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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풀이

패수

2024.07.31

魏書/卷106上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wikisource.org)

懷州
懷州〈天安二年置,太和十八年罷,天平初復。〉

領郡二  縣八
戶二萬一千七百四十  口九萬八千三百一十五
河內郡〈漢高帝置。〉
領縣四
戶九千九百五  口四萬二千六百一
野王〈二漢、晉屬,州、郡治。有太行山、華岳神。〉  沁水〈二漢、晉屬,治沁城。[73]有沁水、濟水。〉  河陽〈二漢、晉屬,後罷,孝昌中復。〉  軹〈後漢、晉屬,治軹城。有軹關。〉
武德郡〈天平初分河內置。〉
領縣四
戶一萬一千八百三十五  口五萬五千七百一十四
平臯〈二漢、晉屬河內。有平臯陂、平臯城、安昌城。〉  溫〈二漢、晉屬河內。有溫。[74]浿水。〉[75]  懷〈二漢、晉屬河內。有長陵城、懷城。〉  州〈二漢、晉屬河內。有雍城、中都城、金城。

 

회주
회주〈천안 2년(서기 903년) 설치, 태화 18년(서기 844년) 폐지, 천평 초기에 다시 설치됨.〉

**영군(領郡)** 2개, **현(縣)** 8개  
**호(戶)** 21,740, **인구(口)** 98,315

**하내군(河內郡)〈한 고제(漢高帝)가 설치.〉**
영현(領縣) 4개  
호(戶) 9,905, 인구(口) 42,601

1. 야왕(野王)〈한(漢), 진(晉) 때 속함, 주(州), 군(郡) 치소(治所). 태행산(太行山), 화악신(華岳神)이 있음.〉
2. 침수(沁水)〈한(漢), 진(晉) 때 속함, 침성(沁城)에서 다스림. 침수(沁水), 제수(濟水)가 있음.〉
3. 하양(河陽)〈한(漢), 진(晉) 때 속함, 후에 폐지, 효창(孝昌) 중에 다시 설치됨.〉
4. 치(軹)〈후한(後漢), 진(晉) 때 속함, 치성(軹城)에서 다스림. 치관(軹關)이 있음.〉

**무덕군(武德郡)〈천평 초기에 하내(河內)를 나누어 설치.〉**
영현(領縣) 4개  
호(戶) 11,835, 인구(口) 55,714

1. 평고(平臯)〈한(漢), 진(晉) 때 하내(河內)에 속함. 평고비(平臯陂), 평고성(平臯城), 안창성(安昌城)이 있음.〉
2. 온(溫)〈한(漢), 진(晉) 때 하내(河內)에 속함. 온(溫). 패수(浿水)가 있음.〉
3. 회(懷)〈한(漢), 진(晉) 때 하내(河內)에 속함. 장릉성(長陵城), 회성(懷城)이 있음.〉
4. 주(州)〈한(漢), 진(晉) 때 하내(河內)에 속함. 옹성(雍城), 중도성(中都城), 금성(金城)이 있음.〉

 

浿水 楊校:「《左傳》〈襄十六年〉杜注:『湨水出河內軹縣。』《水經濟水注》〈卷七〉有『湨水』。義橋石像碑『沇、湨雙吐。』字從『狊』,不從『貝』,此『浿』為『湨』之誤。」溫校亦引杜注,謂當作「湨」。

 

패수(浿水)--> 양교(楊校): "《좌전(左傳)》〈양공 16년〉 두 주석: '격수(湨水)는 하내(河內) 지현(軹縣)에서 나옵니다.' 《수경(水經)》 제수주(濟水注)〈권 7〉에 '격수(湨水)'가 있습니다. 의교 석상 비문에 '연(沇), 격(湨)가 함께 솟구친다.'라고 있습니다. 글자는 '격(狊)'에서 따오고 '패(貝)'에서 따오지 않았습니다. 이 '패(浿)'는 '격(湨)'의 잘못입니다." 온교(溫校) 또한 두 주석을 인용하여 '격(湨)'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주: 湨 강 이름 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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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史/卷26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wikisource.org)

 

