋氏謂之清涼山。〉山中古寺得名者,自唐大中時計之凡六十有四,是後增建益多,〈唐會昌五年盡毀天下僧寺,五臺僧皆亡逸。〉明因舊址建顯通寺。近時賊嘗據此阻險以守,官軍不敢擊,蓋山谿糾結,出沒爲易也。

 

其大川則有汾水,

汾水源出太原府靜樂縣北百四十里管涔山,南流經府城西,太原縣城東,微折而西經清源縣及交城縣東南,又經文水縣東南及祁縣西南境而入汾州府平遙縣界,經縣西及汾州府東,又南經孝義縣東,介休縣西,而入平陽府霍州靈石縣境,經縣城及霍州之西,又南歷汾西縣東及趙城縣、洪洞縣西,又南經平陽府城西及襄陵縣、太平縣之東,又南經曲沃縣西境,折而西經絳州南,又西曆稷山縣、河津縣南,至榮河縣北而入於大河。

 

《周禮•職方》:「冀州浸汾、潞。」〈潞水即漳水,見北直大川。〉《詩》:「彼汾沮洳。」《左傳》:「子產曰:『臺駘能業其官,宣汾、洮,帝用嘉之,封諸汾川。』」《戰國策》:「汾水可以灌平陽。」〈俗作「絳水」,誤。〉晉太元末拓跋珪取燕并州,遣將略地汾州。又周、齊相攻,爭汾北之地,周主邕圍晉州,軍於汾曲。唐取關中,自汾而西。宋圍太原,壅汾、晉二水灌之。

《漢志‧注》:「汾水經郡二,〈太原、河東也。〉行千三百四十里。」《唐六典》:「汾水,河東之大川也。」

분수는 태원,하동 2군을 지난다. 1340리를 흐른다. 당육전 왈  분수는 하동의 큰강이다.

 

沁水,

沁水源出沁州沁源縣西北百里綿山東谷,西南流經平陽府岳陽縣東,又折而東南,經澤州沁水縣東,又南經陽城縣東,而入河南懷慶府界,歷濟源縣東北,又南經府城北,又東經武陟縣東,脩武縣西,而入於大河。《漢志‧注》:沁水出穀遠縣〈即今沁源縣。〉羊頭山世靡谷,〈賈氏曰:「穀遠北山上。」〉東南至滎陽入河,過郡三,〈上黨、河內、河南也。顏師古曰:「沁水至懷州武陟縣界入河,此云滎陽,疑傳寫之誤。」〉行九百七十里

심수는 970리를 흐른다.

 

曹魏末司馬孚言:「沁水源出銅鞮山,〈沁州,故銅鞮縣也。〉屈曲周回水道九百里,天時霖雨,每致汎濫,請累石爲門,蓄泄以時。」隋大業四年開永濟渠,引沁水南入河,北通涿郡,亦曰御河。

《唐六典》:「河東道大川曰沁水。」唐乾元初李嗣業軍河內,安慶緒將蔡希德等自鄴涉沁水攻之,爲嗣業所拒,還走。

金貞祐三年遷汴,議開沁水便運道。近時議者多以引沁入衛可濟運河,然沁水流闊勢急,又穿太行而南,多沙易淤,

冬春之間,深不盈尺,夏秋淫潦,往往泛溢爲害。故懷、衛間常堤塞以防其衝決。〈今詳見河南懷慶府。〉

 

黃河、

 

黃河,自陝西榆林衛東北折而南,經廢東勝州西,又南流歷大同府朔州西界,又南入太原府河曲縣界,經縣西,又南歷保德州、岢嵐州及興縣之西,又南入汾州府界,經臨縣及永寧州、寧鄉縣西,又南歷石樓縣西而入平陽府界,經隰州之永和縣、大寧縣西,又南經吉州及鄉寧縣西,又南經河津縣、滎河縣西而汾水注焉,又南經臨晉縣界,至蒲州城西南而涑水入焉,又南過雷首山折而東,經芮城縣、平陸縣南,又東過底柱至垣曲縣東南,而入河南懷慶府濟源縣界。《禹貢》:「浮於龍門西河,會於渭、汭。」蓋河在冀州西也。春秋時爲秦、晉爭逐之交,戰國屬魏。《史記》:「魏武侯浮西河而下,曰:『美哉!山河之固,此魏國之寶也。』」後入於秦,而三晉遂無以自固。今詳見《川瀆異同》。

