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2
모든 메모리 사이클에는 하나의 촉발 요인, 혹은 여러 개의 촉발 요인이 존재해 왔습니다. 과거에는 스마트폰의 등장, 그다음에는 SSD 기반 노트북의 확산, 이어서 클라우드 스토리지의 성장 등이 수요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이클에서 수요를 주도하는 핵심 동력은 단연 AI입니다.
대규모 언어 모델을 학습하고 실제 서비스 환경에 배치하려면 막대한 양의 메모리와 스토리지가 필요합니다.
학습 클러스터에서 GPU 노드 하나만 보더라도 수백 기가바이트의 DRAM과 수 테라바이트에 달하는 플래시 스토리지를 소비할 수 있습니다. 이를 수천, 수만 대 단위로 확장하는 대형 데이터센터 환경에서는 그 규모가 말 그대로 압도적인 수준에 이릅니다.
최근 OpenAI의 ‘스타게이트(Stargate)’ 프로젝트는 삼성과 SK하이닉스와 월 최대 90만 장 규모의 DRAM 웨이퍼 공급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물량만 놓고 보면 전 세계 DRAM 생산량의 약 40%에 육박하는 수준입니다.
실제로 이 전량이 모두 집행될지 여부와는 별개로, 이런 계약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AI 기업들이 얼마나 공격적으로, 그리고 얼마나 거대한 규모로 메모리 공급을 선점하려 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업체들 역시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고집적 NAND 제품은 이미 수개월 치 물량이 사실상 완판된 상태이며, 삼성의 차세대 V9 NAND도 정식 출시 이전부터 대부분의 물량이 예약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마이크론 역시 2026년까지의 HBM 생산량 거의 전부를 이미 선판매했습니다. 한때 분기 단위로 체결되던 계약은 이제 수년 단위로 길어졌고, 하이퍼스케일러들은 중간 유통을 거치지 않고 생산 단계에서 직접 물량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 여파는 소비자 시장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불황기 동안 메모리를 비축해 두었던 라즈베리 파이조차도, 메모리 비용 상승을 견디지 못하고 2025년 10월 가격 인상을 단행했습니다.
Compute Module 4와 5의 4GB 모델은 5달러, 8GB 모델은 10달러씩 인상됐습니다.
라즈베리 파이 CEO 에번 업튼(Eben Upton)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메모리 비용이 1년 전보다 약 120% 상승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제는 어떤 제품, 어떤 기업도 가격 상승의 파도를 피해 가기 어려운 상황이 된 셈입니다.
투자 우선순위의 변화
공급 부족은 단순히 수요가 너무 빨리 늘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공급 자체가 다른 방향으로 재배치되고 있다는 점도 핵심적인 요인입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NAND와 DRAM 제조사들은 무분별한 증설이 결국 시장 붕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호황기마다 과잉 투자가 뒤따랐고, 그 결과는 가격 폭락과 마진 붕괴였습니다. 이런 학습 효과 때문에 이번 사이클에서는 훨씬 더 절제된 대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삼성,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모두 자본지출(CapEx)을 HBM과 첨단 공정으로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HBM은 압도적으로 높은 마진을 제공하기 때문에 최우선 투자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마이크론의 2026년 HBM 생산량은 이미 전량 계약이 완료된 상태이며, HBM에 투입되는 웨이퍼 하나하나는 곧 기존 DRAM에 사용할 수 없는 물량을 의미합니다. NAND 역시 마찬가지로, 기술 개발과 생산 역량이 엔터프라이즈 고객을 위한 3D QLC NAND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대만 최대 NAND 컨트롤러 업체인 파이슨 일렉트로닉스(Phison Electronics)의 CEO는 바로 이러한 자본지출 방향 전환이 향후 10년간 공급 타이트 현상을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NAND는 내년부터 심각한 공급 부족에 직면할 것이며, 앞으로 10년 동안 공급이 계속 타이트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첫째, 플래시 업체들은 투자만 늘리면 가격이 붕괴됐고, 그때마다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둘째, 2023년을 기점으로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가 높은 마진을 이유로 막대한 자본을 HBM으로 돌리면서,
플래시에 대한 투자는 더 줄어들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움직임들이 보다 대중적인 제품군을 한층 더 강하게 압박하고 있습니다. DDR4는 수요가 줄어드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생산이 축소되고 있고, 한때 넘쳐 나던 TLC NAND 역시 제조사들이 수익성이 높은 영역에 자원을 우선 배분하면서 점점 배급 대상처럼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기술적으로는 구형이지만 여전히 필수적인 시장 구간들이 공급 부족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스토리지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NAND 플래시와 HDD가 동시에 제약을 받는, 보기 드문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한쪽 가격이 오르면 다른 한쪽이 완충 장치 역할을 해주었지만, 대규모 AI 모델 학습은 페타바이트 단위의 데이터를 끊임없이 흡수합니다. 그리고 그 데이터는 어딘가에 저장되어야 합니다.