河東南路
  河東南路,府二,領節鎮三,防禦一,刺郡六,縣六十八,鎮二十九,關六。

  平陽府,上。宋平陽郡建雄軍節度。本晉州,初為次府,置建雄軍節度使。天會六年升總管府。置轉運司。興定二年十二月以殘破降為散府。有書籍。產解鹽、隰州綠、卷子布、龍門椒、紫團參、甘草、蒼術。戶一十三萬六千九百三十六。縣十、鎮一:

  臨汾天會六年定臨汾為次赤,餘並次畿,置丞、簿、尉各一。有姑射山、平水、壺口山、汾水。

  襄陵倚。有浮山、汾水、橘水。鎮一故關。

  洪洞有霍山、汾水。

  趙城有姑射山、汾水、霍水。

  霍邑貞祐三年七月升為霍州,以趙城、汾西、靈石隸焉。興定元年七月升為節鎮,軍曰鎮定。有霍山、汾水、彘水。

  汾西有汾西山、汾水。

  岳陽有烏嶺山、通軍水。

  浮山舊名神山,大定七年更為浮山,興定四年更名曰忠孝。

  和川

  冀氏

  隰州,上,刺史。宋大寧郡。團練。舊大寧郡軍刺史,天會六年改為南隰州,以與北京隰州重也,天德三年去「南」字。戶二萬五千四百四十五。縣六、關四:

  隰川倚。有石馬山、石樓山。

  仵城興定五年正月升為隰川之午城鎮置。

  蒲興定五年正月升為蒲州,以大寧隸焉。有孤石山、橫木嶺。

  大寧有孔山、黃河、日斤水。關一馬門關。

  永和有樓山、黃河、仙芝水。關一永和關。

  石樓有石樓山、黃河、龍泉。關二永甯、上平關。

  吉州,下,刺史。宋置團練。舊名慈州,天德三年改為耿州,置文成郡軍,明昌元年更名吉。戶一萬三千三百二十四。縣二:

  吉鄉有壺口山、孟門山、黃河、蒲水。

  鄉寧

  河中府,散,上。宋河東郡。舊置護國軍節度使,天會六年降為蒲州,置防禦使。天德元年升為河中府,仍舊護國軍節度使。大定五年置陝西元帥府。戶十萬六千五百三十九。縣七、鎮四:

  河東倚。有中條山、五老山、黃河、媯水、汭水。鎮二永樂、合河

  滎河貞祐三年升為滎州,以河津、萬泉隸焉。有黃河、汾水。睢丘。鎮一北郎。

  虞鄉有雷首山、中條山、壇道山。

  萬泉鎮一胡壁。

  臨晉有三疑山、黃河。

  河津

  猗氏有涑水。

  絳州,上。宋置絳郡防禦。天會六年絳陽軍節度使。興定二年十二月升為晉安府,總管河東南路兵馬,三年三月置河東南路轉運司。戶一十三萬一千五百一十。縣七、鎮五、關一:

  正平倚。劇。有定境山、汾水、澮水、鼓水。鎮一澤掌。

  曲沃劇。有絳山、絳水、汾水、澮水。鎮二柴村、九王。

  稷山有稷山、汾水。

  翼城興定四年七月升為翼州,以垣曲、絳縣隸焉。元光二年升為節鎮,軍曰翼安。有澮高山、清野山、烏嶺山。

  太平有汾水。

  垣曲有王屋山、清廉山、黃河、清山。鎮一皋落。關一行台。

  絳有太陰山、教山、絳水。鎮一繪交。

  平水興定四年七月徙置汾河之西,從平陽公胡天作之請也。

  解州,上,刺史。宋慶成軍防禦,國初置解梁郡軍,後廢為刺郡。貞祐三年複升為節鎮,軍名寶昌。興定四年徙治平陸縣。戶七萬一千二百三十二。縣六、鎮四:

  解倚。有壇道山、鹽池。
       平陸有吳山、黃河。鎮一張店。

  芮城宋隸陝州。有中條山、黃河、龍泉。

  夏有巫鹹山、中條山、淡水。鎮一曹張。

  安邑有中條山、稷山、鹽池、涑水。

  聞喜有九龍山、湯山、涑水。鎮二東鎮、劉莊。

  澤州,上,刺史。宋高平郡。天會六年以北京澤州同,加「南」字。天德三年複去「南」字。貞祐四年隸潞州昭義軍,後又改隸孟州。元光二年升為節鎮,軍曰忠昌。戶五萬九升四百一十六。縣六、鎮二:

  晉城倚。有太行山、丹水、白水、天井關。鎮二周村、巴公。舊又置星軺鎮。

  端氏有石門山、巨峻山。

  陵川有太行山、九仙山。

  陽城元光二年十一月升為績州。有王屋山、濩澤。

  高平有頭顱山、米山、丹水。

  沁水有鹿臺山、沁水、馬邑山。

  潞州,上。宋隆德府上黨郡昭德軍節度使。天會六年,節度使兼潞南沁觀察處置使。戶七九千二百三十二。縣八、鎮四:

  上黨倚。鎮一八義。

  壺關有抱犢山、紫團山、赤壤山。

  屯留有盤秀山、絳水。鎮一寺底。

  長子有羊頭山、發鳩山、堯水鎮一橫水。

  潞城有三垂山、伏牛山、潞水、漳水

  襄垣有鹿臺山、涅水、漳水。鎮一礻虎亭。

  黎城有白岩山、故壺口關。

  涉貞祐三年七月升為崇州,以黎城縣隸焉。四年八月以殘破複為縣。興定五年九月複升為州。有崇山、涉水。

  遼州,中,刺史。宋本樂平郡刺史,天會六年以與東京遼州同,加「南」字,天德三年複去「南」字。戶一萬五千八百五十。縣四、鎮一、關一:

  遼山倚。有箕山、青谷水。鎮一平城、舊縣也、貞元間廢為鎮,屬遼山縣,及廢舊芹泉鎮。關一黃澤。

  榆社有武鄉水、石勒漚麻池。

  和順有九原山

  儀城舊為平城縣,貞元二年廢入遼山為鎮,貞祐四年複升為縣,更今名。

  沁州,中,刺史錦山郡。宋威勝軍,天會六年升為州。元光二年升為節鎮,軍曰義勝。戶一萬八千五十九。縣四、鎮一:

  銅鞮倚。有銅鞮山、石梯山、洹水、交水。

  武鄉有胡甲山、武鄉水。鎮一南關。

  沁原元光二年十一月升為穀州。有霍山、沁水。

  綿上有羊頭山、沁水。

  懷州,上,宋河內郡防禦,天會六年以與臨潢府懷州同、加「南」字,仍舊置沁南軍節度使,天德三年去「南」字。皇統三年閏四月置黃沁河堤都大管勾司。大定五年置行元帥府。興定五年置招撫司。戶八萬六千七百五十六。縣四、鎮六:

  河內倚。有太行陘、太行山、黃河、沁水、浿水。鎮四武德、柏鄉、萬善、清化。

  修武有濁鹿城。鎮一承恩。

  山陽興定四年以修武縣重泉村為山陽縣,隸輝州。

  武陟有太行山、天門山、黃河、沁水。鎮一宋郭。


회주(懷州)
상급, 송나라의 하내군 방어처. 천회 6년(서기 1128년)에 임황부 회주와 같게 하고, "남(南)" 자를 추가하였으며, 여전히 심남군 절도사를 설치하였다. 천덕 3년(서기 1151년)에 "남(南)" 자를 제거하였다. 황통 3년(서기 1143년) 윤 4월에 황심하제도대관구사(黃沁河堤都大管勾司)를 설치하였다. 대정 5년(서기 1165년)에 행원수부(行元帥府)를 설치하였다. 흥정 5년(서기 1221년)에 초무사(招撫司)를 설치하였다. 호(戶)는 86,756호. 현(縣) 4개, 진(鎮) 6개:

하내(河內)의거지. 태행형(太行陘), 태행산(太行山), 황하(黃河), 심수(沁水), 패수(浿水)가 있다. 진(鎮) 4개는 무덕(武德), 백향(柏鄉), 만선(萬善), 청화(清化).

수무(修武) 탁록성(濁鹿城)이 있다. 진(鎮) 1개는 승은(承恩).

산양(山陽)  흥정 4년(서기 1220년)에 수무현(修武縣) 중천촌(重泉村)을 산양현(山陽縣)으로 하여 회주(輝州)에 속하게 하였다.

무척(武陟) 태행산(太行山), 천문산(天門山), 황하(黃河), 침수(沁水)가 있다. 진(鎮) 1개는 송곽(宋郭).


