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8
역사풀이(9) 탁록 “涿鹿”
탁록은 산서성 서남부에 위치한 운성시에 있었다.
이번 영상에서는 탁록현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탁록은 한서지리지에 상곡군에 속한 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경주도에서는 상곡군 탁록현의 위치는 지도와 같습니다.
수경주도에 나오는 지명은 하북성에 속하는지,산서성에 속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 上谷郡,縣十五:沮陽,泉上,潘,軍都,居庸,雊瞀,夷輿,寧,昌平,廣寧,涿鹿,且居,茹,女祈,下落。
상곡군, 현은 십오개가 있다: 저양, 천상, 반, 군도, 거용, 구무, 이여, 영, 창평, 광녕, 탁록, 차거, 여, 여기, 하락.
(주:潘 뜨물 반, 넘칠 번, 고을이름 판, 성씨 반 /雊 장끼 울 구, 구관조 구 /瞀 어두울 무, 눈흐릴 막, 현기증 모, 야맹증 목)
현재 중국 사학계에서는 (가짜)탁록은 하북성 장가구시에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바이두 백과 사전에서 탁록으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결과는 탁록은 하북성 장가구시에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涿鹿縣,隸屬於河北省張家口市,地處河北省西北部、桑干河下游,
"탁록현은 하북(허베이)성 장가구(장자커우)시에 속해 있으며, 하북성 북서부, 상건하 하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라고 나옵니다.
구글지도에서 확인해 봤습니다.
보시다시피 (가짜)탁록은 하북성 장가구시에 위치합니다.
그러나 산서성 서남부에 있는 운성시 홈페이지에서는 '탁록'이 운성시 해주라고 나옵니다.
현재 중국 운성시 홈페이지에 나온 기록입니다.
军事篇-运城市人民政府门户网站 (yuncheng.gov.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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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성시 군사편
발표 시간: 2024-01-18 16:37
我國歷史上第一場大規模的戰爭,叫做涿鹿之戰,它就發生在素有中華民族發祥地之稱的黃河中游的運城一帶,在這場戰爭中與黃帝交戰的蚩尤是我國最早的兵器發明人。據《孔子三朝記》、《太平寰宇記·卷四十六》、《魏土地記》、《解縣志》和唐朝著名詩人王翰的詠解州《鹽池曉望》等史料典籍相互印證,今解州就是古時之“涿鹿”。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전쟁은 '탁록 전투'라 불리며, 이 전투는 중국 민족의 발상지로 알려진 황하 중류의 운성 지역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황제와 싸운 치우는 중국 최초의 병기 발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자삼조기》, 《태평환우기·권사십육》, 《위토지기》, 《해현지 解縣志 》 및 당나라 유명 시인 왕한의 《염지효망 鹽池曉望 》 등의 사료를 상호 검증한 결과, 현재의 해주(解州)가 바로 고대의 '탁록(涿鹿) '임이 확인되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 산서성 운성시에서 중국의 여러 사료들을 상호 검증한 결과, 운성시 해주가 고대의 탁록임을 확인하였다고 하는데,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할까요?
(원문 계속:
在距今五千年前後的氏族社會時期,地球整個北半球頻頻發生特大的地震和水旱災害。 약 5천 년 전후의 씨족 사회 시기에는 지구 전체 북반구에서 빈번하게 대규모 지진과 홍수, 가뭄 등의 재해가 발생했습니다. 面對空前的災難,各地的氏族部落為爭奪自然資源和適於放牧、淺耕的地帶,擴大自己的生存空間,紛紛離開故土向中原這塊肥沃的黃土地匯聚。 이러한 전례 없는 재난에 직면하여, 각지의 씨족 부족들은 자연 자원과 방목 및 얕은 경작에 적합한 지역을 차지하고 생존 공간을 확대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비옥한 중원의 황토지대로 모여들었습니다. 黃帝部落在東征、南下的過程中,兼併了包括炎帝部落在內的許多部落,最後同蚩尤部落為爭奪水草豐美的「冀州」(今包括運城市在內的廣大地區),特別是為爭奪中華大地上開發最早的運城鹽湖,展開了一場前所未有的激戰。 황제 부족은 동쪽으로 정벌하고 남하하는 과정에서 염제 부족을 포함한 여러 부족을 병합하였으며, 결국 수초가 무성한 "기주"(오늘날 윈청시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를 차지하기 위해, 특히 중국 대륙에서 가장 일찍 개발된 윈청 염호를 놓고 치우 부족과 전례 없는 대격전을 벌였습니다.