 

鹽池。〈附見。〉

 

鹽池,在平陽府解州東三里。又安邑縣西南二十里亦有鹽池,與解爲兩池。〈蓋一池而分東西二池也。〉《春秋》成六年:「晉人謀去故絳,諸大夫皆曰:『必居郇、瑕之地,沃饒而近鹽。』韓獻子曰:『山澤林鹽,國之寶也。』」杜預曰:「鹽,鹽池也。」《漢志》「池在安邑西南。」許慎謂之鹽鹽池,長五十一里,廣六里,周一百一十四里。呂忱曰:「宿沙氏煮海謂之鹽,〈宿沙,炎帝時諸侯,始煮海爲鹽,富溢他國。〉河東鹽池謂之鹽。」今池水東西七十里,南北十七里,紫色澄渟,渾而不流。水出石鹽,自然凝成,朝取夕復,終無減損;惟暴雨霖澍,潢潦奔軼,則鹽池用耗。公私共堨水徑,防其淫濫,謂之堨水。其廣狹淺深,古今盈縮時有不同。又有女鹽池,在解州西北三里,東西二十五里,南北二十里,其西南爲靜林等澗。服虔曰:「土人引水沃畦,水耗土自成鹽處也。」亦謂之鹽鹺,味小苦,不及大池,或號爲女鹽澤,亦曰鹽田鹽。俗言此池亢旱鹽即凝結,如逢霖雨鹽則不生。〈舊志:女鹽池在猗氏故城南。〉《水經注》:「鹽水出東南薄山,〈即中條之異名。〉西北流經巫咸山北,又徑安邑故城南,又西流注於鹽池。」自漢武元狩四年用桑弘羊等言,興鹽鐵之利,天下鹽官凡二十八郡,而河東安邑爲首。後漢元和三年帝幸安邑觀鹽池。〈《外紀》云:「周穆王亦至安邑觀鹽池。」〉初平中放散鹽禁。建安四年曹操從衛覬言,復遣謁者僕射監鹽官,以其利招服關中,其後皆設鹽官董之。晉亂,鹽利亦耗,後魏復立法征之。景明初,從中尉甄琛請,弛監池之禁。既而其利皆爲富強所專,四年復收鹽池利入公,神龜初復申鹽池之禁。孝昌三年蕭寶寅反長安,正平〈今聞喜縣民。〉薛修義等聚衆河東,分據鹽池,攻圍蒲阪以應之。時長孫稚奉命西討,遣別將楊侃擊平脩義等。會有詔廢鹽池稅,稚上言:「鹽池天產之貨,密邇京畿,惟應寶而守之,均贍以理。今四方多虞,府藏罄竭,以鹽稅準絹而言,一年不下三十萬匹。臣不先討關賊,徑解河東者,非緩長安而急蒲坂,恐一失鹽池,三軍乏食也。請依常收稅。」從之。《唐•食貨志》:「鹽池凡十八,井六百四十,惟安邑有池五,總謂之兩池,皆隸鹽鐵,置官榷之。貞觀十二年幸柳谷,觀鹽池。其小池曰女池,開元中置女鹽監,後以水淡監廢。大曆八年兩池生乳鹽,十二年賜名寶應靈慶池。〈《唐紀》:「大曆十二年,先是秋霖,河中府池鹽多敗。户部侍郎判度支韓滉恐鹽户減稅,奏雨雖多不害鹽,仍有瑞鹽生。上疑其不然,遣諫議大夫蔣鎮往視之。鎮還妄對,果如滉言,因賜號寶應靈慶池。」〉咸通以後藩鎮益強,河中帥得專鹽池之利。光啓初宦者田令孜用事,以安邑、解縣兩鹽池爲河中帥王重榮所專,歲止獻三十車供國用,請復舊制隸鹽鐵,因自兼兩池榷鹽使,〈《會要》:「元和十五年,稅鹽使爲榷鹽使。」〉收其利以贍軍。重榮不可,令孜因徙重榮鎮泰宁,重榮遂與李克用合謀舉兵犯闕討令孜。後唐同光二年河中帥李繼麟請榷安邑、解兩池鹽,每季輸省課。從之。」《宋志》:「鹽之類有二,引池而化者,《周官》所謂盬鹽也;〈俗曰顆鹽。〉煮海煮井煮鹻而成者,《周官》所謂散鹽也。〈亦曰末鹽。〉