  孟州,上。宋濟源郡節度,天會六年降河陽府為孟州,置防禦,守盟津。宣宗朝置經略司。戶四萬一千六百四十九。縣四、鎮二:

  河陽倚。有嶺山、黃河、湛水、同水。鎮二谷羅、沇河。

  王屋有王屋山、天壇山、析城山、黃河。

  濟源有太行山、孔山、濟水、澳水、沁水。

  溫有黃河、湋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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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浿水”的搜索结果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wikisource.org)

 

水經注/14 年,

遣樓船將軍楊僕、左將軍荀彘討右渠,破渠于浿水,遂滅之。若浿水東流,無渡浿之理,其地今高句麗之國治,余訪番使,言城在浿水之陽。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漢武帝置,而西北流。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又漢興,以朝鮮爲遠,循遼東故塞至浿水爲界。考之今古,於事差謬,蓋《經》誤證也。〉

 

수경주/14
한 무제는 건원 6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를 보내 우거왕(右渠)을 정벌하게 하였고, 패수(浿水)에서 우거왕을 물리쳐 마침내 그를 멸망시켰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널 수 없을 것이며, 그 지역은 지금의 고구려의 국치(國治)이다. 내가 번사(番使)에게 물어보니, 성이 패수의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 물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樂浪) 조선현(朝鮮縣)을 지나는데, 이곳이 바로 낙랑군(樂浪郡)의 치소이며, 한 무제가 설치한 것이다. 물은 서북쪽으로 흐른다. 《지리지(地理志)》에는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까지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한나라가 흥성할 때, 조선이 멀리 있음을 이유로 요동(遼東)의 옛 경계를 따라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와 관련하여 잘못된 점이 있는데, 아마도 《경(經)》에서 잘못 증명한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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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중국 고전 《수경주》 14권에서 한 무제가 패수를 중심으로 우거왕을 정벌하고 고구려 지역을 논하는 대목을 설명한 것입니다. 패수의 흐름과 관련된 역사적, 지리적 정보를 제공하면서, 당시에 잘못된 부분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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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史遺文/37

浿水兩處海口,每處約有二三萬人馬。東西兩岸,築有敵台,水中橫有浮橋,守備極嚴。近日聞天兵已渡遼水,圍了遼東,有令著分兵在沿江把截,把守津渡處所。只不知還有多少人?」叔寶又想:「鴨綠去平壤尚遠,浿水離平壤止有六十里。他料我兵沿海而行,必過鴨綠,方過浿水…

 

 수사유문/37
패수(浿水)의 두 곳 하구에는 각각 약 2~3만의 군사와 말이 주둔하고 있었다. 동서 양안에는 적대(敵台)가 세워져 있었고, 물 위에는 부교(浮橋)가 가로놓여 있어 방어가 매우 엄격했다. 최근에 천병(天兵)이 이미 요수를 건너 요동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군사를 나누어 강을 따라 파견하여 나루터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다만, 얼마나 많은 병력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숙보(叔寶)는 또 생각했다. "압록강에서 평양까지는 아직 거리가 멀지만, 패수에서 평양까지는 불과 60리밖에 되지 않는다. 적이 우리 군대가 해안을 따라 행군하여 반드시 압록강을 건너 패수를 지나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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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중국 고전 《수사유문》 37권에서 패수 주변의 군사적 방어 상황을 설명한 대목입니다. 패수 하구의 군사 배치와 방어 체계가 언급되어 있으며, 숙보라는 인물이 전략을 구상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한, 패수와 평양의 거리와 군사적 예상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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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正義 (四庫全書本)/卷115  사기정의 (사고전서본) / 권115

也自始全燕時嘗畧屬真番朝鮮為置吏築鄣塞,秦滅燕屬遼東外儌, 漢興為其逺難守復脩遼東故塞至浿水為界.

처음 연나라가 완전할 때, 일찍이 진번과 조선 지역을 약탈하여 관리를 파견하고 장새(鄣塞)를 쌓았습니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이 지역은 요동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한나라가 흥기하면서 이 지역이 멀고 지키기 어려워 다시 요동의 옛 장새를 수리하여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습니다.