이런 ‘웜(warm) 데이터’는 보통 데이터센터의 니어라인 HDD에 저장되는데, 지금은 수요가 너무 커진 나머지 최고 용량 드라이브의 리드타임이 1년을 훌쩍 넘길 정도로 늘어난 상황입니다.
겉으로 보면 해법은 단순해 보입니다. “수요가 이렇게 강하면 팹을 더 지으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하지만 메모리 산업에서는 이 선택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위험하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첫째, 시간 문제입니다.
최첨단 DRAM이나 NAND 팹 하나를 새로 짓는 데는 최소 3~5년이 걸립니다. 부지 확보, 장비 반입, 공정 안정화까지 고려하면 지금 착공해도 본격적인 양산은 수년 뒤입니다.
현재의 AI 수요 폭증은 분기 단위, 길어야 몇 년 단위로 전개되고 있는데, 팹 증설은 이 속도를 전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즉, “지금 부족하니 지금 늘린다”는 대응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둘째, 자본 효율성과 트라우마입니다.
메모리 업체들은 지난 10여 년 동안 혹독한 학습을 했습니다. 호황기마다 대규모 증설 → 공급 과잉 → 가격 폭락 → 수년간 적자라는 사이클이 반복됐습니다. 특히 NAND는 투자 회수 실패의 상징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번 사이클에서 삼성,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모두 **“무조건 증설”이 아니라 “어디에 쓰느냐”**를 먼저 봅니다. 그 결과가 HBM과 첨단 공정으로의 자본 집중입니다.
셋째, HBM의 기회비용입니다.
HBM은 같은 웨이퍼를 써도 DRAM이나 범용 NAND보다 훨씬 높은 마진을 제공합니다. 문제는 웨이퍼가 무한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HBM에 투입되는 웨이퍼는 곧 DDR4·DDR5·LPDDR·일반 DRAM으로 갈 수 없는 물량이고, NAND에서도 마찬가지로 QLC·엔터프라이즈 제품에 집중할수록 범용 TLC는 줄어듭니다. 팹을 더 짓지 않는 한, 공급은 ‘제로섬 게임’이 됩니다.
넷째, 장비와 인력의 병목입니다.
EUV, 고급 DUV, 테스트·패키징 장비는 이미 AI 반도체와 파운드리 쪽 수요로 포화 상태입니다. 팹을 짓는다고 해도 장비를 제때 들여올 수 없고, 숙련 엔지니어 역시 한정되어 있습니다. 특히 HBM은 후공정과 패키징 병목이 심해 “건물보다 사람이 더 부족한” 상황이 자주 발생합니다.
다섯째, AI 수요의 지속성에 대한 불확실성입니다.
AI 인프라 투자가 앞으로 10년 지속될 가능성은 높지만, 메모리 업체 입장에서 “10년 내내 지금 수준의 가격과 마진이 유지된다”고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3~4년 뒤 수요가 둔화되면, 지금 지은 팹은 곧바로 구조적 과잉 설비가 됩니다.
그래서 업체들은 증설보다 계약 선판매, 장기 공급 계약, 가격 인상이라는 방식으로 수급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의 상황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AI는 메모리와 스토리지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지만, 메모리 산업은 과거의 실패 때문에 쉽게 팹을 늘리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서 HBM이 DRAM을 잠식하고, QLC가 TLC를 밀어내며, HDD 부족이 SSD 수요를 다시 자극하는 연쇄 압박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왜 팹을 더 짓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현실적인 답은 이것입니다.