解州解、安邑兩鹽池,墾地爲畦,引水沃之,水耗鹽成。每歲二月墾畦,四月引水,八月而止,得鹽百餘萬。又前代鹽皆自生,唐開元中池涸,河中尹姜師度始有畦夫管種之課,宋張席上言鹽漫生之利,遂罷畦夫。」《鹽池考》:「中條山在池南,自蒲州接於太行,形如臥弓,環池而繞之,山頂有桃花洞水流入鹽池,池與安邑池爲兩池,官置使以領之。又中池北百步許,有淡泉一區,味甚甘洌,俗謂鹽得此水方成也。又西北十五里有硝池六,〈一曰賈瓦,二曰金井,三曰團,四曰熨斗,味皆淡;五曰夾凹,六曰蘇老,味皆鹹。〉天旱則生。自鹽池而南層山牆立,天巖雲秀,地谷泉深,亦天下形勝之處矣。〈《鹽池圖說》:「今池東西長五十五里,南北闊七里,周百四十四里。宋分爲東西兩池,各置鹽場二。明初并爲東西二場,成化二十一年增置中場。其池亦分爲三,近安邑者爲東池,近安邑西二十里路村者爲中池,近解州者爲西池,三場亦以是爲次也。池底淤泥滋生,鹽根形如水晶。夏月驕陽熏蒸,南風動盪,上結鹽板,光潔堅厚,可勝行立。板上水約三寸,翻騰浪花,落板即成顆粒,古謂之漫生鹽,今謂之斗粒鹽。更時霖小雨,則色愈鮮明,故曰顆鹽。宜及時撈採,若遇大雨,鹽復解散。秋冬地冷池枯,不能生鹽,間或有之,硝鹼相雜,味亦不正。其西北七里即女鹽池,據地高阜,其鹽淡,或苦不可食。時或生硝,亦名硝池。而六小池及靜林諸澗,每水溢則奔趨女鹽池爲鹽患。又安邑東有苦池,於鹽池亦切近。宋元符、崇寧間,觀察使王仲先於池東西南三面築七郎等十一堰衛之,所以拒溢水之入也。崔敖曰:『鹽池乃黃河陰潛之功,浸淫中條,融爲巨浸。』蓋大河從西北來,至蒲州折而東向,轉曲之間漸漬蓄匯,有此奧衍。今陝西花馬池亦近黃河折流派處也,然鹽藉主水以生,緣客水而敗,故治水即所以治鹽。鹽池南枕條山,雨水易迫,然非淵泉所出,且橫亘有護寶堤,爲仞高厚,依山有桑園、龍王、趙家灣、大小李、西姚諸堰,縱有飛瀑,阻遏猶易。北面多曠壤平丘,與水隔絕,故二隅無足爲慮。若東西盡處則俱逼禁堰,一牆已外即客水所鍾。次東禁堰者有壁水、月堰及黑龍堰,次西禁堰者有卓刀、七郎、硝池堰,各從東西自高而下,禁堰不能受則入池矣。黑龍堰之受害原於苦池,苦池乃姚暹渠蓄而復流之水也。渠出自夏縣,經巫咸谷北合洪洛渠,東合李綽渠,經苦池而迤邐西向,自安邑歷解州抵臨晉入五姓湖,由孟盟橋而注黃河。姚暹渠首及中股皆狹,至安邑與李綽、洪洛之水並注於苦池,苦池不能受,勢必東北泛溢於黑龍,入黑龍則壁水、小堰、月堰不能支,而竟衝東禁堰矣。硝池即女鹽池也,其受害原於涑水。涑水在姚暹渠北,源出自絳縣爲絳水,西經聞喜縣,爲涑水,又西受稷王、孤山、峨嵋坂諸水,經猗氏抵臨晉,亦入五姓湖而注黃河。涑水中尾多窄,至臨晉山溪諸水合注之,勢不能受,必自西北橫溢,破姚暹而奔騰於硝池,入硝池則黃牛、七郎、卓刀不能支,而竟衝決西禁堰矣。況東北又有湧金泉亦注於黑龍。西北又有長樂灘亦注於七郎。故築東禁以及黑龍,築西禁以及硝池,治其標者也。浚姚暹以道苦池,浚涑水并歸五姓湖,治其本者也。緩於南北而急於東西,先於根本而後於標末,則客水不浸,而主水無恙矣。」〉