 

〈地理志云浿水出遼東塞外西南至樂浪縣西入海, 浿普大反〉  屬燕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命謂教令〉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㑹孝恵髙后時天下初定遼東…

 

《지리지》에는 "패수는 요동의 장새 바깥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낙랑현 서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패수는 보통 "보대반"라고도 합니다.
(주:普 두루 보, 넓을 보)

 

屬燕燕王盧綰反入匈奴 滿亡命〈命謂教令〉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㑹孝恵髙后時天下初定遼東…

 

연나라 왕 노관(盧綰)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갔고, 많은 망명자들과 함께 천 명 이상의 무리를 모아, 머리를 곱게 묶고 만이(蠻夷)의 복장을 한 채 동쪽으로 달아나 장새를 넘어 패수를 건넜습니다. 그들은 진나라가 비워둔 땅에 자리 잡고, 위아래로 장새를 수리하여 진번, 조선의 만이와 옛 연나라, 제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었습니다. 수도는 왕험성(王險城)에 두었고, 효혜황제와 고후 시기에 이르러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었으며, 요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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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은 《사기정의》 권115에서 연나라와 진나라, 한나라 시기의 조선 지역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설명한 대목입니다. 진나라와 한나라의 경계 설정, 연나라 왕 노관의 반란과 흉노로의 도피, 그가 조선 지역에 정착하여 왕국을 세우게 된 과정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패수의 위치와 지리적 설명도 덧붙여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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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卷115

朝鮮王滿者,故燕人也。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筑鄣塞。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사기/권115
조선왕 만(滿)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이었다. 연나라가 한창 전성기일 때,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 지역을 점령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장새(鄣塞)를 쌓았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이 지역은 요동 외곽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가 흥기하면서 이 지역이 멀고 지키기 어렵다고 여겨 다시 요동의 옛 장새를 수리하여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갔고, 만(滿)도 망명하여 천 명 이상의 무리를 모아 머리를 곱게 묶고 만이(蠻夷)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달아나 장새를 넘어 패수를 건넜다. 그는 진나라가 비워둔 땅에 자리 잡고, 위아래로 장새를 수리하여 진번과 조선의 만이, 그리고 옛 연나라와 제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었다. 수도는 왕험성(王險城)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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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은 《사기》 권115에 수록된 내용으로, 조선왕 만(위만)이 연나라 출신으로, 연나라 시절에 진번과 조선 지역을 점령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장새를 쌓았던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후 진나라의 멸망과 한나라의 경계 설정, 연왕 노관의 반란과 만의 흉노로의 도피, 그리고 조선 지역에 정착하여 왕국을 세우게 된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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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菴集 (安鼎福)/卷十 浿水。

순암집 (안정복) / 권십 패수(浿水)

 

求居西鄙。此似指今鴨綠江也。唐書云高麗城南涯浿水。酈道元又云蕃使言平壤城在浿水之陽。按水北曰陽。則此似指今大同江也。東史百濟始祖定疆域。北至浿水。說者以此爲今平山之猪灘。


패수는 서쪽 변방에 있다고 전해진다. 이는 현재의 압록강을 지칭하는 것 같다. 《당서》에서는 고구려성 남쪽 언덕에 패수가 있다고 하였다. 여도원(酈道元)도 또한 "번사(蕃使)의 말에 따르면 평양성이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물의 북쪽을 양(陽)이라고 하므로, 이는 현재의 대동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사》(東史)에서는 백제의 시조가 영토를 정할 때, 북쪽 경계가 패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설명하는 이들은 이를 현재 평산(平山)의 저탄(猪灘)이라고 본다. 

 

隋書來護兒率江淮水軍。渡海至浿水。去平壤六十里。據此則似爲猪灘。下文宇文述等九軍。會於鴨綠水西云。則鴨綠之非浿…

 

《수서》에는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패수에 도착했으며, 평양에서 6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저탄으로 추정된다. 다음 문장에서는 우문술(宇文述) 등이 아홉 군사를 이끌고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고 하므로, 압록강이 패수가 아닌 것 같다.
(주: 이 내용은 강회의 수군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패수에 도착했다는 기록으로 패수가 하남성 황하 북변에 있는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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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안정복의 《순암집》 권십에서 패수에 대한 설명을 다룬 부분입니다. 패수는 서쪽 변방에 위치하며, 현재의 압록강이나 대동강으로 추정됩니다. 《당서》와 역도원의 기록에 따르면 패수가 평양성 북쪽에 있으며, 백제의 시조가 북쪽 경계를 패수로 정했다고 합니다. 또한, 《수서》에서는 내호아가 이끈 수군이 패수에 도착했으며, 평양과의 거리가 60리라고 기록되어 있어 패수의 위치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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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10