戰鬥一開始,使用金屬武器的蚩尤部落很快占得先機。黃帝遂派大將應龍出戰。應龍飛上天空,噴出大水,將蚩尤的軍隊衝得七零八落。蚩尤忙令風伯和雨師上陣。風伯颳起漫天狂風,雨師則把應龍噴出的水全部收走,然後兩人又施展法術,用狂風暴雨襲擊黃帝軍隊,使應龍敗下陣來。不久,經過休整的黃帝軍隊士氣高昂,再次與蚩尤軍隊交戰。這次,黃帝身先士卒,帶兵殺入蚩尤陣中。不料,善「制五兵之器、變化雲霧」(《漢學堂叢書》)的蚩尤卻施放出彌天大霧,把黃帝和他的軍隊團團罩住,使其辨不清方向,然後利用兵器上的優勢發起猛烈的進攻。黃帝借助風后發明的指南車才拼死突出重圍。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금속 무기를 사용한 치우 부족이 빠르게 우세를 점했습니다. 황제는 곧바로 대장 응룡을 출전시켰습니다. 응룡은 하늘로 날아올라 물을 내뿜어 치우의 군대를 산산조각냈습니다. 이에 치우는 서둘러 풍백과 우사를 출전시켰습니다. 풍백은 하늘 가득 광풍을 불어오게 하고, 우사는 응룡이 내뿜은 물을 모두 걷어들인 후, 다시 법술을 펼쳐 광풍과 폭우로 황제의 군대를 공격하여 응룡을 패퇴시켰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정비를 마친 황제의 군대는 사기가 충만하여 다시 치우의 군대와 교전했습니다. 이번에는 황제가 스스로 선봉에 서서 군대를 이끌고 치우의 진영으로 돌진했습니다. 그러나 '오병지기를 만들고 구름과 안개를 변화시키는' 치우는 짙은 안개를 만들어 황제와 그의 군대를 완전히 덮어버려 그들이 방향을 분간하지 못하게 했고, 그 틈을 타 무기의 우위를 이용해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황제는 풍후가 발명한 지남거를 이용해 가까스로 포위를 뚫고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산서성 운성시 해주진이 탁록이라는 또 다른 중국 기록이 있습니다.
중국 행정구획총람에도 탁록의 위치는 현재 산서성 운성시 (염호구) 해주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반천지전(阪泉之战)으로 검색해 봤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반천지전 [阪泉之战, Battle of Banquan] (중국행정구획총람, 2010. 8. 1., 황매희 편집부)
반천지전(阪泉之战)이 일어난 장소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하북 탁록(涿鹿, 줘루)의 동남부라는 설과 지금의 베이징 옌칭(延庆, 연경)이라는 설이 있으며 또 다른 설로는 반천(阪泉)이 지금의 산서성(山西) 운성시(运城市, 운성시) 해주진(解州镇, 해주진)이라는 설도 있다.
그 근거로는 해주진(解州镇, 해주진)이 춘추(春秋) 진국(晋国) 시기에 해량(解梁)으로 불리었으며 한나라 때 해현(解县)이 설치되었는데, 해현지(解县志)의 기록에 따르면 해량(解梁)은 고대에 탁록(涿鹿, 줘루)으로 불렸다고 기록되어있다.