 

其重險則曰蒲津,

 

蒲津關在平陽府蒲州西門外黃河西岸,〈《宋志》:「關在城西四里。」〉西至陝西朝邑縣三十五里。〈《唐志》:「蒲州治河東縣,乾元初以朝邑改置河西縣。」《里道記》:「蒲關西去故河西縣十四里。」〉《左傳》文二年「秦伯伐晉,濟河焚舟」,即此處也。又昭元年,「秦公子鍼奔晉,造舟於河」,通秦、晉之道也。戰國時魏置關於此。亦曰蒲阪津,亦曰夏陽津。〈自河東而言曰蒲阪津,自關中而言曰夏陽津。〉《秦紀》:「昭襄王十五年初作河橋。」司馬貞曰:「爲浮橋於臨晉關也。」漢王二年東出臨晉關,至河內擊虜殷王邛。三年,魏王豹反,韓信擊之。魏盛兵蒲阪,塞臨晉,信益爲疑兵,陳船欲渡臨晉,而從間道襲安邑,虜豹,遂定魏地。景帝三年七國反,吳王濞反書曰:「齊諸王與趙王定河間、河內,或入臨晉關,咸與寡人會於洛陽。」武帝元封六年立蒲津關,蓋設關官以譏行旅。後漢建安十六年,曹操西擊馬超、韓遂,與超等夾潼關而軍。操潛遣徐晃、朱靈度蒲阪津,據河西爲營。徐晃謂操:「公盛兵潼關,而賊不復別守蒲津,知其無謀也。」既而操從潼關北渡,遂自蒲阪度西河,循河爲甬道而南,大破超軍。晉太元十一年慕容永等自長安而東,出臨晉至河東。又苻丕使其相王永傳檄四方,會兵臨晉討姚萇、慕容垂。後魏孝昌三年蕭寶寅據關中,圍馮翊未下,長孫稚等奉命討之,至恒農,楊侃謂稚曰:「潼關險要,守禦己固,無所施其智勇。不如北取蒲阪,渡河而西,入其腹心,置兵死地,則華州之圍〈《五代志》:馮翊郡後魏置華州。」〉不戰自解,潼關之守必內顧而走。支節既解,長安可坐取也。」稚從之,寶寅由是敗散。永熙三年魏主脩入長安,高歡自洛陽追之,克潼關,進屯華陰。既而退屯河東,使薛瑜守潼關,庫狄溫守封陵,〈見蒲州。〉築城於蒲津西岸,以薛紹宗爲華州刺史使守之。西魏大統初,東魏司馬子如等攻潼關,既而回軍從蒲津西濟攻華州,不克而還。三年高歡軍蒲坂,造三浮橋,欲渡河,不果。既又自壺口趨蒲津濟河,至馮翊敗還,魏軍追至河,因乘勝取蒲坂,定汾、絳。四年造舟爲梁。九年,復築城爲防,蓋恃爲重險也。後周建德五年圍齊晉州,分遣辛韶等守蒲津關。隋都長安,亦於蒲津起河橋以通河中,置中潬城以守固河橋。