짓지 않는 게 아니라, 짓는 속도보다 수요가 훨씬 더 빨리 커지고 있고, 메모리 업체들은 이번에는 절대로 과잉투자의 함정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팹은 실제로 건설되고 있지만, 그 비용은 막대하고 가동까지 걸리는 시간도 매우 깁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그 부담이 더욱 큽니다.
신규 그린필드 메모리 팹 하나를 짓는 데에는 수십억 달러가 아니라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자본이 필요하며,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가기까지 수년이 소요됩니다.
기존 라인을 증설하는 경우조차도 장비 설치와 공정 보정에 수개월이 걸리는데, ASML이나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Applied Materials) 같은 핵심 장비 업체들조차 주문 적체(backlog)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제조사들은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에 대해서도 여전히 극도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만약 고객들이 재고를 충분히 쌓은 뒤 조달을 멈추거나 수요가 식기라도 한다면, 과도하게 증설된 시장은 순식간에 가격 붕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2019년과 2022년에 겪었던 혹독한 사이클의 상처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런 기억 때문에, 오늘날 AI 수요가 아무리 끝이 없어 보이더라도 기업들은 장기 사이클에 과감히 베팅하는 데 주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AI 열풍을 ‘버블’로 보는 시각 역시 여전히 존재합니다.
지정학적 변수는 이 복잡한 방정식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첨단 노광 장비에 대한 수출 통제와 희토류 원소에 대한 규제는 HDD 생산 능력 확장 계획 자체를 복잡하게 만듭니다.
HDD는 네오디뮴 자석을 사용하는데, 이는 가장 수요가 많은 희토류 자석 중 하나입니다. 하드디스크는 전 세계에서 희토류 자석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산업 중 하나이며, 현재 이 희토류 소재의 생산은 중국이 사실상 지배하고 있습니다.
최근 중국은 미·중 무역 갈등의 보복 조치로 자석 공급을 제한하기 시작했고,
이는 HDD 공급망에 직접적인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설령 자본이 충분히 마련된다 하더라도, 필요한 장비와 소재를 공급하는 밸류체인 자체가 이미 병목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 반도체 엔지니어 인력 부족까지 겹치면서 전체 일정은 더욱 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제조사들은 공격적인 증설보다는 의도적인 ‘절제’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설비를 무리하게 늘려 또 한 번의 붕괴를
감수하기보다는, 제한된 기존 공급을 높은 마진으로 판매하는 쪽을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상황에 대한 제조사들의 접근 방식은 당분간 바뀌기 어려워 보입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PC를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업그레이드하던 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고, 기업 고객들은 더 큰 인프라 예산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스토리지 어레이, 서버, GPU 클러스터 모두 이전보다 더 많은 메모리를 필요로 하고, 그 비용 역시 높아졌습니다.
많은 하이퍼스케일러들은 여러 업체의 커스텀 컨트롤러를 사용해 자체 SSD를 직접 설계·제조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Pure Storage와 같은 대형 기업들은 AI 데이터센터를 구동하는 올플래시 어레이용으로 막대한 양의 NAND를 선제적으로 확보합니다. 일부 하이퍼스케일러들은 이미 수년 치 물량을 미리 예약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반면 이런 협상력을 갖추지 못한 중소 사업자들은 더 긴 리드타임과 훨씬 가파른 비용 부담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양쪽 모두에서 유연성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소비자는 업그레이드를 미루거나 용량을 낮추는 선택을 할 수 있지만,
그 결과 고용량 드라이브와 대용량 메모리 채택 속도는 전반적으로 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 고객의 경우 선택지는 거의 없습니다. AI와 클라우드 워크로드에서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결국 비용 상승을 그대로 흡수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시장은 언젠가 균형을 되찾겠지만, 그 시점을 예측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신규 팹들이 건설되고 있고, 만약 수요 증가세가 둔화되거나 주요 고객들의 조달이 일시적으로 멈춘다면 사이클은 다시 과잉 공급 국면으로 돌아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NAND 플래시, DRAM, HDD 가격이 2026년까지 높은 수준을 유지할 가능성이 큽니다.
기업 고객, 특히 엔터프라이즈 수요가 계속해서 우선순위를 차지할 것이고,
소비자는 남은 물량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구조가 이어질 것입니다.
과거 몇 년간 당연하게 여겨졌던 계절성 가격 하락 역시, 당분간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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