浿水即古泥河也自東逆流數百里至遼陽豬蓄不流有蓒芋草生於泊中故名蓒芋泊明一統志徙之又以朝鮮大通江為浿水考 盛京通志泥河在海城縣西南六十五里葢平縣北五十五里源出聖水山流至米真山西散漫為遼時之蓒芋泊與朝鮮界内之浿江不同也〉東窮海西契丹築城郭以居萬嵗通天中度遼水…

 

흠정만주원류고 (사고전서본) / 권10
패수(浿水)

패수는 곧 고대의 니하(泥河)이다. 동쪽에서 거슬러 수백 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요양에 이르는데, 돼지와 같은 물건들이 모여 흐르지 않고, 호수 안에 순우초(蓒芋草)가 자라기 때문에 순우박(蓒芋泊)이라 이름 붙여졌다. 《명일통지(明一統志)》에서는 이를 다시 옮겨 조선의 대동강을 패수로 삼았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 따르면, 니하(泥河)는 해성현(海城縣) 서남쪽 65리에 있으며, 개평현(葢平縣) 북쪽 55리에 있다. 이 강은 성수산(聖水山)에서 발원하여 미진산(米真山) 서쪽에 이르러 흩어지는데, 이는 요(遼)나라 시기의 순우박과 조선 경내의 패강(浿江)과는 다르다.

동쪽은 바다와 맞닿고 서쪽은 거란(契丹)이 성곽을 쌓고 살았으며, 만세통천(萬嵗通天)에 요수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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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흠정만주원류고》 권10에서 패수(浿水)에 관한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패수는 고대의 니하(泥河)로, 동쪽에서 요양에 이르기까지의 물길을 설명하며, 순우초(蓒芋草)가 자라는 순우박(蓒芋泊)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니하와 조선 경내의 패강이 다르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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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平御覽 (四部叢刊本)/卷之七百八十 태평어람 (사부총간본) / 권 780

封之箕子旣受周之封不得無臣禮故於十二祀來朝. 吏記曰朝鮮張晏注曰朝鮮有濕水洌水汕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

**봉지**
기자가 주나라에 봉함을 받은 후 신하의 예를 소홀히 할 수 없었기에 12년에 한 번 조정에 나아갔다. 《이기(吏記)》에서는 "조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장안(張晏)의 주석에 따르면, 조선에는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가 있어 열수로 합쳐진다고 한다. 낙랑 조선이 이곳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

 

又曰朝鮮王滿燕人也自始燕時嘗略屬眞畨朝鮮爲置 吏築鄣塞

또한 "조선왕 만(滿)은 연나라 사람이다. 연나라 전성기 시절 진번과 조선 지역을 잠시 소속시켰고 관리를 두고 장새(鄣塞)를 쌓았다.

 

𥘿滅燕屬遼東外徼漢興爲逺難守復脩遼東 故塞至浿水爲界屬燕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 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𥘿故空地上下 鄣稍役屬眞畨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이 지역은 요동 외곽에 속했다. 한나라가 흥기했을 때는 멀고 지키기 어려워 다시 요동의 옛 장새를 수리하여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나라 왕 노관(盧綰)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갔고, 만(滿)은 망명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머리를 곱게 묶고 만이(蠻夷)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달아나 장새를 넘어 패수를 건넜다. 그는 진나라가 비워둔 땅에 자리 잡고 위아래로 장새를 수리하여 진번, 조선의 만이 및 옛 연나라, 제나라의 망명자들을 소속시켜 왕이 되었다. 수도는 왕험(王險)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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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은 《태평어람》 권 780에서 조선과 관련된 역사를 설명한 부분입니다. 기자(箕子)가 주나라에 봉함을 받은 이후의 상황과 조선의 지리적 위치, 조선왕 위만(滿)이 연나라 출신으로 조선을 다스리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조선의 역사적 배경과 연나라와의 관계, 그리고 위만 조선의 건국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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