〈《字書》「水中沙曰潬」,蓋建城於河中沙上。河陽亦有中潬城,以守固河陽浮橋也。《隋書》:「開皇中諸州調物,每歲河南自潼關,河北自蒲坂輸於長安。」〉仁壽末漢王諒謀舉兵并州,裴文安說諒曰:「今率精銳直入蒲津,以大軍繼後,風行電擊,頓於霸上,〈見陝西長安縣。〉咸陽以東,指揮可定,京師震擾,誰敢不從。」諒不能用,而遣將斷河橋,守蒲州,楊素銜枚潛濟,諒軍遂敗。大業十三年李淵引兵自河東濟河而西,朝邑法曹靳孝謨以蒲津、中潬二城降。〈胡氏曰:「蒲津城在河西岸,亦謂之西關城,所以護蒲津浮橋者。」〉唐開元十九年,於蒲津兩岸開東西門,各造鐵牛四以維浮梁。〈《志》云:唐初橫絙列艦以渡河,絙斷艦破。開元中改作蒲津橋,鑄鐵牛八,牛有一人策之,其下熔鐵爲山,又爲鐵柱灌之,分列兩岸以維浮橋。今東岸有四,西岸有三,其一沈於河。〉張說銘曰:「隔秦稱塞,臨晉名關,關西之要衝,河東之輻輳。」是也。寶應初回紇引兵助唐討史朝義於東都,至忻州,欲自蒲關入,由沙苑出潼關而東,不果。建中四年朱泚作亂據長安,上幸奉天。李懷光自河中度,至河西,屯蒲城;李晟亦自易定西還,自蒲津濟,軍於東渭橋。興元初李懷光叛,自涇陽焚掠而東至河西,或勸河中守將呂鳴岳焚橋拒之,嗚岳不能從。中和四年黃巢掠河南諸道,請救於河東帥李克用,克用引兵欲渡河陽,爲河陽帥諸葛爽所拒,乃還兵,自陝及河中度河而東。五代梁貞明六年,河中帥朱友謙襲取同州,去梁歸晉。梁遣劉鄩等攻同州,友謙請救於晉。晉將李存審等將軍至河中,即日濟河,軍於朝邑,既而大敗鄩兵。漢乾祐初李守貞以河中叛,漢將白文珂克西關城,柵於河西。宋大中祥符四年,行幸河中,祀汾陰,改爲大慶關。建炎初金人窺關中,濟自蒲津,〈《金史》:「元光初,時汴軍糧運不繼,李復亨議以陝西地腴歲豐,宜造大船,由大慶關渡入河東,抵湖城以通運,不果。」〉元致和元年,燕帖木兒據大都,迎立懷王陝西行臺。也先帖木兒起兵從大慶關度河,入河中府,趨懷、衛,河東官吏皆棄城遁。既而上都陷,乃降。明初平關陝,亦自蒲津濟。王氏有言:「武關以限南諸侯,臨晉以限東諸侯。」蒲津爲關、河之巨防,於今爲烈矣。