이와같이 중국의 산서성 운성시 홈페이지와 중국 행정구획총람을 통해 탁록은 산서성 서남부의 운성시 해주진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그러므로 한서지리지에서 탁록현은 상곡군에 속해있다고 하였으므로, 상곡군은 산서성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밝혀 나가는 사실은 고수와 포구수가 흐르는 상곡군과 어양군이 하북성에 위치하지 않고 산서성에 위치한다는
사실입니다.
탁록이 산서성 서남부에 위치한 운성시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또 하나의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중국 역사 학자들은 산서성 운성시에 있어야 할 '탁록'을 800km 동북쪽 하북성 장가구시로 이동시켰습니다.
역사풀이-2편에서는 서기 49년 모본왕이 침략한 한나라 어양군의 위치가 산서성 장치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 봤고,
이번 영상에서는 고대 황제 헌원과 치우가 전쟁을 벌였던 탁록의 위치가 산서성 운성시라는 것을 알아 봤습니다.
하나씩 밝히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의 위대한 고대사의 진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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涿鹿縣,隸屬於河北省張家口市,地處河北省西北部、桑干河下游,與張家口市下花園區和北京市郊區相接。縣城距張家口市區75公里,距北京市區130公里.
탁록현은 하북(허베이)성 장가구(장자커우)시에 속해 있으며, 하북성 북서부, 상건하 하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장가구시 하화원구와 베이징시 교외 지역과 접하고 있습니다. 현청은 장가구시 중심에서 75km, 베이징시 중심에서 130km 떨어져 있습니다.
五千年前,黃帝、炎帝、蚩尤在涿鹿征戰、耕作、融合,創造了中華民族共認的“龍”圖騰,開創了中華五千年的文明史,實現了中華民族的大融合。
5천 년 전, 황제, 염제, 치우가 탁록에서 전쟁을 벌이고 농사를 짓고 융합하며, 중국 민족이 공인하는 '용' 토템을 창조하고, 중화 5천 년의 문명사를 개척하여 중화 민족의 대융합을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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军事篇-运城市人民政府门户网站 (yuncheng.gov.cn)
'탁록' 중국 황제 헌원과 동이의 황제 치우가 싸웠던 곳입니다.
軍事篇
發布時間:2024-01-18 16:37
我國歷史上第一場大規模的戰爭,叫做涿鹿之戰,它就發生在素有中華民族發祥地之稱的黃河中游的運城一帶,在這場戰爭中與黃帝交戰的蚩尤是我國最早的兵器發明人。據《孔子三朝記》、《太平寰宇記·卷四十六》、《魏土地記》、《解縣志》和唐朝著名詩人王翰的詠解州《鹽池曉望》等史料典籍相互印證,今解州就是古時之“涿鹿”。
군사편
발표 시간: 2024-01-18 16:37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전쟁은 '탁록 전투'라 불리며, 이 전투는 중국 민족의 발상지로 알려진 황하 중류의 운성 지역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황제와 싸운 치우는 우리나라 최초의 병기 발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자삼조기》, 《태평환우기·권사십육》, 《위토지기》, 《해현지》 및 당나라 유명 시인 왕한의 《염지효망》 등의 사료를 상호 검증한 결과, 현재의 해주가 바로 고대의 '탁록'임이 확인되었습니다.