 

天井,〈羊腸坂附。〉

 

天井關亦曰太行關,在澤州南四十五里太行山頂,南北要衝也。《漢志‧注》:「上黨三關,一曰天井關,〈其二關,一曰壺口,見潞安府長治縣;一曰石研,即井陘也,見北直重險。〉關南有天井泉三所,其深不可測,因名。」陽朔二年秋,關東大水,詔流民欲入天井關者勿苛留。劉歆《遂初賦》「馳太行之險峻,入天井之高關」,謂此。後漢初馮異自河內北攻天井關,拔上黨兩城。又王梁爲野王令,北守天井關。既又遣劉延攻天井關,與更始所置上黨太守田邑連兵,延不得進。會更始敗,邑以上黨降。元和二年幸河東,登太行山,至天井關。蔡邕曰:「太行山上有天井關,關在井北,爲天設之險。」晉太元十九年慕容垂攻慕容永於長子,自滏口入天井關。〈滏口,見河南磁州;天井,在滏口西南,非入長子之道。或曰時永扼天井關以拒垂,垂出滏口,則已入天井關內也。〉唐會昌三年劉稹據澤潞叛,杜牧曰:「若使河陽萬人爲壘,窒天井關,高壁深塹勿與戰,而以別軍徑擣上黨,不過數月,必覆其巢穴矣。」時河陽帥王茂元遣將馬繼軍於天井關南科斗店,爲昭義將薛茂卿所敗。既而忠武帥王宰克天井關,焚大、小箕村,〈在關北十五里。〉進攻澤州不利,賊乘勝復取天井關。既又克之,賊勢始阻。中和四年黃巢侵掠河南諸道,請救於河東,李克用引軍自天井關而南。光化二年朱全忠克澤、潞二州李克用將李嗣昭攻之,下澤州,拔天井關,潞州守將遁去。光化五年朱全忠攻李克用於河東,使氏叔琮入太行,由天井關進軍昂車關,〈見沁州武鄉縣。〉還攻澤州,拔之。五代梁開平二年晉王存勗解潞州之圍,梁將康懷貞自天井關遁,晉軍乘勝進趣澤州。梁將牛存節自洛陽應接夾寨潰兵至天井關,謂其衆曰:「澤州要害地,不可失也。」遂前入澤州,晉兵不能克。漢初以契丹北還,議進取河南,蘇逢吉請出天井抵孟津,不果。宋靖康元年賜天井關名雄定關。元末亦名平陽關,至正十七年,擴廓守平陽關,保據澤、潞二州是也。關之南即羊腸坂道,孔穎達曰:「太行有羊腸坂,南屬懷,北屬澤。」《呂氏春秋》:「九山之一也,盤紆如羊腸。」《魏世家》:「如耳曰:『昔者魏伐趙,斷羊腸,拔閼與。』」〈見河南武安縣。〉又蔡澤謂應侯:「君相秦坐制諸侯,決羊腸之險,塞太行之道。」韓非說秦王西攻脩武,〈見河南懷慶府。〉逾羊腸,降代、上黨。又王莽謂五威將軍王嘉曰:「羊頭之扼,北當燕、趙。」羊腸、天井,險蓋相因也。《通釋》:羊腸有三,一在懷、澤間,即太行坂道也。一在潞安府壺關縣東南百里。《戰國策》:樊餘謂楚王:「韓兼兩上黨以臨趙,即趙羊腸以上危。」又蘇厲遺趙王書:「秦以三郡攻王之上黨,羊腸之西非王有。」《漢志》:「壺關縣有羊腸坂。」是也。一在太原西北九十里,吳起曰:「夏桀之居,伊闕在南,羊腸在北。」《淮南子‧注》:太原西北有羊腸坂,通河西、上郡關。〈《隋書》:煬帝登太行,問崔頤:「何處有羊腸坂?」對曰:「《漢書志》:在上黨壺關縣。」帝曰:「不是。」又答曰:「皇甫士安撰地書,云太原北九十里有羊腸坂。」帝曰:「是也。」〉《通典》:「陽曲縣有乾燭谷,即羊腸坂。」又交城縣有羊腸山,宜芳縣亦有羊腸坂,〈宜芳,今嵐縣。〉蓋羊腸坂縈迴紆遠,接陽曲、交城、宜芳三縣之界也。

 

飛狐。

 

飛狐口在大同府蔚州廣昌縣北二十里。〈《水經注》:「代郡南四十里有飛狐關。」《輿地廣記》:「飛狐峪飛狐關,在蔚州南四十里。」〉其地兩崖峭立,一線微通,迤邐蜿延百有餘里。《地道記》:「自常山北行四百五十里得常山岌,號飛狐口,酈食其說漢高距飛狐之口是也。」《文帝紀》:「匈奴入上郡、雲中,以令免爲車騎將軍,屯飛狐。」後漢建武十二年盧芳與匈奴、烏桓連兵盜邊,詔王霸與杜茂治飛狐道,堆布土石,築起亭障,自代至平城三百餘里。」〈《後漢書》:「建武十五年馬武代杜茂繕治障塞,自西河至渭橋、河上至安邑、太原至井陘、中山至鄴,皆築堡壁起烽燧,十里一堠。」〉晉建興四年并州陷於石勒,劉琨自代出飛狐奔薊,歸段匹磾。後魏太和六年,發州郡五萬人治靈丘道,自代郡靈丘南越太行至中山。靈丘道即飛狐道也。武泰初,葛榮據冀、定諸州,爾朱榮請發柔然兵東趣下口以躡其背,而相州重兵當其前。下口,蓋指飛狐口。唐武后聖曆初,突厥默啜寇飛狐,陷定州。建中四年朱泚據長安,李晟自易定西還,出飛狐道,晝夜兼行至代州。〈即今代州,非故代郡也。〉光化五年朱全忠使王處直以義武兵入自飛狐,敗李克用於晉陽。朱梁乾化二年,晉王存勗使周德威伐燕,東出飛狐。後唐清泰末,契丹助石敬瑭圍唐兵於晉安寨,唐主命幽州帥趙德鈞自飛狐踵契丹後以救之,德鈞固請由土門西入,許之。土門,謂井陘也。宋雍熙三年賀令圖與契丹耶律斜軫戰於定西,〈見靈丘縣。〉,敗績南奔;斜軫追及於五臺,又敗。明日蔚州陷,令圖與潘美往救,大敗於飛狐,於是渾、源、雲、應、寰諸州,悉沒於契丹。飛狐蓋山北諸州之噤喉也。今其地東起宣府,西趨大同,商賈轉輸,畢集於此。紫荊、倒馬兩關,恃飛狐爲外險,誠邊陲重地矣。

 

〈按〉山西居京師上游,表裏山河,稱爲完固,且北收代馬之用,南資鹽池之利,因勢乘便,可以拊天下之背,而搤其吭也。說者曰:大同於京師尤爲建瓴之勢,朝發白登,暮叩紫荊,則國門以外皆戰場也。往者土木之變,敵雖深入郊圻,賴大同犄其後,故不能以得志。嗣是關門告警,未嘗不以大同爲鎖鑰之寄。且夫天下之形勝莫若陝西,趙主父攘地至雲中、九原,遂欲直南襲秦咸陽。秦始皇巡北邊,從上郡入,既又使蒙恬除直道,自九原抵雲陽。張儀之以秦脅燕也,曰:「秦下甲雲中、九原,驅趙而攻燕。」唐范陽之亂,李泌議遣安西西域之衆,並塞東北,自媯、檀南取范陽,然則左顧范陽,右顧咸陽,燕、秦捷徑,皆道出大同也。近時爲門户計者,切切於議屯、議戍、議轉輸,而邊事日棘。嘉靖中督臣翁萬達上邊議,謂山西太原、大同,皆與京師相表裏,防維最重。山西鎮邊起保德州黃河岸,迤邐而東,歷偏關抵老營堡,實二百五十四里;大同鎮邊起鴉角山,〈在老營堡東北界。〉迤邐而北,東歷中、北二路抵東路之鎮口臺,〈在天成衛東北界。〉實六百四十七里;而宣府鎮邊起西路之西陽河,〈在萬全右衛西南界。〉迤邐而東北,歷中、北二路抵東路之永寧四海治,〈見北直延慶州。〉實千二十三里;共一千九百餘里,皆逼近寇境,險在外者也,所謂極邊也。山西鎮自老營堡轉南而東,歷寧武、鴈門、北婁至平刑關約八百里;又轉南而東爲保定之境,歷龍泉、倒馬、紫荊之黃土口、〈在倒馬關西北。〉插箭嶺、浮圖峪〈俱見廣昌縣。〉至沿河口,〈在直隸淶水縣東北,又東北即房山縣境之高崖口。〉約千七百餘里;又東北爲順天境,歷高崖、白羊至居庸關約百八十餘里;共千五十餘里,皆峻山層岡,險在內者也,所謂次邊也。外邊之地有險夷迂直,總而較之,則大同最稱難守。次宣府,次山西之偏、老。分而言之,則大同之最難守者北路,而宣府之最難守者亦北路也。山西偏頭關以西百五十里恃河爲險,偏頭關以東百有四里則與大同之西路略等,內邊可通,大舉惟紫荊、寧武、鴈門、倒馬、龍泉、平刑諸門隘,然寇山西,多從大同入,犯紫荊必從宣府入,外邊、內邊,唇齒之勢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