在距今五千年前後的氏族社會時期,地球整個北半球頻頻發生特大的地震和水旱災害。面對空前的災難,各地的氏族部落為爭奪自然資源和適於放牧、淺耕的地帶,擴大自己的生存空間,紛紛離開故土向中原這塊肥沃的黃土地匯聚。黃帝部落在東征、南下的過程中,兼併了包括炎帝部落在內的許多部落,最後同蚩尤部落為爭奪水草豐美的“冀州”(今包括運城市在內的廣大地區),特別是為爭奪中華大地上開發最早的運城鹽湖,展開了一場前所未有的激戰。
지금으로부터 약 오천 년 전의 씨족 사회 시기, 지구 전체 북반구에서는 큰 지진과 홍수, 가뭄 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이 전례 없는 재난을 맞아, 각지의 씨족 부족들은 자연 자원과 목축, 얕은 경작에 적합한 지역을 쟁탈하고 자신들의 생존 공간을 넓히기 위해 고향을 떠나 비옥한 황토지대인 중원으로 모여들었습니다. 황제 부족은 동쪽과 남쪽으로 정벌하는 과정에서 염제 부족을 포함한 많은 부족을 병합하였고, 최종적으로 치우 부족과 물과 풀이 풍부한 "기주冀州 "(현재의 운성시 運城市 를 포함한 넓은 지역), 특히 중국 대륙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운성 염호 運城鹽湖 를 쟁탈하기 위해 전례 없는 격전을 벌였습니다.
戰鬥一開始,使用金屬武器的蚩尤部落很快佔得先機。黃帝遂派大將應龍出戰。應龍飛上天空,噴出大水,將蚩尤的軍隊衝得七零八落。蚩尤忙令風伯和雨師上陣。風伯颳起漫天狂風,雨師則把應龍噴出的水全部收走,然後兩人又施展法術,用狂風暴雨襲擊黃帝軍隊,使應龍敗下陣來。不久,經過休整的黃帝軍隊士氣高昂,再次與蚩尤軍隊交戰。這次,黃帝身先士卒,帶兵殺入蚩尤陣中。不料,善“制五兵之器、變化雲霧”(《漢學堂叢書》)的蚩尤卻施放出瀰天大霧,把黃帝和他的軍隊團團罩住,使其辨不清方向,然後利用兵器上的優勢發起猛烈的進攻。黃帝借助風后發明的指南車才拼死突出重圍。
전투가 시작되자 금속 무기를 사용하는 치우 부락이 곧바로 우세를 점했습니다. 황제는 대장 응룡을 파견하여 싸우게 했습니다. 응룡은 하늘로 날아올라 물을 뿜어내어 치우의 군대를 흩어놓았습니다. 치우는 급히 풍백과 우사를 전장에 내보냈습니다. 풍백은 거센 바람을 일으켰고, 우사는 응룡이 뿜어낸 물을 모두 흡수한 다음, 두 사람은 다시 법술을 사용해 황제의 군대를 폭풍우로 공격해 응룡을 물리쳤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정비를 마친 황제의 군대는 사기가 높아져 다시 치우의 군대와 싸웠습니다. 이번에는 황제가 직접 앞장서서 군대를 이끌고 치우의 진영으로 돌격했습니다. 그러나 "오병지기를 만들고 구름과 안개를 변화시키는 것"을 잘하는 치우가 짙은 안개를 일으켜 황제와 그의 군대를 에워싸서 방향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런 다음 무기의 우세를 이용해 맹렬하게 공격했습니다. 황제는 풍후가 발명한 지남거를 이용해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나왔습니다.
突圍成功的黃帝痛定思痛,做了一系列前所未有的精心準備。首先,他親自到太山找玄女請教戰法秘訣,並結合自己的作戰經驗,創作了兵法《黃帝陰符經》,指揮軍隊演練出一千八百陣。其次,黃帝打聽到東海流波山上有一種怪獸夔(kui,二聲),吼聲像天空的炸雷一樣響亮,就派人把夔殺死,用夔皮做成戰鼓,用雷池雷獸的骨頭做鼓槌,敲起來“聲震五百里”,以鼓舞士氣,激勵鬥志。他還特意召來自己的女兒——專會收風息雨的旱魃(ba,二聲)助戰,然後同蚩尤展開了最後決戰。
포위망을 뚫고 나온 황제는 깊이 반성하며 일련의 전례 없는 준비를 했습니다. 먼저 그는 태산에 직접 가서 현녀에게 전술 비법을 물어보고 자신의 전투 경험을 결합하여 병법서 《황제음부경》을 저술하고, 군대를 지휘해 1800개의 진을 연습했습니다. 다음으로 황제는 동해 유파산에 괴수 기(夔, kui, 2성)가 있는데, 그 울음소리가 하늘의 천둥처럼 크다는 것을 알아내고 사람을 보내 기를 죽이고, 기의 가죽으로 전쟁 북을 만들고, 뇌지뢰수의 뼈로 북채를 만들어 두드리니 “소리가 500리까지 울려 퍼져” 사기를 북돋우고 투지를 격려했습니다. 그는 또 자신의 딸로서 바람을 멈추고 비를 그치게 할 수 있는 한발(旱魃, ba, 2성)을 불러들여 전투를 돕게 한 후 치우와 최후의 결전을 벌였습니다.
決戰開始後,只見應龍噴出的滔天洪水被風伯和雨師收走;而風伯、雨師的狂風暴雨和蚩尤施放的瀰天大霧又被旱魃一一化解。黃帝部落把蚩尤部落緊緊圍在戰陣中,然後敲擊戰鼓,在蚩尤及其部下魂喪魄散時乘勢追擊,一舉取得戰鬥勝利,最後“軒轅氏誅蚩尤於涿鹿之野,血入池化為鹵,……今池南有蚩尤城,相傳是其葬處”(《夢溪筆談》卷三)。
蚩尤戰敗後,其部族一部分遷徙到了我國西南方今雲南、貴州一帶,一部分飄洋過海,移居朝鮮半島、東南亞及美洲等地,還有一部分則留在當地被黃帝部落同化。近年來,苗族、黎族的代表和韓國文化使團多次來運城,參拜被其稱為祖先的蚩尤。而運城市鹽湖區東郭鎮的蚩尤村,就是因為蚩尤部落生活於此、蚩尤兵敗後葬於此而得名的。
涿鹿之戰中,雙方的許多創造,如蚩尤使用金屬武器,黃帝製造戰鼓激勵士氣等,都對後來的戰爭產生了重要影響。特別是黃帝創作的《黃帝陰符經》,在戰爭中發揮了奇特的作用,成為我國最早的兵法典籍。涿鹿之戰後,人們不斷深化對天時、地利及新武器的研究與應用,並將其作為戰役取勝的關鍵因素。
涿鹿之戰,促進了中華民族的第一次融合。黃帝在這次大戰中戰勝了蚩尤,成為五帝之首,從而奠定了中華民族國家五千年的根基。
결전이 시작되자 응룡이 뿜어낸 거대한 홍수가 풍백과 우사에 의해 사라졌습니다. 풍백과 우사의 광풍과 폭우, 그리고 치우가 일으킨 짙은 안개도 한발에 의해 모두 해소되었습니다. 황제 부락은 치우 부락을 전투 진영에 단단히 포위하고 전쟁 북을 울렸습니다. 치우와 그 부하들이 혼비백산할 때, 황제 부락은 그 기세를 타고 추격하여 일거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헌원씨가 탁록의 들판에서 치우를 처형하고 피가 못으로 흘러들어 소금물이 되었다. … 현재 못 남쪽에 치우성이 있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곳이 치우의 무덤이다”(《몽계필담》 권3)라고 합니다.
치우가 패배한 후, 그의 부락 일부는 중국 남서부의 현재 운남성과 귀주성 일대로 이주했고, 일부는 바다를 건너 한국 반도, 동남아시아 및 아메리카 등지로 이주했습니다. 나머지 일부는 현지에 남아 황제 부락에 동화되었습니다. 최근 몇 년간, 묘족과 이족의 대표 및 한국 문화 사절단이 여러 차례 운성을 방문하여 조상으로 여기는 치우를 참배했습니다. 운성시 염호구 동곽진에 있는 치우촌은 치우 부락이 이곳에 살았고, 치우가 패배한 후 이곳에 묻혔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탁록 전투에서 양측의 많은 창조물, 예를 들어 치우의 금속 무기 사용, 황제가 전쟁 북을 만들어 사기를 북돋운 것 등이 이후의 전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황제가 저술한 《황제음부경》은 전쟁에서 놀라운 역할을 하여 중국 최초의 병법서가 되었습니다. 탁록 전투 이후 사람들은 천시, 지리 및 새로운 무기에 대한 연구와 응용을 끊임없이 심화시키며 이를 전투에서 승리하는 중요한 요소로 삼았습니다.
탁록 전투는 중화 민족의 첫 번째 융합을 촉진했습니다. 황제는 이번 대전에서 치우를 물리치고 오제 중의 수장이 되어 중화 민족 국가 5천 년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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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천지전
[ 阪泉之战 , Battle of Banquan ]
사기(史记) 오제본기(五帝本纪)에 수록되어 있는 상고시대 발생했다고 전해지는 전쟁. 신농씨(神农氏)의 후예인 염제(炎帝)가 통치하던 시기 신농씨의 세력이 점차 쇠퇴해지며 각 부락 간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 상태로 당시 한 부락의 수령 헌원(轩辕) 황제(黄帝)는 전쟁 중에 점차 강성해지며 많은 작은 부락들을 모두 복속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염제(炎帝)와 치우(蚩尤)는 모두 강력했던 부락의 수령으로 염제(炎帝)와 치우(蚩尤)는 황제(黄帝)의 최대 적수였다. 처음에는 염제(炎帝)와 치우(蚩尤) 간에 충돌이 발생하자 염제는 치우를 당해내지 못하고 허베이 일대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염제는 황제와 중원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반천(阪泉)에서 상고시대 최초의 전쟁으로 3차에 걸쳐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최종적으로 황제(黄帝)가 염제(炎帝)를 물리치며 복속시켰다. 이후 염제족과 황제족은 연합을 통해 세력을 확장시키며 탁록에서 치우(蚩尤)를 물리치며 중원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반천지전(阪泉之战)이 일어난 장소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허베이 줘루(涿鹿, 탁록)의 동남부라는 설과 지금의 베이징 옌칭(延庆, 연경)이라는 설이 있으며 또 다른 설로는 반천(阪泉)이 지금의 산시(山西) 윈청시(运城市, 운성시) 제저우진(解州镇, 해주진)이라는 설도 있다. 그 근거로는 제저우진(解州镇, 해주진)이 춘추(春秋) 진국(晋国) 시기에 해량(解梁)으로 불리었으며 한대(汉代) 해현(解县)이 설치되었는데 해현지(解县志)의 기록에 따르면 해량(解梁)은 고대에 줘루(涿鹿, 탁록)로 불렸다고 기록되어있다.
또 한 가지 근거로는 지도상으로 볼 때 염제(炎帝)의 도성(都城)은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영제시 푸저우진(蒲州镇, 포주진)인 포판(蒲阪)이며 ‘황제거우헌지구(黄帝居于轩辕之丘)’라는 기록상 지금의 정저우시(郑州市) 헌원구(轩辕丘)로 윈청시(运城正, 운성시)는 바로 이 두 지점의 중간지역이라는 점이다. 다른 설명으로 황제(黄帝)가 염제를 습격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얻은 점에 근거하여 반천이 윈청(运城, 운성) 해량(解梁)이라는 설명은 비교적 신빙성이 있으나 허베이 줘루(涿鹿, 탁록)의 경우에는 양측이 의도적으로 북상하여 전쟁을 벌인 것으로 비합리적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설명은 윈청(运城, 운성)의 해량(解梁)이 가장 유력한 반천지전(阪泉之战)의 장소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반천지전 [阪泉之战, Battle of Banquan] (중국행정구획총람, 2010. 8. 1., 황매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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